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재여가 모르는 것을 아는 듯 말하다
3-21. 애공(公)이 사(社)에 관하여 재아(宰我)에게 물었다. 재아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하후씨는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 사람들은 측백나무를 썼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썼습니다. 밤나무를 쓴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戰慄)케 하려 함이옵니다.” 3-21.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曰使民戰栗.” 공자께서 이를 들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내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은 간하지 않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탓하지 않겠다.” 子聞之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
애공(哀公)은 정공의 아들로서 공자 58세의 때에 어린 나이로 즉위한 노 나라의 군주라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2-19). 그런데 이 장에는 여태까지 우리의 논의에 선보이지 않았던 매우 중요한 한 인물이 새로 등장하고 있다. 그 가 곧 재아(我)다. 재아에 관해서는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 1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재여는 자(字)를 자아(子我)라고 한다. 노나라 사람이다. 말재주로 이름을 날렸다.
宰予, 字子我, 魯人. 有口才著名.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10도 『논어』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첨가했을 뿐, 재아의 삶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주는 바가 별로 없다. 다음과 같은 몇 마디로 그 서두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재여는 자(字)를 자아(子我)라 한다. 구변이 날카로웠고 말을 조리있게 잘 하였다.
宰予, 字子我. 利口辯辭.
따라서 재아의 나이가 공자보다 몇 살 아래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흑설 에 의하면 29세 연하라고 한다. 「세가」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재아는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 귀로(歸魯) 전부터 이미 어떤 연유로 공자학파에 가담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말년의 어린 제자들보다는 한 급 중후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었으며, 공자말년 학단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문제아였다. 그가 자공(貢)과 함께 사과십철(四科十哲)의 일인(人)으로 거명되었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재아는 자공과 함께 언변의 천재로 꼽히는 인물이었다[言語, 宰我子貢. 「선진(先進)」 2]. 「공자세가」에 보면 초나라의 소왕(昭王)이 유랑하는 공자를 맞이하여, 장차 서사(書社)의 땅 700리로 공자를 봉하려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초나라의 재상 자서(子西)가 소왕을 위협하듯 반론을 펴면서 거론하는 공자의 네 제자 중에 자공, 안회, 자로에 이어 재여(宰予)가 들어가 있다. 공자가 근거할 땅을 얻고 이렇게 현명한 제자들이 그를 보좌한다면 초나라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 재여는 명재상 재목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재아는 말을 잘했을 뿐 아니라 머리가 몹시 좋고 영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태의 추이를 앞질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따라서 말이 빠르고 실천력이 부족했다. 영리한 만큼 그는 나태했다. 그 유명한 ‘재여주침(宰予晝寢)’의 고사(5-9)도 여러 가지 학설이 난무하지만 결국 그의 나태함이 준엄하게 지적되는 장면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재아에 대한 꾸지람은 도가 지나치다.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26에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아주 못생긴 제자에 대해 공자가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가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공자가 자신의 실수를 정직하게 뉘우치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용모로써 사람을 취하였다가 나는 자우(담대멸명)에게 실수를 범하였다[以貌取人, 失之子羽].”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가 부정적 판단에 이르게 된 인물로서 재여를 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말로서 사람을 취하였다가 재여에게서 실수를 보았다[吾以言取人, 失之宰予].” 그리고 또 말한다: “처음에 나는 남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으나, 이제 나는 남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다시 그의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재여 때문에 이런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5-9).
