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소리는 어디서 생긴 걸까
남곽자기는 먼저 사람의 피리 소리, 땅의 피리 소리 그리고 하늘의 피리 소리를 이야기하면서 제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너는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직 땅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 있다. 너는 땅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직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일단 스승은 제자가 최소한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합니다. 사람의 피리 소리, 그것은 관악기가 내는 소리를 말합니다. 원문에 등장하는 비죽(比竹)이 바로 사람의 피리죠. ‘비(比)’는 ‘옆으로 나란히 놓는다’는 뜻이고, ‘죽(竹)’은 ‘대나무’를 가리키니, 리코더가 아니라 팬플루트처럼 생긴 대나무 관악기가 바로 비죽입니다. 생황(笙簧)이 아마 대표적인 비죽일 겁니다. 사람은 비죽의 대나무 관에 바람을 불어넣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이미 장자는 자신을 비우거나 잃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암시합니다. 대나무 관이 막혀 있으면 입으로 아무리 바람을 불어넣어도 소리 자체가 나지 않을 테니까요. 오직 대나무 관이 비어 있어야 소리가 생길 수 있죠. 스승은 이 점을 제자의 마음에 더 강하게 새기기 위해 땅의 피리 소리를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원문을 보면 스승은 사람의 피리 소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대나무 관악기 소리는 이미 제자도 들어보았을 테니 너무 진부한 비유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들어보았을 수도, 아니면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땅의 피리 소리를 묘사하는 데 그리 공을 들이죠.
대나무 악기와 같은 사람의 피리, 즉 인뢰(人籟)와 달리 땅의 피리로서 지뢰(地籟)는 사람들이 내뱉는 바람이 아니라 세기나 강도가 다른 수많은 바람들, 자연적으로 부는 바람들에 의해 소리를 냅니다. 땅에는 깊이와 넓이 그리고 모양이 다른 수많은 구멍들이 있기 때문이죠. “큰 나무의 구멍들, 마치 코처럼, 입처럼, 귀처럼, 병처럼, 술잔처럼, 절구처럼, 깊은 웅덩이처럼, 좁은 웅덩이처럼 생긴 구멍들” 등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 땅 표면의 구멍들이 지뢰의 정체였던 겁니다. “물 흐르는 소리, 화살 나는 소리, 꾸짖는 소리,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탁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는 바로 바람이 이들 구멍과 만나 만들어진 소리였죠. 안성자유도 분명 이런 수많은 소리들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소리들을 구멍과 바람의 마주침으로 듣지는 못했죠. 익숙한 들음이 존재론적 들음으로 반전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아니, 산에서 들리는 자연스러운 소리도 이제 지뢰의 소리로 인식하는 순간 안성자유의 인식은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산에서 울려 퍼지는 땅의 소리들, 그 각각은 모두 하나하나의 경이로운 기적처럼, 특정 모양의 구멍이 특정 세기의 바람을 만나는 기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경이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나운 바람이 가라앉으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해진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구멍과 바람이라는 존재론적 구별이 없다면 이 묘사는 나올 수도 없으니까요. “너는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하거나 살랑살랑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라는 표현이 인상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구멍과 마주치지 않은 바람에 대한 사유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묘사입니다.
마주침의 존재론 혹은 마주침의 현상학은 그 자체로도 매우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장자 사유의 특이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바람 소리가 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바람 소리가 났다고 하면 그 소리에는 ‘어떤 구멍’과 ‘어떤 바람’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이 마주치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구멍의 모양새는 다양하고, 바람도 그 속도와 방향에 따라 복수적입니다. 구멍의 모양에 따라,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각자 고유한 바람 소리를 냅니다. 특정 바람 소리, 예를 들어 ‘우우’하는 소리나 ‘오오’하는 소리는 그 자체로 존재 근거는 없습니다. 특정 구멍과 특정 바람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소리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특정 바람의 소리는 어디서 생긴 걸까요? 바람이 내는 소리일까요, 아니면 구멍이 내는 소리일까요? 이 질문은 장자 사유의 핵심이자 화두입니다. 바람일까요, 구멍일까요? 어디서 소리가 나올까요? 답은 바람도 구멍도 아닙니다. 이 둘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죠. 구멍이 없으면 바람은 거의 비존재에 가깝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구멍이 없으니 소리를 낼 수 없으니까요. 구멍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구멍은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지요.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소리가 바람에서도 나온다고 해도 좋고, 구멍에서 나온다고 해도 좋죠. 바람과 구멍이 마주쳤다고 전제한다면 말입니다. 마주침의 존재론은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들의 탄생도 그리고 변화도 모두 어떤 마주침의 효과이기 때문이죠. 수증기와 추위, 그리고 씨핵이 될 만한 먼지가 마주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눈송이처럼 말입니다. 물론 반대로 마주침이 지속되지 않으면 그 여운만 남긴 채 모든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인용
9. 타자와 함께 춤을 / 11.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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