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길과 말, 그 가능성과 한계
길 이야기
말은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고, 말하는 자에게는 말이 있다. 그 말하려는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실제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있지 않은 것인가? 만일 이런 말이 새들의 지저귐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夫言非吹也, 言者有言. 其所言者特未定也. 果有言耶? 其未嘗有言耶? 其以爲異於鷇音, 亦有辯乎? 其無辯乎?
길은 무엇에 가려져 진짜와 가짜가 있게 되는가? 말[言]은 무엇에 가려져 옳고 그름이 있게 되는가? 길은 어디에 간들 있지 않겠는가? 말은 어디에 있든 허용되지 않겠는가? 길은 작은 이루어짐에서 가려지고, 말은 화려한 꽃에서 가려진다. (…)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허용된다고 해서 허용되는 것이고,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길은 걸어서 이루어지고, 사물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물에는 원래 그렇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고, 사물에는 원래 허용된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어떤 사물도 그렇지 않은 것은 없고, 어떤 사물도 허용되지 않은 것은 없다.
可乎可, 不可乎不可.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 不然於不然.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 「제물론」 6, 8
길들기와 길들이기
인간의 비밀 혹은 문명의 비밀은 ‘도메스티케이션(domestication)’, 즉 가축화라는 개념으로 폭로됩니다. 일차적으로 가축화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길들이고 착취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문제는 정착·농경생활에 집중하던 인간들을 피지배자로 길들이는 인간 가축화의 과정이 문명의 이름으로,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도메스티 케이션은 로마제국 시절 도무스(Domus)라는 말에서 유래한 겁니다. 인술라(Insula)가 하층 계급이 거주하던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거지였다면, 도무스는 귀족들이 거주하는 거대한 단독 주택이었습니다. 도메스티케이션에는 이미 이렇게 지배에의 의지 가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 도메스티케이션에는 무언가를 내 뜻에 따르도록 만든다는 ‘길들이기’라는 뉘앙스만 남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길들이기가 모든 생명체의 작용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품종 개량이나 훈육 등 인간의 선택적 폭력을 전제하는 ‘길들이기’의 이면에는 ‘길들기’라 표현할 수 있는 생명체들의 자발적 삶의 메커니즘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농경과 목축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정착생활은 생쥐나 까마귀 혹은 벌레나 박테리아 등 다른 동물들도 끌어들입니다. 인간들의 정착지에서 먹을 것을 더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뒤에 숨어 살며 다른 상위 포식자의 공격을 피하기 쉬우니까요. 이렇게 쥐나 까마귀 혹은 벌레나 박테리아 등은 인간의 정착생활에 ‘길들게’ 됩니다. 인간이 길들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동생활에 스스로 길든 것들입니다. 당연히 스스로 인간에 길든 이들 동물이나 곤충 혹은 세균 등은 강제로 인간에게 포획되어 길들여진 양이나 소 혹은 말과는 다릅니다. 자발적 길들기와 타율적 길들기, 혹은 길들기와 길들이기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폭력이나 착취의 여부가 관건일 겁니다. 여기서 가축화된 동물과 복종하는 인간이 가진 서러움이 분명해집니다. 폭력과 착취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혹은 벗어나려는 생각을 품는다면, 결코 감당하지 않을 타율적 길들기에 자기 삶의 소중한 에너지를 투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도메스티케이션! ‘길들이기’라고 번역되는 이 타동사적 개념의 이면에는 ‘길들기’라고 이해될 수 있는 자동사적 개념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길들기가 가능하기에 길들이기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동물과 식물 혹은 인간에게 길들기의 역량이 없었다면, 길들이기라는 폭력과 훈육도 불가능합니다. 범람한 하천이 농지를 비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물을 대는 관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쥐와 돼지가 구별되시나요. 집쥐가 스스로 인간에 길든 동물이라면, 돼지는 인간이 길들인 동물입니다. 그렇지만 집쥐도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길들기가 가진 본성 때문입니다. 길 들기든 길들이기든 길들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금석은, 길든 주체가 길든 대상이 없다면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품종이 완전히 개량된 애완견이나 돼지는 인간 없이는 살기가 힘듭니다. 다행히도 간혹 버려진 개들이 들개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들은 폐허가 된 인간 주거지나 도시 외곽에 새롭게 길드는 데 성공한 셈이죠. 하지만 아마도 버려진 개 상당수는 새롭게 길들지 못하고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갔을 겁니다. 길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탓입니다. 완전히 길들거나 완전히 길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언제고 길든 대상으로부터 떠나도 살 수 있는 길들기의 자유, 혹은 자유로운 길들기의 역량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잠시 임시로 길들고 있다는 걸 한시라도 잊지 않는 것, 생명체가 건강하다는 징표로 이만한 것도 없을 겁니다. 사실 집쥐가 인간에 완전히 길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합니다. 외형이든 성격이든 집쥐와 들쥐 사이의 거리는 분명 멧돼지와 돼지 사이의 거리보다 더 가까우니까요.
