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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12. 군자는 한정된 쓰임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12. 군자는 한정된 쓰임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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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군자는 한정된 쓰임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2-1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2-12. 子曰: “君子不器.”

 

공자의 말씀으로서 전해 내려오는 이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은, 본 옛부터 유교전통의 핵심적 윤리로서 존중되어온 명언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 20세기 세계학술계의 쟁점(爭點)으로서 지극히 유명하게 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이 말을 그의 역저, 중국의 종교(The Religion of China)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 아필시킨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베버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순결한 초월주의의 인정이 오히려 현실을 제어하는 힘을 잉태시켰지만, 유교의 경우 초월주의의 거부가 합리주의 전통을 강화하는 듯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 제어의 능력을 상실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유교적 삶의 방식은 합리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합리성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예악(禮樂)과 같은 어떤 외면적 규정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것이다(That is to say, the Confucian way of life was rational but was determined, unlike Puritanism, from without rather than from within. RC, N.Y. : The Free Press, 1964, p.247).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교적 합리주의는 이 세계에로의 합리적 적응을 의미하는 반면, 청교도 합리주의는 이 세계의 합리적 제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Confuci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adjustment to the world; Purit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mastery of the world.

 

 

청교도의 경우, 초월적인 신에게로의 철저한 복속이 비록 내가 이 세계 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to live ‘in’ the world and yet not be ‘of’ it,) 어떤 극복의 동기를 부여했으며 그것은 무서운 금욕주의를 잉태시켰다. 그리고 금욕주의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하는 경제적 합리주의(economic rationalism)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개념은 독일어로 베루프(Beruf)’라고 표현되는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다. 베루프라는 독일어를 영어로 바꾸면 보케이션(vocation)’이 되는데, 보케이션은 신의 소명(召命) 즉 신의 부르심이라는 말과 동시에 직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이 베루프-보케이션이라는 단어의 배면에는 그 단어의 의미를 탄생시킨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적 의식 구조가 서려있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기의 현세적 삶의 직업(장인의 직종)을 곧 초월적 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으며, 그 자체를 성스럽게 생각했으며, 그 직업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초월적 신의 소명을 현세적으로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의식이 그 직업의 소명에서 생기는 결과를 현 세적으로 향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결과를 신의 영광을 위하여 저축해나갔던 것이다.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

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 (RC, p.247).

 

 

그러나 유교적 군자상에는 이러한 내면적 초극의 충동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처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 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

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유교에는 초월성의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사후의 미래적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현세적 달성만을 추구하며, 현세적 향유만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심미적 인생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 심미적(aesthetic)’이란 말은 닳아빠진 미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다. 자기 내면의 초극의 독백이 없기 때문에 외면적 겉치레만 추구하게 되고, 사회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체면만을 중시하게 된다. ‘예의, ‘, ‘의례니 하는 모든 것이 이 체면과 관련되는 것이다. 여기 베버가 쓴 ‘face’라는 말은, 중국말로 미엔쯔, 面子, mian-zi’라는 말인데, 그것은 우리말로 체면에 정확히 해당되는 말이다. 한마디로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가 소명의 문화라면 동아시아 유교의 문화는 곧 체면의 문화라는 것이다.

 

서양(the West) 소명의 문화(the Culture of Vocation)
동양(the East) 체면의 문화(the Culture of Face)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로마서12:6~8). 여기에는 인간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설명되어 있다. 이 말은 이에 앞서 우리 몸과 지체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소명을 부연한 것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 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12:4~5).

For as in one body we have many members, and all the members do not have the same function, so we, though many, are one body in Christ, and individually members one of another.

 

 

나의 몸은 하나이지만, 이 하나된 몸은 많은 부분(지체)이 합하여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부분(지체)들은 제각기 다른 고유한 기능(function)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몸은 기능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 몸의 지체가 각기 다른 기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조화된 하나의 몸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된 나의 몸에 비유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개별적 삶을 그 몸의 각기 다른 개별적 지체의 기능에 비유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각기 다른 기능’, 직분’,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다른 직분 때문에 오히려 그리 스도라는 하나의 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사도 바울의 이러한 언명은 바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지체일 뿐이며,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불기(不器)가 아니라, 하나의 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 타이피스트(typist)는 타이프치는 일로, 대장장이는 대장장이 일로, 똥푸는 자는 똥푸는 일로, 제각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니라 군자유기(君子唯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말한다.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bureaucracy, 관료주의)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that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is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i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 (RC, p.246).

