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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29.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현해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29.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현해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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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

현해 이야기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려(子犂), 자래(子來), 이렇게 네 사람 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말했다. “누가 없음을 머리로, 삶을 척추로, 그리고 죽음을 꽁무니로 생각할 수 있는가! 누가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한 몸이라는 걸 아는가! 나는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

子祀·子輿·子犂·子來四人相與語曰: “孰能以無爲首, 以生爲脊, 以死爲尻;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吾與之友矣!”

 

네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었다. 자여가 병이 들자 자사가 병문안을 왔다.

四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 俄而子輿有病, 子祀往問之.

 

자여가 말했다. “위대하구나! 저 사물의 만듦이 나를 이렇게 뒤틀리게 만드는구나! 구부러져 등이 튀어나오고 오장이 위로 향하며 턱이 배꼽에 숨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아졌고 목뼈가 하늘을 가리키니, 음양의 기운이 모두 뒤죽박죽이구나!”

: “偉哉, 夫造物者將以予爲此拘拘也.” 曲僂發背, 上有五管, 頤隱於齊, 肩高於頂, 句贅指天, 陰陽之氣有沴,

 

자여의 마음은 편안하여 아무런 일도 없는 듯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 우물에 자신을 비춰보며 말했다. “! 저 사물의 만듦이 또 나를 계속 뒤틀리게 만들려 하는구나!” 그러자 자사가 말했다. “자네는 그것이 싫은가?”

其心閑而無事, 跰躚而鑒於井, : “嗟乎! 夫造物者又將以予爲此拘拘也.” 子祀曰: “女惡之乎?”

 

자여가 대답했다. “아니, 내가 무엇이 싫겠는가! 내 왼팔을 차츰차츰 닭으로 변화시키면 나는 그에 따라 새벽을 알리는 소리를 내겠네. 내 오른팔을 차츰차츰 석궁으로 변화시키면 나는 그에 따라 구운 올빼미를 기다리겠네. 내 엉덩이를 차츰차츰 수레로 그리고 나의 신()을 말로 변화시키면, 나는 그에 따라 그것을 탈 것이니 다시 마구를 채울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얻는 것도 때에 맞은 것이고, 잃은 것도 따라야 할 것이네. 때에 편안해하고 따름에 머물러야 슬픔과 즐거움이 개입할 수 없는 법이지. 이것이 옛사람들이 매달린 데서 풀려남[縣解]’이라고 말했던 것이네. 그런데도 스스로 풀려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물 들이 더욱 얽어매게 될 거야. 게다가 사물은 자연을 이기지 못한 지 오래인데, 내가 또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 “, 予何惡! 浸假而化予之左臂以爲雞, 予因以求時夜; 浸假而化予之右臂以爲彈, 予因以求鴞炙; 浸假而化予之尻以爲輪, 以神爲馬, 予因以乘之, 豈更駕哉! 且夫得者, 時也; 失者, 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此古之所謂縣解也, 而不能自解者, 物有結之. 且夫物不勝天久矣, 吾又何惡焉!”

 

얼마 후 자래가 병에 걸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죽으려 할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둘러앉아 울고 있었다.

俄而子來有病, 喘喘然將死. 其妻子環而泣之.

 

자려가 가서 안부를 묻고는 말했다. “! 비키세요! 변화를 놀라게 하지 마세요!”

子犂往問之, : “! ! 無怛化!”

 

자려가 문에 기대어 말했다. “위대하구나! 만물의 만듦이여! 또 그대를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그대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 그대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그대를 벌레의 다리로 만들려고 하는가?”

倚其戶與之語曰: “偉哉造化! 又將奚以汝爲? 將奚以汝適? 以汝爲鼠肝乎? 以汝爲蟲臂乎?”

 

자래가 말했다. “부모가 명을 내리면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 자식은 따라야 해. 음양은 사람에게 단지 부모일 뿐만이 아니네. 그것이 나를 죽음에 가깝게 하는데, 만약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바로 무례한 자가 될 뿐이니, 음양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거대한 대지는 형체를 주어 나를 싣고, 삶을 주어 나를 일하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네. 그래서 나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죽음을 긍정하는 이유네. 지금 위대한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녹이고 있는데, 쇠붙이가 뛰어 올라와 나는 장차 반드시 명검 막야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위대한 대장장이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쇠붙이라고 생각할 것이네. 이제 한번 인간의 형체를 빌렸으면서도 사람일 뿐이야, 사람으로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저 변화의 만듦도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지금 한번 하늘과 땅을 거대한 용광로로 생각하고 변화의 만듦을 위대한 대장장이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편하게 잠들고 새롭게 깨어날 뿐이네.”