재여(宰予, 재아宰我, 자아子我)는 『논어』에서 중후한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자에게 심하게 꾸지람을 계속 듣는 캐릭터로 유명하다. 재여와 공자의 사이는, 가롯 유다와 예수의 관계로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메시아됨을 근원적으로 회의하였다. 그렇게 회의할 줄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여타 순박한 농부나 어부제자들보다는 영리한 판단력을 소유한 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영리함 때문에 가롯 유다는 결국 예수를 로마병정에게 팔아 넘기는 배반적 행위를 하기에 이르고 만다. 그러나 재여는 결코 공자를 배반한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재여의 사상적 입장은 공자와 분명히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삼년상을 둘러 싼 공자와 재여간의 유명한 논쟁(17-21)에 나타난 재여의 사상적 입장은 묵자(墨子)나 고자(告子)ㆍ순자(荀子)계열의 어떤 선구적 노선을 대변하는 것이다. 재여는 분명하게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고 상(喪)의 주체인 군자(君子)를 인민의 현실적 삶을 담당하고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 파악했다. 재여의 논거는 자연의 순행에 기초하고 있으며 다분히 사회과학적 발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3년이라는 세월은 비효율적이며 1년만 해도 소기의 목적적 가치는 다 충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자는 정치의 본질 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인간다움에 있다고 하는 인간학적 테제를 조금도 늦추지 않는다. 삼년상은 인간이 인간다웁게 되는 예악의 뿌리다【이에 관해서는 참고할 만한 논문이 하나 있다. 배병삼, ‘공자 대 재아: 인간의 길과 통치자의 길’, 『한국정치학회보』, 33집 2호, 1999 여름, 49~67쪽】.
재여는 나중에 제국(齊國)에 벼슬하여 임치(臨淄)의 대부(大夫)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는 당시의 군주, 간공(簡公)을 섬겼다. 그러나 제나라에는 국군의 지위를 넘나보는 기세등등한 가신, 전상(田常)이 있었다. 전상은 결국 주군(主君)인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만다. 그런데 이 간공시해사건의 배후에는 재여가 있었다. 「열전」 11은 ‘여전상작란(與田常作亂)’이라고만 기술하고 있는데, 이 「열전」의 문맥에 의하면 재아가 전상의 반란에 가담하여 전상과 함께 간공을 시해하였고, 이로써 멸족의 화를 당하였고, 이를 공자가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다[孔子恥之]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토리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타설에 의하면 제나라에 벼슬한 재여는 전상과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양자는 정적관계였다는 것이다. 이때 간공은 재아와 결탁하여 전횡하는 전상을 추방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재아는 전상에 의해 살해되었고, 연이어 간공도 전상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후자의 설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또 「열전」의 색은(索隱)에 의하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재아(宰我)가 전상(田常)과 함께 난을 일으킨 기록이 전무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전상(田常)과 함께 간공에게 총애를 다투는 자로 감지(闞止)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전상의 난 때에 피살되었는데, 이 사람의 자(字)가 하필 자아(子我)였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재여로 착각하여 「열전」에 잘못 기록된 것일 수 있다고 색은(索隱)은 고증한다. 하여튼 재아에 관한 기록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논어』에 재아에 관한 기록이 모두 부정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논어』가 기술되기 시작한 전국시대에는, 노나라는 약소국이었고 제나라는 강대국이었을 뿐 아니라 전씨(田氏)가 전권을 계속 장악했기 때문에 재여를 악 한 자로서 기술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상황이 있었다고 20세기 사학자 전목(錢穆)은 이들 텍스트를 비평한다. 그렇게 본다면 공자(孔子)의 재여에 대한 증오의 발언 자체가 후대의 상황에 의하여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피부적으로 싫어하는 공자는 말 빠르고 약삭빠르며 실천력이 부족한 재여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의 재여에 대한 비판의 논술은 좀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역시 『논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일 수밖에 없으며, 악역이 한 명쯤은 필요했을 것이다.
‘사(社)’라는 것은 큰 나무를 신체(神體)로 삼는 토지의 신이며, 이 신을 모신 영역이 바로 ‘사직단(社稷壇)’과도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사직단’은 나무를 모시고 있지 않지만 고대의 ‘사(社)’는 오늘날 우리나라 동네어귀에 자리잡은 느티나무 신목(神木)이 있는 서낭당과도 같은 그런 영역이었을 것이다. 나무는 지기(地氣)의 솟음이며 그 주변은 땅의 신령스러움으로 성화되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 담을 둘러 사(社)를 만들었다.
혹자는 여기서 말하는 ‘사(社)’는 토신(土神)을 제사지내는 사당의 나무 위패를 말한 것이지 거대한 나무 그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楊伯峻] 나는 이러한 목제 위패설을 취하지 않는다.