 

 

자아! 이 정도 되었으면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비판적 독설을 독자들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우리는 베버의 유교비판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구한말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썩어문드러졌던 우리사회의 온갖 병폐를 생각할 때, 그리고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에 진정한 프로페셔날리즘(professionalism)의 전통이 결여되어 있다는 현실을 생각할 때, 베버의 비판은 통렬하게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먼 나라 이방인이 동양사회를 직접 체험하지도 아니 한 자로서, 동양사회가 지니고 있는 허약한 급소들을 그렇게 전문적으로 정확히 찌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도 먼저 우리의 학문적 자세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가 캐피탈리즘(capitalism)의 발생원의 정신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 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ㆍ사회ㆍ경제사적 우발적 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不發生)의 원인을 유교에 다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캐피탈리즘 그 자체가 유교의 역사에서 발 생되어야만 할 어떤 지고의 가치나 목표나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상이든지 동일한 생각의 구조를 유지하더라도,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것은 건 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며 불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유교의 불건강한 시절의 측면만을 들어 유교의 원죄를 다 캐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교의 부패는 현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패는 더 더욱 인간세에 끔찍한 것일 수도 있다.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 유교에도 신독(愼獨)과 같은 내면성의 중시라든가, 앞서 안회의 삶이 보여준 바 건강한 절제와 인내의 무위론적 금욕주의의 풍요로운 전통이 있다. 단지 그것이 칼비니즘(Calvinism)이 전제하는 바 예정설적인 신과 인간의 텐션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신적 의지와 대결하는 금욕이 나 그 금욕에 깔린 심리적 불안감(psychological insecurity)이 없을 뿐이다. 본래 부정적인 신화적 가치가 긍정적 결과를 낳았다 해서, 본래 그 부정적 요소가 없는 문화적 가치들을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언명의 맥락이 과연 베버의 말대로,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를 의미한 것일까? ‘()’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라는 뜻이다. 황간(皇侃)의 소():

 

 

이 장은 군자 된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의 업을 지키는데 매달리지 말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 그릇이란 인간에게 한 쓰임을 제공하는 물건이다. 예를 들자면 배는 바다 위에서는 두둥실 떠갈 수 있지만 산을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레는 육지를 다닐 수는 있어도 바다를 건널 수는 없는 것이다. 군자는 당연히 그 재능과 업적이 두루 넓게 통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릇이 한 기능을 지키는 것과 같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此章明君子之人, 不係守一業也. 器者, 給用之物也. 猶如舟可汎於海, 不可登山; 車可陸行, 不可濟海. 君子當才業周普, 不得如器之守一也.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는 이러한 류의 논의에 대하여 재미있는 제도사적 반론을 제기한다.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언명은 반드시 소인기(小人器), 군자불기(君子不器)식의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주(古注)에서 포씨(苞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릇이라는 것은 하나의 쓰임에 국한되는 것이다. 군자에 이르게 되면 베 풀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

器者, 各周其用. 至於君子, 無所不施也.

 

 

주자가 그릇이란 각기 쓰임이 있는 것이요, 서로 통할 수 없는 것이다. 덕을 이루는 선비는 그 몸이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기능이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다. 특별히 한 재능, 한 기예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기자(器者), 각적기용(各適其用), 이불능상통(而不能相通). 성덕지사(成德之士), 체무불구(體無不具). 고용무부주(故用無不周), 비특위일재일예이이(非特爲一才一藝而已)].’라고 한 것도 결국 고주를 따른 것인데 이러한 주석은 근원적 제도사적 맥락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라이(荻生徂徠)예기』 「학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재미있는 구절을 인용한다.

 

 

북 그 자체는 궁ㆍ상ㆍ각ㆍ치ㆍ우 다섯 가지 소리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 가지 소리는 북이 없이는 조화로운 소리를 낼 길이 없다. 물 그 자체는 청ㆍ적ㆍ황ㆍ백ㆍ흑의 다섯 가지 색깔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 가지 색깔은 물이 없이는 그 찬란한 색깔을 드러낼 길이 없다.