子來曰: “父母於子, 東西南北, 唯命之從. 陰陽於人, 不翅於父母. 彼近吾死而我不聽, 我則悍矣, 彼何罪焉? 夫大塊以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今大冶鑄金, 金踴躍曰: ‘我且必爲鏌鎁!’ 大冶必以爲不祥之金. 今一犯人之形而曰: ‘人耳! 人耳!’ 夫造化者必以爲不祥之人. 今一以天地爲大罏, 以造化爲大冶, 惡乎往而不可哉!” 成然寐, 蘧然覺. 대종사9, 10

 

 

세상에는 오직 있음

 

없음있음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요? 이상한 질문이지만, 당연히 있음이 없음보다 많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없음은 좌우지간 없는 것이니 있음보다 많을 리 없다고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거죠. 그런데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에서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다르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는 없음이 있음보다 더 많다고 말합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없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난해해 보이는 베르그송의 이야기를 간단한 비유로 쉽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사과가 있다고 해볼까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누가 가져갔는지 테이블 위에 사과가 없어졌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사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휑하니 비어 있는 테이블 위에 있었던 사과, 지금은 없는 사과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기만 합니다. 이 순간 우리의 머릿속에는 사과라는 관념과 없음이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사과가 있다는 관념에 없다는 관념이 더해져야 사과가 없다는 판단이 가능하니까요. 베르그송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없다는 경험은 오로지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의 관념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없음이나 ()’는 관념적일 뿐 실재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간단히 세계에는 있음만 있고 없음은 없다, 아니면 우리 마음속에만 없음이 있다고 외워두면 편합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사과가 없어진 것을 모르는 친구 앞에서 내가 그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해보세요. 나는 분명 없어진 그 사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는 내 기대와는 달리 반문할 겁니다. “테이블은 왜?” 나는 없어진 사과라는 부재를 경험하고 있지만, 친구는 테이블로 충만한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없음의 경험 혹은 부재의 경험에는 강도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더 소중한 것, 더 중요한 것,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 사라지면, 없음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우리를 압도합니다. 테이블 위에서 없어진 것이 사과가 아니라 10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라면, 전자의 없음보다 후자의 없음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사라진 사과도 분명 부재의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 경우 부재의 느낌은 약하고 순간적이어서 곧 사라집니다. 곧바로 테이블로 충만한 세계가 펼쳐질 겁니다. 반면 다이아몬드 반지의 없음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즉 모든 있음을 빨아들입니다. 테이블의 있음, 친구의 있음, 심지어 나의 있음마저 모조리 신경 쓰지 않게 될 테니까요. 이 정도가 되면 분명 다이아몬드 반지가 내 눈앞에 있는 데도 그것이 없어질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집착(Upādāna)이라고 부를만한 상황입니다. 테이블 위의 사과나 다이아몬드 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것들도 마찬가지니까요.

 

그중 젊음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죠. 50대 중년이 거울을 볼 때, , 젊음, 미모, 건강, , 권력, 지위, 평판 등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없어진 자신의 20대를 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50대의 충만한 있음,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타인들을 보기 힘들 겁니다. 부재한 20대의 젊음이 블랙홀이 되어 그 모든 것을 빨아들일 테니까요.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됩니다. 50대 중년이 거울에서 부재하는 20대의 젊음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는 멋진 주름과 희끗한 머리를 가진 그에게서 중년의 매력, 즉 성숙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 혹은 사건들과 제대로 관계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겁니다. 자신감을 상실한 그는 집 밖으로 나가기를 피할 테니까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 주치지 않는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없습니다. 50대 중년 은 20대의 젊음에 집착하느라 지금 여기(now & here)’ 50대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 대종사편의 현해 이야기가 이 중년에게 힘이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없는 것은 없고 오직 있음만 있다는 걸 가르쳐주니까요. 장자가 즐겨 사용했던 꿈 비유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테이블을 볼 때 없어진 사과를 보는 사람이 꿈을 꾸는 사람일 테니까요. 현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자신이 베르그송보다 먼저 없음의 느낌을 극복한 철학자라는 걸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장자는 베르그송 이상의 스케일, 대붕의 스케일을 보여줍니다. 젊음에 집착하는 50대 중년이 대붕의 등에 올라탄다면 베르그송마저 훌쩍 넘어설지도 모릅니다.

