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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0. 망각의 건강함(공수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0. 망각의 건강함(공수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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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망각의 건강함

공수 이야기

 

 

공수(工倕)가 선을 그리면 양각기와 곱자에 부합했고, 그의 손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할 뿐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영대(靈臺)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막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발을 잊는 것은 신발에 딱 맞은 것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에 딱 맞은 것이다. 앞에서 옳고 그름을 잊는 것은 마음에 딱 맞은 것이고, 내면의 변화도 없고 외부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주친 사태에 딱 맞은 것이다. 처음으로 딱 맞았지만 일찍이 딱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것은 딱 맞음의 잊음에 딱 맞은 것이다.

工倕旋而蓋規矩, 指與物化而不以心稽, 故其靈台一而不桎. 忘足, 履之適也; 忘要, 帶之適也; 知忘是非, 心之適也; 不內變, 不外從, 事會之適也; 始乎適而未嘗不適者, 忘適之適也. 달생12

 

 

비우고, 잃고, 잊어라

 

장자에게 ()’ ‘()’ 혹은 ()’ 등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세 개념은 모두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잃어버리고, 마음을 잊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를 제외하고 동서양 사유의 전통과는 어딘가 이질적인 주장입니다. 철학이 아니더라도 통념적으로도 장자의 이야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거나 잊은 상태는 수면이나 코마 상태 혹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취객 이야기에서 장자는 마차에서 떨어졌을 때 다칠 가능성이 취객이 술을 먹지 않은 사람보다 더 적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으니까요. 물론 장자가 권고한 비운 마음, 즉 허심(虛心)이 수면이나 코마 상태의 마음이나 인사불성의 마음과는 다르리라는 기대를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겁니다. 2,000여년 넘게 고전의 자리를 차지했던 장자가 수면이나 코마 혹은 인사불성을 이상적인 마음 상태라고 이야기했을 리 없다는 판단인 셈이죠. 바로 여기서 허심에 대한 종교적 해석이나 초월적 해석이 등장합니다. 허심은 일상적인 마음을 넘어서고, 동시에 수면이나 코마 상태의 마음이나 인사불성의 마음도 넘어서는 도인(道人)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무언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도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누군가 물어보면 여전히 머뭇거리게 될 테니까요. 장자의 허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잘해야 정색하면서 말할 겁니다. “폭포 근처나 절벽 끝에서 결가부좌를 해보세요. 수행을 완성해 마음을 비우면 도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입니다.

 

윤편 이야기포정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육체적 이성이나 몸적 마음을 강조합니다. 장자는 몸적 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비우고 잃어버리고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몸과 분리된 마음, 몸과 독립된 마음, 실체로 이해된 마음입니다. 정치철학적으로 장자의 이런 입장은 정신노동의 독립성과 우월성에 근거한 억압체제에 대한 비판과 공명합니다. 어쨌든 장자는 손과 하나가 되는 마음, 그리고 끌이나 칼과 하나가 되는 마음, 나아가 마침내 나무토막이나 소의 고유한 살결에 들어가 노니는 마음을 복원하려고 합니다. 전국시대에 소인이라 불리던 피지배계급이 간신히 보존하고 있던 마음입니다. ‘()’ ‘()’ 혹은 ()’ 등 개념은 바로 이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에만 집중하면 이 세 개념이 무언가 신비하고 초월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포정이야기에서 장자가 신() 개념을 이야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 ‘혹은 개념이 가진 부정적 뉘앙스가 낳을 오해와 착각을 막기 위해 신이라는 긍정적 개념을 제안한 겁니다. 이것이 윤편 이야기나 포정 이야기 외에도 삶의 달인을 다룬 이야기들이 장자에 많은 이유일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실체로 이해된 마음을 부정하고 몸적 마음을 긍정하려는 장자의 속내와 공명하는 철학자가 동아시아가 아니라 서양에서, 그것도 장자 사후 2,000여 년이 지난 뒤에 뜬금없이 탄생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입니다.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니체는 장자의 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장자가 들었다면 박수를 쳤을 만한 인상적인 구절입니다. 특히 소화불량은 장자도 부러워했을 매력적인 비유입니다. 니체에게 있어 망각은 소화가 양호하게 되는 상태에, 그리고 반대로 기억은 소화불량상태에 비유됩니다.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의 위에는 과거에 먹은 음식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새로운 음식을 맛나게 먹을 수 없습니다. 그저 위 속의 음식이 언제 소화될지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요. 소화불량이나 변비에 걸린 사람에게 행복을, 명랑함을, 희망을, 자부심을, 현재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입니다. 반면 소화가 왕성한 사람은 위 속을 잘 비우고 쾌변을 향유합니다. 바로 이것이 망각의 의미입니다. 위의 속을 깔끔히 비워내고 장에 남았던 변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반면 기억은 소화불량이자 만성변비의 상태입니다. 피부가 좋지 않고 식욕도 없고 신경질도 많이 나니, 건강할 리 없습니다. 망각 개념이 가진 부정적인 뉘앙스와 망각 개념에 대한 몰이해를 바로잡는 데 니체가 도움이 되는 이유입니다. ‘‘ ‘혹은 은 죽음의 잿빛이 아니라 활기의 푸른 빛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니까요. 너무나 장자적인 니체입니다.