예로부터 우리는 ‘길이 들다’ 혹은 사투리로 ‘질이 들다’라는 말을 일상어로 사용해왔습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죠. “신발이 길이 들지 않았어“ “야구글러브에 길을 들여야 해” “얼마 전 새로 구매한 차에 길을 들이고 있어” 등등. 그만큼 우리는 길들기나 길들이기 메커니즘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중시해 온 겁니다. ‘길을 들이다’와 ‘길이 들다’라는 표현은 각각 길들이 기와 길들기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들다’의 사역형 ‘들이다’는 ‘밖에서 안이나 속으로 향해 가게 하거나 오게 하다’라는 뜻, 즉 한마디로 ‘무언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길을 들인다’나 ‘길이 들다’라는 표현에 등장하는 ‘길’이라는 은유를 생각해볼 차례입니다. 길이 없는 숲속이나 초원을 걸었던 사람은 다 알 겁니다. 길이 없다면 정말 걷기도 힘들 뿐만 아 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시간도 엄청 많이 소요됩니다. 심지어 길 없는 곳을 헤매다 도착지의 방향마저 잊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면 숲속이나 초원에 길이 만들어지면 헤매지 않고 신속하게, 그리고 크게 힘들이지 않고 목적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산에 등산로가 없다면 정상에 오르는 시간이 두세 배는 더 걸릴 것이고 그만큼 더 많은 힘이 소모되는 법입니다. 정상에 이르는 길을 만드는 것처럼 신발에 이르는 길, 야구 글러브에 이르는 길, 혹은 새 차에 이르는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발을 편하게 신을 수 있고, 야구 글러브를 편하게 낄 수 있고, 자동차를 편하게 몰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신발에, 야구 글러브에, 그리고 새 차에 ‘길을 들이는 겁니다. ‘길’이라는 은유 혹은 ‘길’이라는 이미지로 사유를 전개한 최초의 철학자가 바로 장자입니다.
집쥐의 길, 돼지의 길
장자의 길은 길들이기의 길이 아니라 길들기의 길입니다. 돼지나 소의 길이 아니라 생쥐의 길을 긍정하는 철학자가 장자입니다. 여우 등 상위 포식자를 피하고 야생보다 먹을거리가 많기에 쥐는 인간 주거지에 길들지만, 동시에 인간의 눈을 피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쥐는 길들일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창고의 곡식을 훔쳐 먹거나 옷이나 가구를 망가뜨리는 해로운 존재니까요. 인간에게 들키지 않고 인간에게 길들면서 집쥐의 길, 즉 도(道)가 탄생합니다. 집쥐는 쥐가 인간 주거지에 잘 길들 때 탄생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집쥐는 자신이 쥐라는 걸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집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길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감시가 심해지거나 혹은 집 도처에 쥐약이나 쥐덫 등 위험 요소들이 많아지면 쥐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길들어야 합니다. 그 다른 곳은 또 다른 집일 수도 있고 야생일 수도 있습니다. 집쥐는 짐짓 진리인 듯 외칠지도 모릅니다. “나는 인간 주거지에서 사는 존재야!” 혹은 들쥐도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쥐는 초원에서 살아야 해!” 어느 경우든 쥐는 길들기라는 자기 역량을 망각한 겁니다. 자신이 길든 곳에서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길들여진 셈이니까요. 다행히도 집쥐든 들쥐든 쥐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쥐는 초원을 배회하는 유목민처럼 자신이 길든 곳을 떠나 다른 곳에 새롭게 길들기를 시도할 테니 말입니다. 견마지로(犬馬之勞)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나 말처럼 주인을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신하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자는 씩 웃으며 자신의 슬로건을 읊조립니다. 주인에게 버려졌다고 식음을 전폐하는 개나 말이 되지 말고, 차라리 인간 거주지에 길들기도 하지만 언제든 그곳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쥐가 되자!
