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온고지신(溫故知新)
2-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옛 것을 온양하여 새 것을 만들어 낼 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 2-11.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
‘온(溫)’은 고주와 소(疏)에 의거하여 ‘심역(尋繹)’과 ‘심난(燖煖)’의 두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첫번째 해석은 ‘옛 것을 캐어들어간다’는 의미고, 두 번째 해석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옛 것을 다시 뎁힌다’는 뜻이다. 두 개의 해석이 모두, 옛 것을 잊지 않고 다시 복습함으로써 그 옛 것에서 항상 새로운 것을 얻는다는 함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주자(朱子)는 ‘고(故)라는 것은 예전에 들은 것이요, 신(新)이란 지금에 새로 터득하는 것이다[故者, 舊所聞; 新者, 今所得].’라고 하였다.
다산(茶山)은 ‘심온(燖溫, 식은 것을 다시 뎁힌다)’의 의미를 취하여, 끝 구절의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를 매우 독특하게 해석하였다. 이 종구를 의미론적으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 대한 자연적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속절이 아닌 주절로 보는 것이다. 다산은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를 ‘스승이 될 수 있다’로 보지 않고, ‘선생이란 직책은 반드시 한번 해볼만하다[可以爲師, 謂師之爲職, 頗可爲也].’는 식으로 푼 것이다. 선생이란 왜 해볼 만한 것이냐? 선생을 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내 머릿속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과거를 따뜻하게 되살려낼 수가 있고, 그럼으로써 항상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생이란 직책은 나를 계발시키는데 매우 유익한 것이니, 반드시 해볼 만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산의 해석은 매우 재미있지만, 자기의 체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했을 뿐 근본적으로 이 언명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일상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너무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은【실제로 ‘온고이지신’은 한국어화되어있다】, 그 말이 사용되고 있는 맥락을 살펴보면, 대체로 신(新)보다는 고(故)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옛 것에 대한 존중,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통에 대한 깊은 존숭을 말할 때 꼭 이 말이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歷史)를 온습(溫習)함으로써 역사로부터 현실에 대 한 새로운 지혜를 발견하라는 맥락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온고이지신’이라는 말은 대체적으로 유교의 복고주의에 대한 완곡한 정당화의 수단으로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공자라는 한 인간이 추구해온 삶과 비전을 배반하는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삶의 강조점은 항상 ‘옛’(고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움’(신新)에 있었던 것이다.
온(溫)이라는 글자는 삼수변이 없는 모습과 상통하는데, 그 글자를 잘 살펴보면 그릇이 위에 있고 그 밑에 화기가 올라오는 모습이다. 이것이 그릇에 있는 것을 끓이는 모습일 수도 있고, 또 술독과 같이 무엇을 온양(醞溫)시키는 모습일 수도 있다. 즉 발효를 의미한다. 우리 된장국이나 고추장국의 특징은, 모든 재료가 한군데 들어가 끓여짐으로써 어떤 새로운 성질이나 맛이 발현된다는데 있다. 발효라는 것도 옛 것으로부터 다른 성질이 발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 있어서 온고(溫故)의 목적은 지신(知新)에 있을 뿐이다. 신(新)을 위하여 고(故)는 온(溫)되었을 뿐이다. 고(故)는 고(故)일 뿐이 다. 고(故)가 고(故)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신(新)으로 참여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신(新)을 떠난 고(故)는 존재하지 않는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옛것에 대한 존숭의 맥락이 아니라 새 것의 창조라는 맥락으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조가 온고(溫故)라는 전통성(traditionality)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신(知新)이라는 창조성(creativity)에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창조를 위하여만 온고(溫故)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미래의 창조가 없는 과거는 과거의 자격이 없다. 미래의 창조라는 지신(知新)의 의미맥락은 다음 장의 불기(不器)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고(故, 古)와 신(新)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 인간세의 창조라는 것 자체가 아무리 새로운 창조라 할지라도 결국 고(故)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고(故)에 대한 존숭의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르네쌍스의 찬란한 문물도 결국 그레코로만의 고(故)의 부흥이다. 과학사의 눈부신 진보도 고(故)의 축적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신(新)이란 고(故)의 집적에서 발생하는 도약 즉 점프(jump)일 뿐이다. 신(新)은 고(故)의 어울림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대비다. 어울림의 요소 간의 새로운 조합, 새로운 연접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충(王充)은 『논형(論衡)』 「사단(謝短)」 3에서 이 구절을 부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저 옛을 알고 지금을 모르는 것, 이것을 육침(陸沈)이라하고, 대저 지금을 알고 옛을 모르는 것, 이것을 맹고(盲瞽)라 한다[夫知古不知今, 謂之陸沈. 夫知今不知古, 謂之盲瞽].” 육침(陸沈)은 물에 빠져죽는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빠져 죽는 것이다. 맹고(盲瞽)란 대낮에도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온(溫)’이라는 것은 찾아 실마리를 캐어 들어가는 것(尋釋)이다. ‘고(故)’라고 하는 것은 예전에 들은 것이요, ‘신(新)’이라는 것은 지금에 새로 터득하는 것이다. 배움에 있어 예전에 들은 것은 능히 때때로 익히고, 그리하여 매번 새로 터득하는 것이 있으면 곧 배운 바가 나의 내면에 있게 되어 응용이 무궁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장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암기나 하고 묻기나 하는 학문이라면, 마음에 터득되는 바가 없어 그 지식도 한계가 뻔하다. 그러므로 『예기』 「학기」에 ‘기문지학(記問之學)’으로써는 타인의 스승이 될 수 없다고 꾸짖었으니, 바로 여기서 말하는 뜻과 호상 발명하는 것이다.
溫, 尋繹也. 故者, 舊所聞. 新者, 今所得. 言學能時習舊聞, 而每有新得, 則所學在我, 而其應不窮, 故可以爲人師. 若夫記問之學, 則無得於心, 而所知有限, 故『學記』譏其“不足以爲人師”, 正與此意互相發也.
내 인생에 큰 감명을 주는 고전의 하나로 『중용(中庸)』외에 「학기」가 있다.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학기」를 한번 읽어볼 만하다. 주희가 아예 학기」까지 한 편 더하여 오서집주(五書集註)를 만들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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