 

 

 

공수는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

 

니체를 기다릴 장자는 아닙니다. 망각 개념의 긍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장자도 니체가 부러워할 만한 비유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폭발시키니까요. 달생편에 등장하는 공수 이야기는 그중 압권입니다. 윤편 이야기포정 이야기 등 장인을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은 공수 이야기에서 가장 깔끔하게 요약됩니다. 아울러 공수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개념이 가진 긍정적 의미를 멋진 비유로 해명하려고 합니다. 공수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공수라는 장인의 예술적 경지에 이른 기술을 묘사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개념의 의미를 다루는 부분입니다. 먼저 공수의 기술을 다루는 부분을 살펴보죠. 공수(工倕)는 소를 잘 잡던 포정이나 수레바퀴를 잘 만들던 윤편과 마찬가지로 소인, ()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공수는 기술자[] ()’를 뜻합니다. 공수는 궁궐이나 성곽을 만드는 기술자였던 듯합니다. 포정의 도구가 칼이고 윤편의 도구가 끌이라면 공수의 도구는 양각기와 곱자였지요. 양각기는 곡선을 그릴 때 사용하고 곱자는 직선을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양각기는 컴퍼스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그는 곡선이나 직선을 종이나 나무 혹은 바위에 그릴 때 컴퍼스와 곱자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컴퍼스와 곱자 없이도 그는 곡선이나 직선을 마치 컴퍼스와 자를 댄 것처럼 그렸으니까요. 기술의 장인이 되어버린 공수는 목재에 맨손으로 필요한 도안을 바로 그리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맨손으로 그린 원은 컴퍼스로 그린 것과 같고, 그가 그린 선은 자로 그린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선을 그리면 양각기와 곱자에 부합했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 구절입니다. “그의 손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할 뿐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指與物化而不以心稽].” 여기서 사물은 다양한 모양의 목재들이나 목재들의 복잡한 표면을 말합니다. 둥근 목재, 기다란 목재, 평평한 목재, 구불구불한 목재 등등 많기도 합니다. 혹은 동일한 목재라도 나이테 등 밀도와 조직이 다양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잠시 멈추어 생각할 겁니다. ‘이 목재는 너무 둥근데 잘랐을 때 부품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 다른 목재를 써야 할까?’ ‘이 부분은 너무 딱딱해서 자르기 힘드니 다른 부분에 도안을 그려야 할까? 어디가 좋을까?’ 공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장자가 공수는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다[不以心稽]”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공수는 목재에 선을 긋다가 잠시 멈추고 어떻게 그려야 할까하고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가 개념을 정의하는 방식입니다.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상태가 망의 상태니까요. 선을 긋는 행동을 멈추고 목재를 관조하는 마음은 공수에게 없습니다. 이 경우 순간적이나마 모든 것이 분리되고 맙니다. 마음, , , 목재 등이 다 분리되고 만다는 거죠. 마음만 움직이고 손도 먹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목재도 마음과 무관하게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고립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공수가 그리는 줄은 다양한 모양, 이질적인 조직에 부합하면서 막힘이 없습니다. “그의 손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한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겁니다. 마음, , , 목재 등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룬다는 뜻이니까요.

 

귀신처럼 완벽한 선을 그릴 때 공수에게 마음은 없는 것일까 요. 그럴 수는 없죠. 공수의 마음은 움직이는 손에 손이 잡고 있는 먹에, 그리고 먹이 긋고 지나가는 목재의 표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손은 둘이지만 하나이고, 손과 먹은 둘이지 만 하나이고, 먹과 목재도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장자는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다고 할 때의 마음, 즉 심()과는 구별되는 몸적 마음을 위해 새로운 이름을 제안합니다. ‘신령한 누각이라는 뜻의 영대(靈臺)’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자는 신령을 뜻하는 ()’이라는 글자로 마음을 누각을 뜻하는 ()’라는 글자로 몸을 상징하고 싶었던 겁니다. 포정 이야기에서 몸적 마음을 가리킨 신()이라는 개념이 너무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느낌을 준다는 장자의 우려가 느껴집니다. 최종적으로 장자는 공수의 경지를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그의 영대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막혀 있지는 않았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다양한 모양과 조직의 목재들과는 무관하게 마음을 통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세상과 거리를 두고서 마음의 흔들림을 잡는 수행과는 다른 겁니다. 오히려 상황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모양과 조직을 가로지르는 연속적인 선 긋기를 하면서, 공수의 마음은 손을 거치고 먹을 거쳐 목재를 구성하는 수많은 혹은 무한한 차이들의 매 계기에 집중하는 것이니까요. 자기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목재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그래서 공수의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막혀 있지는 않았다고 장자가 표현할 때,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독립된 마음의 하나가 아니라 마음과 손의 하나손과 먹의 하나’, 나아가 먹과 목재의 하나’, 결국 마음과 목재의 하나를 의미한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딱 맞음을 잊을 때