쥐의 길들기 역량에 대한 찬가라고 이해하면, 「제물론」 편의 길 이야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인간 거주지에 길드는 데 성공할 때, 쥐의 길이 인간 거주지에 만들어진 겁니다. “길은 걸어서 이루어진다[道行之而成]”고 장자가 말한 사태죠. 이 경우라면 길은 쥐들이 걸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쥐가 인간 거주지뿐만 아니라 초원에도 혹은 습지에도 길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쥐는 길은 어디에 간들 있지 않겠는가?”라며 자신감을 피력할 수 있는 당당한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집쥐가 쥐의 길이 인간 거주지에 있다고, 혹은 들쥐가 쥐의 길은 초원에 있다고 단언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이 경우 집쥐는 들쥐의 길이 가짜로 보이고, 반대로 들쥐도 집쥐의 길이 가짜로 보일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길은 무엇에 가려져 진짜와 가짜가 있게 되는가?”라는 장자의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 거주지나 초원에 완전히 길들여져 인간 거주지나 초원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지 않았다면, 집쥐는 자신의 길이 진짜고 들쥐의 길이 가짜라고 혹은 들쥐가 자신의 길이 진짜고 집쥐의 길이 가짜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장자가 “길은 작은 이루어짐에서 가려진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집쥐의 길이나 들쥐의 길은 ‘작은 이루어짐’입니다. 쥐는 인간 거주지나 초원이 외에서도 길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길 이야기는 장자의 사유에 깔려 있는 길 이미지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말, 즉 인간의 언어에 관한 장자의 사유입니다. 사실 길 이야기의 진정한 테마는 길 자체라기보다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말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 장자가 길 이미지를 도입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장자가 어떤 식으로 말의 문제에 접근하는지 살펴보죠.
“말은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고, 말하는 자에게는 말이 있다. 그 말하려는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실제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있지 않은 것인가?” 문자가 아니라 음성이 장자의 출발점입니다. 실제로 말을 뜻하는 한자 ‘언(言)’은 갑골문자를 보면 관악기의 모양을 본뜬 것입니다. 낯선 말을 하는 외국인을 만났다고 가정해보세요. 분명 그는 말을 할 겁니다. ‘플럼(plum)’이라는 단어가 식별되지만, 우리는 그 음 성이 무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장자가 “그 말하려는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이런 문맥에서입니다. 지금 장자는 「일반 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에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가 피력한 통찰을 선취하고 있습니다. 소쉬르와 마찬가지로 장자는 기표와 기의를 나누고 있습니다. 플럼이라는 소리가 기표라면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기의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말하려는 것이 확정되지 않은” 말은 기의가 정해지지 않은 기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내 입장에서만 그렇습니다. 그 외국인에게 ‘플럼’이 라는 기표는 ‘자두’라는 기의를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요. ‘플럼’이라고 말할 때 외국인에게 말은 존재하지만, ‘플럼’이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나에게 말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내 입장에서 외국인의 말은 새들의 지저귐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외국인의 말이나 새들의 지저귐 모두 기의가 분명하지 않은 순수 기표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장자는 말한 겁니다. “만일 이런 말이 새들의 지저귐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물론 그 외국인은 자기 말은 새들의 지저귐과 다르다고 확신할 테지만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나는 언젠가 외국인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플럼’이라는 기표를 들으면 ‘자두’라는 기의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때가 올 테니까요. 사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모국어를 배웠습니다. 수많은 순수 기표들이 귓속에 웅웅거리던 어린 시절, 부지불식간에 어느 순간 그 기표들이 기의에 연결되는 기적이 발생했으니까요.