 

 

 

없음에 집착하지 않고 있음을 긍정하기

 

현해 이야기는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려(子犂), 그리고 자래(子來), 이 네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알려주면서 시작됩니다. 네 사람은 모두 없음을 머리로, 삶을 척추로, 그리고 죽음을 꽁무니로 생각하고, 삶과 죽음 그리고 있음과 없음이 한 몸이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친구가 된 겁니다. 네 사람 이 공유한 인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태어나기 이전의 없음과 죽은 다음의 없음마저 삶과 단절되지 않고 삶에 붙이는 존재론적 과감성입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 그리고 있음과 없음이 한 몸[生死存亡之一體]”이라는 근사한 테제로 요약됩니다. 있음과 없음이 한 몸이라는 것, 헤겔대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을 펼쳐보지 않더라도, 이것이 바로 생성(Werden, becoming)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음이 정() 없음이 반(), 그리고 생성이 합()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장자에게서 상황은 그 반대니까요. 생성이 절대적으로 먼저 주어집니다. 생성이 일차적이고 이걸 추상해서 나온 이차적인 것이 있음과 없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있음은 없음이 아니고, 없음은 있음이 아니라는 논리적 사유는 단지 우리 사유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헤겔이 있음과 없음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생성을 도출하려는 것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어쨌든 없음과 있음이 한 몸이니 없음 있음은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없음은 완전하고 순수한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계기가 묻어 있고, 있음도 완전하고 순수한 있음이 아니라 없음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결국 태어나기 전의 없음도 이제 순수한 없음이 아니라 무언가 있는 것으로 긍정되고, 죽은 뒤의 없음도 무언가 있는 것으로 긍정됩니다. 겨울에 카페 창가에 만들어진 성에꽃을 생각해보세요. 실연한 사람의 허허로운 한숨, 애인과의 달뜬 대화 중 내뿜은 숨, 주문을 받던 점원의 숨, 커피나 홍차가 뿜어낸 수증기, 창의 표면, 히터, 카페 내 공기 흐름, 실내 온도, 열린 문의 수와 열려 있던 시간 등등 수많은 조건들이 마주쳐 연결되어야 그 성에꽃이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이 중 하나라도 달랐다면, 그리고 마주치는 순서가 달랐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성에 꽃을 보았을 겁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내가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내 부모가 될 남녀가 있고, 카페도 있고, 와인도 있고, 바람도 있고, 사과도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시신이 있고, 가족도, 독수리도, 땅도, 바람도, 풀도, 강도 있습니다. 다른 것들이 내 시신을 분해하고 쪼개고 먹고 실어 나를 겁니다. 결국 생성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또 있음으로 이어지는 부단한 운동입니다. 다자가 연결되어 하나의 개체가 탄생하고, 그 개체를 유지하 던 연결이 풀리며 다시 다자로 열리는 과정이 생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나에 과도하게 집중하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내가 죽은 뒤의 상태를 순수한 없음이나 아무것도 없는 허무로 오인하게 됩니다. 분명 내가 있기 전에는 내가 없었고, 내가 죽은 뒤에 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나를 만든 많은 것들과 내가 먹을 많은 것들이 의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만든 많은 것들과 나를 먹을 많은 것들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을 때 다른 모든 있는 것들을 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생성을 긍정하면 나와 삶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완화되고, 반대로 나와 삶에 연연하면 우리는 생성을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사, 자여, 자려, 그리고 자래, 이 네 사람이 왜 없음을 머리로, 삶을 척추로, 그리고 죽음을 꽁무니로 생각했는지 짐작됩니다. 없음은 아직 마주치지 않은 다자들의 있음으로, 삶은 마주침이 지속되는 다자들의 있음으로, 그리고 죽음은 마주침이 와해된 다자 들의 있음으로 긍정했던 겁니다. 어느 경우는 세계에는 있음만 있고 없음은 없다는 원칙은 그대로 관철됩니다. 바로 이것이 네 사람이 공유한 생성의 철학, 그 총론입니다.