 

그의 손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할 뿐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 이미 공수의 마음, 즉 영대는 자신의 손가락, 나아가 목재의 모양과 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이럴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헤아리는 마음은 이 순간 작동할 수 없죠. 선 긋기가 제대로 되면 헤아리는 마음은 작동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역으로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헤아리는 마음이 작동하면 선 긋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라고. 장자는 이것을 ()’()’이라는 글자로 개념화합니다. ‘없다죽었다를 의미하는 ()’이라는 글자와 마음을 뜻하는 ()’이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망각이나 잊음으로 번역되는 ()’은 헤아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을 세상을 초월하거나 벗어난다는 초월적인 의미로 독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손에, 먹에, 그리고 목재에 마음이 스며들 때 손을, 먹을, 그리고 목재를 헤아리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은 세상과 타자와 소통한다는 내재적인 의미를 갖고 있죠. 장자가 ()’과 함께 ()’이라는 개념을 함께 사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에 이르다나 혹은 딱 맞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은 마음이 손이, 그리고 먹이 목재에 이르거나아니면 목재와 딱 맞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라는 개념이 그의 손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한다는 측면을 요약하고 있다면, ‘이라는 개념은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는 측면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할 후대의 독자들에 대한 노파심 때문이었을까요? 장자는 매우 근사한 비유를 하나 만듭니다. “우리가 발을 잊는 것은 신발에 딱 맞은 것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에 딱 맞은 것이라고 옳은 이야기입니다. 신발이 딱 맞으면 발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신발이 딱 맞지 않고 불편하면 우리는 발을 항상 의식하게 됩니다. 허리와 허리띠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딱 맞음을 의미하는 잊음을 의미하는 보다 중요합니다. 신발이나 허리띠가 몸에 딱 맞기에 우리는 발이나 허리를 저절로 잊게되니까요. 여기서 딱 맞음으로 풀이한 ‘~에 이르다라는 뜻도 있다는 점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A에 딱 맞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어떤 저항도 없이 A에 이르렀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저항으로 A에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A를 의식하고 마음으로 헤아리게 될 겁니다. 장자는 발과 허리라는 근사한 비유를 하나 던진 다음 공수의 경지를, 혹은 그 경지가 시사하는 교훈을 이라는 개념으로 일반화합니다. “앎에서 옳고 그름을 잊는 것은 마음에 딱 맞은 것이고, 내면의 변화도 없고 외부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주친 사태에 딱 맞은 것이라고. 하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러니까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은 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또한 나에게 딱 맞는 어떤 장소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의 내면은 안정될 뿐만 아니라 그곳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장소에 있을 때 내면의 동요가 일어나거나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린다면, 우리는 딱 맞는 장소에 있지 않은 셈이죠.

 

불행히도 간혹 우리는 생각하거나 말하곤 합니다. “이 사람은 나와 딱 맞아!” “이 음악은 나와 딱 맞아!” 혹은 이 장소는 나와 딱 맞아!”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과, 그 음악과, 그리고 그 장소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겁니다. 제삼자에게 그 사람은 나와 딱 맞아!” “그 음악은 나와 딱 맞아!” 혹은 그곳은 나와 딱 맞아!”라며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는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헤아리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생기게 됩니다. “딱 맞는다고 헤아리는 마음은 발이나 허리를 헤아리는 마음보다 더 기만적이고 더 치명적인 데가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목재의 결을 따라 선을 그릴 때 공수는 결코 딱 맞는다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직 선을 다 그린 뒤 공수는 딱 맞았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을 뿐이죠.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순간 공수는, 그의 손은, 그리고 그의 먹은 목재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겁니다. 그만큼 딱 맞는다라는 판단과 생각은 위험합니다. 특히나 이 사람과 딱 맞을 때, 이 음악과 딱 맞을 때, 이 장소와 딱 맞을 때는 말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딱 맞음의 잊음에 딱 맞음[忘適之適]”에 대해 이야기한 겁니다. 딱 맞는다는 생각마저 잊어야 정말로 딱 맞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딱 맞을 때 이 순간을 좌절시키는 딱 맞는다는 생각 자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공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장자는 이야기합니다. “처음으로 딱 맞았지만 일찍이 딱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것은 딱 맞음의 잊음에 딱 맞은 것이다.” 이 사람과 딱 맞는 순간, 이 음악과 딱 맞는 순간, 혹은 이 장소와 딱 맞는 순간, 우리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사람과, 이 음악과, 그리고 이 장소와 딱 맞았었다고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항상 딱 맞았었다고 느껴야 딱 맞는다는 생각, 딱 맞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싹트지 않을 테니까요. ‘은 대상화하는 순간 무력해진다는 걸 알 정도로 영민한 장자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29.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 / 31. 길과 말, 그 가능성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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