이르면 떨어지지 않는다
『장자』 「천하」편 17에는 언어에 대한 장자의 섬세한 성찰에 영향을 받은 어느 변자(辯者)의 테제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부지(指不至), 지부절(至不絶)”이라는 구절입니다. “가리킴은 이르지 않지만, 이르면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적 용어로 풀어보자면 “기표는 기의에 도달하지 않지만, 도달하면 기표는 기의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뜻이죠. 여기에도 길의 이미지가 깔려 있습니다. 기표가 기의로 가려고 하지만 도착하지 못한 상태가 ‘지부지’라면, 기표가 기의와 하나의 길로 연결된 것이 ‘지부절’입니다. 이르면 떨어지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기표가 기의에 딱 붙은 상태가 되면, 이제 ‘플럼’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아니라 ‘말’이 됩니다. ‘플럼’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우리는 ‘먹으면 신맛이 퍼져 침이 고이게 하는 과일’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늑대의 하울링도 기의와 연결만 된다면 언제든 ‘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리를 내는 한, 동물 공동체도 그렇지만 특히 인간 공동체들에는 말이 있는 겁니다. 물론 그 공동체의 이방인에게 그 말들은 기의와 연결되지 않은 순수한 기표들이기에 잡음이나 소음으로 들릴 테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자신이 마주친 낯선 공동체에 길들 때, 그래서 낯선 공동체의 말에 익숙해질 때, 그는 장자의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말은 어디에 있든 허용되지 않겠는가?” 기표와 기의가 연결되기 전, 즉 사전적으로(ex ante factor)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표가 기의가 연결된 다음 사후적으로(ex post factor) 말이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자가 ‘허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가(可)’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어떤 소리가 “말하려는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아” 말이 아닌 것 같더라도, 그 소리가 기의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기표일 수 있는 가능성, 즉 언어일 가능성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길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의 탄생은 일종의 기적 혹은 비약이 필요합니다. ‘먹으면 신맛이 퍼져 침이 고이게 하는 과일’이 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걸 ‘플럼’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우리는 그 과일을 ‘자두’라고 부릅니다. 소쉬르의 통찰이 아니더라도 이것만으로 우리가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내적 필연성이 없다는 걸 알기에는 충분합니다. 장자의 말처럼 “사물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일 뿐이니까요. 문제는 기표와 기의가 떨어질 수 없이 연결되는 순간, 기표와 기의는 내적 필연성으로 연결된 것처럼 현상한다는 점입니다. 자두의 예를 생각해 보세요. 엄마가 ‘자두’라고 말해도 갓난아이에게 그 음성은 그냥 웅성거리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두’라는 말을 들으면 ‘먹으면 신맛이 퍼져 침이 고이게 하는 과일’을 떠올리는 때가 올 겁니다. 자두라고 불리는 과일을 먹은 경험이 충분히 쌓인 덕분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서로 연결된 최소 세 가지 계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기표로서의 자두(기표-자두), 기의로서의 자두(기의-자두), 그리고 외부 사물로서의 자두(사물-자두)가 바로 그것입니다. “말은 무엇에 가려져 옳고 그름이 있게 되는가?”라고 자문한 다음, 장자는 “말은 화려한 꽃에 가려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기표-자두를 들으면 기의 자두를 떠올리고 사물-자두를 찾아 두리번거릴 수도 있고, 불현듯 기의-자두가 떠오르면 기표-자두를 발언하고 사물-자두를 구매하려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사물-자두를 보면 군침과 함께 기의-자두가 떠 올라 기표-자두를 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가 ‘화려한 꽃’으로 비유한 사태입니다. ‘자두’라는 말만 들으면 입안에 군침이 돌고 자두라는 과일을 집어 들 생각을 하니, 정말 말은 기표, 기의 그리고 사물이라는 세 송이의 꽃을 피우는 뿌리입니다. 바로 여기서 옳고 그름, 즉 시비(是非)가 발생합니다. 기표, 기의, 그리고 사물이 제대로 연결되면, 우리의 생각이나 말은 옳은 겁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우리 생각이나 말은 그른 겁니다. 예를 들어 자두를 듣고 지도를 연상하거나 작두를 상대방에게 건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기표가 기의와 연결되는 ‘지부절’의 상태가 바로 옳고 그름을 가능하게 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사물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이라는 장자의 통찰, 혹은 기표는 기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지부지’의 상태를 망각하게 됩니다. 자두는 ‘플럼’ 이외에 다른 기표로 부를 수도 있고, 나아가 과일이 아니라 약재나 혹은 이별의 기의로 우리 머리에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길은 걸어서 이루어지듯“ “사물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작게 이루어진” 길 때문에 다른 길을 만들 수 있다는 역량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주어진 말이 꽃피운 기표-기의-사물의 내적 필연성에 매몰되어 다른 언어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사실과 새로운 기표를 발명할 역량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능가경(楞伽經)』 네 번째 권에는 “관지불견월(觀指不見月)”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느라 달을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언어에 빠져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비판하는 문맥에서 나옵니다. 아마 이 구절을 들었다면 장자는 피식 웃으며 말할 겁니다. “잘도 그러겠다. 이보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손가락으로 가리켜진 달은 함께 가는 거야. 손가락을 잊고 달을 봐도 달에는 이미 손가락이 있고, 달을 잊고 손가락을 봐도 이미 손가락에 달이 있는 거야. 차라리 별이나 반딧불을 가리켜. 달빛에 어여쁜 구름이나 꽃을 가리키든가 아니면 들어가 잠을 자든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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