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집단의 성격과 구성원
공자의 집단의 성격은 애초에는 무(武)와 무(巫)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무(武)와 무(巫)의 성격 속에서 새로운 문(文)의 요소를 창출했다. 이 새로운 문의 요소야말로 향후의 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사는 신분적으로, 계급적으로 고정된 위(位)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사문(斯文)의 획득자가 된 것이다. 공자가 새롭게 규정한 사문(斯文)을 공부(工夫)에 의하여 획득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士)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교단이야말로 중국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사의 전문적 집단이다. 그것은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과도 타협할 수 없는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사(士) |
무(巫) + 무(武) ⇒ 문(文) |
그리고 이러한 공자의 사의 집단이야말로 구체적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효시(嚆矢)를 이루는 것이다. 이후의 모든 ‘가(家)’들이 사실 공자의 교단을 모방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병집단인 ‘묵가(墨家)’였다. 묵자(墨子, 뭐쯔, Mo Zi) 또한 송인(宋人)이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리고 묵가집단이야말로 제민지배체제(齊民支配體制)【제민이란 원칙상 신분의 귀천, 경제적 빈부의 차이가 없는 국가의 공민으로서 지배체제의 통제를 무차별하게 받는 존재】를 위한 변법(變法)의 배후주체세력이었다는【구체적 사례로서 ‘진묵(秦墨)’을 논증】 이성규(李成珪)의 논의는 설득력 있는 것이다【『中國古代帝國成立史硏究』, 一潮閣, 1997 중에서 第3篇 ‘齊民支配體制形成의 擔當集團’을 보라】.
법가사상가들은 사실 어느 기존 집단으로부터 이탈된 이단적인 개인의 성격을 띠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학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민적(齊民的) 보편주의(universalism)의 사상적 기저는 실제로 묵가(墨家)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공자집단에게 내재하는 보편주의를 극단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집단 속에 이미 영토국가적 제국(帝國) 출현의 맹아적 요소가 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의 사의 집단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에 의하여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여기에 해답을 주는 한마디가 나는 ‘도(盜)’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무리는 ‘도’였다. 이러한 나의 갑작스러운 결론에 독자들은 의아심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말이 아닌 장자(莊子, 주앙쯔, Zhuang-Zi)의 말이다. 장자는 공자집단을 ‘도적의 무리’로 규정하는데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고전의 언어는 우리의 현재언어의 맥락 속에서 왜곡해서는 아니 된다. 『논어』 「자로」에서 말하는 ‘광(狂)’의 의미를 오늘날의 ‘정신병자’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논구할 때 광기를 각시대적 맥락의 특수성에 따라 고찰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도(盜)’의 의미의 본질에 관하여 역시 이성규의 논의가 매우 시사적이다【『中國古代帝國成立史硏究』, 제1편 제1장 제3절, “春秋時代의 ‘盜’와 新聚落”】.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는 성읍국가의 기반이 흔들려가는 시대에 국과 국 사이에, 즉 ‘봉강(封疆)’의 사이에 어느 국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공백지대에서 새로운 취락을 형성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규정되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기존의 읍의 지배체제의 가혹한 수탈로부터 이탈된 사람들이며, 따라서 ‘도적질’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확고한 존재이유를 갖는 집단이었다. 성읍국가의 붕괴과정에서 이러한 군도(群盜)의 출현은 적지 않은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도는 ‘균분(均分)’을 지향하며, 본질적으로 유객(遊客)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기존의 어떤 체제적 가치와도 타협하지 않는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들일 수 있다. 제자백가의 모태가 바로 이 도에 있었다고 해도 망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도(盜)니, 협(俠)이니, 유(儒)니 하는 말들이 공자시대에는 모두 상통하는 말들이었다. 『논어』에 계강자(季康子, 지캉쯔, Ji-kang-zi)가 ‘도’를 걱정하여 공자에게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안연顔淵」 18), 이를 둘러싼 문답의 배경에는 공자 자신이 도로서 규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체험과 동정이 서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는 곡부시내에 영수학원이나 무술도장을 차렸던 사람이 아니다. 공자라는 천민무당의 아들 밑에 와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사(士)로의 출세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개비에서 비개비로의 전환의 길은 참으로 요원한 것이었다.
공자라는 성인 밑에 모여든 사람들은, 물론 곡부에 사는 안씨 자제들 같은 읍내(邑內)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뿌리없이 부랑하는 갈 곳 없는 유사(遊士)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가치관을 희구하는 성실한 도(盜)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그 구심점에 공자라는 거인(巨人)이 있었다. 짱구대가리에, 거구의 몸체, 뛰어난 음악의 장인, 고례(古禮)의 담지자(擔持者), 잡기에 능한 달인(達人), 엄청난 정열의 호학지사(好學之士), 사(射)ㆍ어(御)의 강력한 무장, 이러한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구현체로서의 구(丘)가 곡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은 유협(遊俠)들의 세계에 널리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자를 가장 유니크하고 위대하게 만든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첫째가 그가 섬세한 음악의 명인이라는 사실이고,
그 둘째가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문자의 세계에 달통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는 그를 찾아오는 도(盜)들에게 음악을 통해 새로운 감수성(aesthetic sensitivity)을, 문자를 통해 새로운 역사성(historical perspective)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공자교단의 형성에 결정적인 사회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바로 공자의 평생의 반려가 된 자로(子路, 쯔루, Zi Lu)라는 인물과의 만남이었다. 자로는 도였다. 문자 그대로의 도였다. 공자는 자로를 만나 더불어 공생애를 시작하였고, 자로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삶을 마감하였다. 공자는 자로의 시체가 토막이 나서 소금에 절여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공자는 친구를 대하는 예로써 가운데 뜨락[中庭]에 내려와서 어쩔 줄 모르며 서성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자는 소리쳤다. “우리집 안에 있는 짠지독(절임독)을 몽땅 엎어버려라[遂命覆醢]!” 그리고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공자는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종기해」).
泰山其頹乎 | 태산이 드디어 무너지도다! |
梁木其壞乎 | 대들보가 마침내 쓰러지도다! |
哲人其萎乎 | 아 ~ 철인이 소리없이 스러지누나! |
▲ 치임별귀(治任別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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