 

이제 현해 이야기의 나머지 방대한 각론 부분을 읽어볼 차례입니다. 이 부분은 그들이 공유한 생각이 존재론일 뿐만 아니라 실천철학이라는 것,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 삶이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현해 이야기의 각론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질병과 관련된 자여와 자사의 일화이고, 두 번째는 죽음과 관련된 자래와 자려의 일화입니다. 먼저 자여와 자사의 일화를 보면, 자여가 병이 들자 그의 친구 자사가 병문안을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무슨 일인지 자여는 꼽추가 되는 병에 걸립니다. 지금 말로는 척추후만증(脊椎後彎症, kyphosis)이라고 불리는 질병입니다. 이 병은 결핵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결핵균이 척추까지 감염시켜 발생하기도 하고, 외상을 입은 척추를 적절히 치료하지 않아 생기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병은 몹시 절망적인 질병입니다. 일단 일상적인 행동을 매우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는 사람이라면 집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게 할 만한 병이니까요. 그래서 자사도 병문안을 한 겁니다. 물론 자여가 없음은 없고 있음만 있다는 것을 말뿐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낸다면, 자사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사는 자여의 병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그가 생성의 철학자로서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병문안을 간 것입니다. 계속 친구로 있을지 아니면 절교할지는 여기서 결판이 나는 겁니다. 다행히도 자사와 자여의 우정은 지속될 겁니다. 자여는 없음에 집착하지 않음을 긍정했기 때문입니다. “위대하구나! 저 사물의 만듦이 나를 이렇게 뒤틀리게 만드는구나!” 이제는 사라진, 꼽추 이전의 정상적인 몸에 집착하지 않고, 자여는 꼽추가 된 지금 자신의 몸을 긍정합니다.

 

 

 

매달린 데서 풀려나다

 

실제로 자여는 아름다운 꽃을 보러 가듯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몸이 구부러지는 과정을 보고 감탄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자는 현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매단다는 뜻의 ()’풀린다는 뜻의 ()’로 구성된 현해(縣解)매달린 데서 풀려난다는 의미입니다. 밧줄에 발이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세요. 자여가 이제는 없는 건강한 몸에 연연한다면, 건강한 몸이 바로 그를 거꾸로 매달고 있는 밧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밧줄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것은 부재하는 것에 대한 애달픈 집착을 상징했던 겁니다. 끊으면 아래로 떨어져 다치거나 죽을 것 같기에 밧줄을 끊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매달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는 대지를 밟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꼽추는 정상적인 몸의 부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꼽추의 몸은 있음으로 긍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여는 말합니다. “얻는 것도 때에 맞은 것이고, 잃은 것도 따라야 할 것이네. 때에 편안해하고 따름에 머물러야 슬픔과 즐거움이 개입할 수 없는 법이지.” 여기서 현해라는 개념과 함께 기억해야 할 실천강령, 생성의 실천철학이 제안하는 실천강령이 하나 등장합니다. “안시이처순(安時而處順)!” 정상적인 몸을 얻은 좋은 상황도 긍정하고, 정상적인 몸을 잃은 나쁜 상황도 긍정하라는 겁니다. 당연히 좋은 것이라고 기뻐하고 나쁜 것이라고 슬퍼하는 감정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이럴 때 정상적인 몸과 꼽추의 몸에 대한 가치평가도 사라집니다. 그저 A라는 몸 상태가 B라는 몸 상태로 변했을 뿐입니다. 생성의 긍정입니다. A라는 몸 상태를 얻었듯 B라는 몸 상태도 얻은 겁니다. B라는 몸 상태를 A라는 몸 상태의 부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정상적인 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꼽추의 몸을 얻은 것이니까요. 이런 사유의 반전이 매달린 데서 풀려난다는 현해의 의미입니다.