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

 

 

소라이는 왜 이 학기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소라이의 주석이 간결하여 그 뜻을 명확하게 찝어내기가 힘들지만, 소라이가 노리고 있는 것은 군자는 이 학기의 문장에서 북[]이나 물[]에 해당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의 뜻이 고주가 말하는 바, ‘무소불시(無所不施)’ 즉 그 능력이 두루 통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군자는 근원적으로 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즉 군자는 본질적으로 기()로서 규정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는 기()의 부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불기(君 子不器)는 기()의 부정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기()에 의하여 한정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어떤 본질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기()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가 이로 인하여 드러나게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즉 불기(不器)는 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를 포괄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자리란 무엇일까? 소라이는 군자(君子)는 단순히 도덕적인 인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 장()이 되는 리더를 말하며, 그는 기()가 아닌 기()를 부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는 백관(百官)을 말하는 것이요, 군자(君子)란 군()이나 경()을 말하는 것이다[器者, 百官也; 君子者, 君與卿也].

 

예를 들면 양의(良醫)는 여러 한약재료들을 조합[用藥]하여 처방을 내리고 환자의 병을 치료한다. 이때 양의(良醫)는 군자(君子), ()은 기(). 즉 의사가 곧바로 초본약재(草本藥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사는 초본약재들을 부리는 자요, 그것을 배합하여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어찌 의사가 곧 약재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것이다. 소라이는 앞서 인용한 예기』 「학기에 연이어 같은 맥락에서 나오고 있는 유명한 말을 다시 인용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말한다: “위대한 덕성은 하나의 관직에 구애됨이 없고, 위대한 도는 하나의 그릇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신의는 하나의 약속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시간은 하나의 절기에 구애됨이 없다.” 이 네 가지를 살필 줄 아는 자래야 참으로 학문의 근본에 뜻을 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君子曰: “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察此四者, 可以有志於本矣.

 

 

이 말은 또 무엇인가? 대덕(大德)은 불관(不官)하며, 대도(大道)는 불기(不器)하며, 대신(大信)은 불약(不約)하며, 대시(大時)는 부제(不齊)하다는 것은 곧 군자(君子)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기()의 말엽의 세계가 아니요 대도(大道)의 근 원의 세계임을 말한 것이다.

 

 

하ㆍ은ㆍ주 삼대의 왕들은 물에 제사지낼 적에 모두 반드시 작은 하천에서 먼저 지내고 큰 바다에서는 나중에 지냈다. 하천이 근원이요, 바다는 말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근본을 힘쓴다 하는 것이다.

三王之祭川也, 皆先河而後海; 或源也, 或委也. 此之謂務本.

 

 

군자가 힘써야 할 것은 근본이지 말류가 아니다. 하천이 오히려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의 세계요, 바다가 오히려 백관(百官)의 기()의 세계인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소라이(荻生徂徠)의 비판적 성찰에 의하여 구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라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대저 배움이란 기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大氐學以成器.

 

 

인간의 모든 배움은 기()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君子)의 배움은 성기(成器)를 통하여 불기(不器)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를 통하여 기()를 초극(超克)하는 것이요, 성기(成器)의 행위를 통하여 기()를 부리는 대도(大道)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다.

 

굳이 막스 베버의 논쟁이나 소라이의 비판적 지적의 맥락을 떠나 이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소박한 맥락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분명 스페시알리스트(specialist, 전문가)의 기능이 존중되어야 하는 문명의 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스페시알리스트의 위치가 존중되면 존중될수록 진정한 제너랄리스트(generalist)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불기(不器)의 세계가 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물론 기()의 세계 또한 불기(不器)의 세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이나 전체적 조망이 없이 어떻게 스페시알리스트들의 기능만으로 인간세가 조작되어나가기를 기대하는가?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당연히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기(不器)의 보편주의가 전제되지 않는 기()의 기능은 편견과 독선과 혼선을 낳을 뿐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하는 것이다.

 

 

()’라는 것은 각기 그 고유한 쓰임에만 적합하여 서로 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덕을 이룬 선비[]는 그 몸에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쓰임이 두루 하지 아니 함이 없으니, 특별하게 한 재주, 한 기예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器者, 各適其用而不能相通. 成德之士, 體無不具, 故用無不周, 非特爲一才一藝而已.

 

 

이 장에 관한 한 주희의 해석보다는 소라이(荻生徂徠)의 해석이 훨씬 더 섬세하고 포괄적이고 고전학의 정도를 표방하고 있다. 에도 유학의 수준을 우리가 얕잡아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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