 

이제 죽음과 관련된 두 번째 각론, 거의 대붕의 비행과 같은 스케일을 자랑하는 자래와 자려의 일화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이 일화를 통해 장자는 죽음이 나 자신이나 삶의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있음으로 이행하는 사건, 즉 생성의 한 가지임을 분명히 합니다. 자래의 임종 직전에 친구 자려가 찾아옵니다. 자려는 노파심에 자래에게 죽음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그대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그대를 벌레의 다리로 만들려고 하는가?” 시신을 뜯어먹는 쥐나 벌레를 생각해보세요. 시신은 해체되어 쥐나 벌레와 다시 결합됩니다. 시신도 있음이고, 잘게 부서진 살도 있음이고, 쥐나 벌레의 배 속에서 풀어진 살도 있음이 고, 양분이 되어 쥐의 간이 된 것이나 벌레의 다리가 된 것도 있음입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도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게 이런 식으로 전달되어 변화하고 생성되니까요. 죽기 전에 친구를 보게 되어 자래는 기뻤나 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대서사시를 자래는 노래합니다. “지금 위대한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녹이고 있는데, 쇠붙이가 뛰어 올라와 나는 장차 반드시 명검 막야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위대한 대장장이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쇠붙이라고 생각할 것이네. 이제 한번 인간의 형체를 빌렸으면서도 사람일 뿐이야. 사람으로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저 변화의 만듦도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사물의 만듦이라고 번역한 조물(造物)’이나 변화의 만듦으로 번역한 조화(造化)’에서 인격신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장자에게 있어 조물이나 조화는 생성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조물이나 조화대신 음양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래의 이야기에는 막야(鏌鋣)라는 명검이 등장합니다. 막야는 간장(干將)이라는 검과 함께 춘추시대를 상징하는 명검입니다. 간장과 막야라는 부부 대장장이, 즉 남편 간장이 만든 검이 간장이고, 아내 막야가 만든 검이 막야입니다. 간장이든 막야든 이것은 쇠붙이가 꿈꿀 수 있는 최상의 이상형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막야가 인간의 꿈, 즉 권력자, 부자, 미인 등을 상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래의 대서사시에서 대장장이 비유는 매력적입니다. 금붙이도 있음이고, 용광로에 있는 쇳물도 있음이고, 쟁기도 있음이고, 명검 막야도 있음입니다. 대장간에서는 이렇게 찬란한 생성의 드라마가 벌어집니다. 명검 막야는 소중한 것이니 쇠붙이들은 이에 집착할 겁니다. 쇳물에서 막야가 되면 기쁘고, 막야가 녹아 쇳물이 되면 슬플 겁니다. 그러나 생성은 이런 기쁨과 슬픔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쇳물은 막 야의 부재로 오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쇳물은 막야만큼 긍정해야 할 생성의 결과물이니, 있음으로 긍정해야만 합니다. 대장장이 비유는 죽음을 부재로 이해하며 절망하는 우리 인간의 편협 함을 바로 부수어버립니다. “이제 한번 인간의 형체를 빌렸으면서도 사람일 뿐이야, 사람으로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저 변화의 만듦도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건강함, 젊음, 미모 등에 매달려 변화와 생성을 부정하는 우리에게 이만한 죽비도 없을 겁니다. 마침내 자래의 대서사시가 정점에 이르면서 현해 이야기는 엄청난 감동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지금 한번 하늘과 땅을 거대한 용광로로 생각하고 변화의 만듦을 위대한 대장장이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거의 대붕 규모의 스케일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 이 세계는 있음으로 충만한 생성의 장입니다. 여기에 없음이나 부재는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쟁기가 녹아 쇳물이 되고, 쇳물이 명검이 되고, 명검이 녹아 쇳물이 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무엇이 만들어질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부재의 느낌이 없이 긍정해야 할 겁니다. 녹는 과정도 긍정하고, 형체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긍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래는 마지막으로 여섯 글자의 유언을 자려에게 남기고 숨을 거듭니다. “성연매(成然寐), 거연(蘧然覺).” “편하게 잠들고 새롭게 깨어날 뿐이네.” 이렇게 자려와 자래 두 사람, 아니 자사, 자여, 자려 그리고 자래 네 사람은 영원히 헤어질 수 없는 친구가 되는 시험을 무사히 통과합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28. 허영의 세계에서 기쁨의 공동체로 / 30. 망각의 건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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