재아는 이러한 어린 군주 애공의 질문에 대해 아무 생각없이 삭삭 답변을 해버린다: “‘사(社)’의 신체가 되는 나무는 왕조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하왕조는 소나무[송松]를, 은왕조는 측백나무[백栢]를 신목으로 삼았는데, 현재의 주왕 조는 밤나무[율栗]를 신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나무를 신목으로 삼는 이유는 바로 인민을 전율케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 독자들에게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밤나무’와 ‘전율’의 내적 연관성에 관한 의문일 것이다. 사실 이 양자간의 관계는 어떤 이념적인 관계라 기보다는, 단순히 고대중국어의 발음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중첩, 그러니까 오늘날 영문학에서 말하는 펀(pun)과 같은 쌍관(雙關語)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쌍관어의 배면에, 어떤 이념적 배경이나 역사적 사실이 애공과 재여와 공자 사이에 얽혀있었는지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지 추론적인 제설이 분분할 뿐이다.
『의례(儀禮)』의 사혼례(士昏禮) 예식을 보면 그것은 납채(納采)ㆍ문명(問名)ㆍ납길(納吉)ㆍ납징(納徵)ㆍ청기(請期)ㆍ친영(親迎)의 육례(六禮)로 구성되어 있다. 송대(宋代)의 주자(朱子)는 이러한 육례(六禮)의 절차가 복잡하다 하여 의혼(議昏)ㆍ납채(納采)ㆍ납폐(納幣)ㆍ친영(親迎)의 사례(四禮)만을 남겼다. 우리 나라 조선조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영향을 받아 사례(四禮)의 절차를 지켰다. 지금 우리가 ‘함지고 간다’는 것은 친(親迎) 전의 모든 절차를 뭉뚱그려 짬뽕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소위 ‘결혼식’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육례 중에서 ‘친영(親迎)’의 절차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례가 되었든, 『가례』가 되었든, 소위 중국의 고례(古禮)와 우리나라에서 통속적으로 행하여진 혼례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친영(親迎)과 부지성례(婦至成禮, 첫날밤 불 끄고 자는 것)의 예식을 모두 신부집에서 했다. 그러나 중국의 고례(古禮)는 철저히 남가중심(男家中心)으로 되어있다. 친영(親迎)은 문자 그대로 황혼의 시기에 신랑이 신부집에 찾아가서 간단한 상견의 예식을 올리기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곧바로 신부를 데리고 와서, 결혼식에 해당되는 합주 잔을 마시는 의식을 신랑집에서 거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발(結髮)의 첫날밤을 신랑집에서 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친영례의 모든 후속례가 신랑집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신랑집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새벽에 날이 밝으면 성복(盛服)을 하고, 정식으로 시부모를 처음 뵙는 부현구고(婦見舅姑)의 예가 행하여진다. 시부모는 당상에 앉는데 동쪽(시부)과 서쪽(시모)에서 마주하고, 각자의 앞에 탁자를 놓는다. 며느리는 당하에서 나아가 동쪽 계단 아래에 서서 북향하여 시아버지에게 절하고 올라가서 탁자 위에 폐백을 드린다. 시아버지가 폐백을 어루만지면 시자가 가지고 들어간다. 며느리는 내려가서 또 절한다. 며느리는 다시 서쪽 계단 아래로 나아가 북향하여 시어머니에게 절하고 올라가서 폐백을 드린다. 시어머니는 폐백을 들어서 시자에게 준다. 며느리는 내려와서 또 절을 한다. 현구고례(見舅姑禮)는 이것으로 끝나고 이제는 시부모가 잔치를 여는 예식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 부현구고례(婦見舅姑禮) 때 신부가 시아버지께 드리는 폐백(지폐贄幣)의 내용이 ‘조율(棗栗)’ 즉 대추와 밤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폐백이라는 개념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 결혼식장에서 식후에 드리는 폐백은 절차상 하자가 있다. 신혼여행 후에 시부모를 알현하는 예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폐백의 의미를 시부모가 신부에게 대추ㆍ밤을 던져주면서 그처럼 아들을 많이 낳으라고 하는 상징으로 왜곡하고 있다. 고례(古禮)의 대추ㆍ밤 폐백은 부현구고례(婦 見舅姑禮) 때만 쓰는 것이며 그 상징적 의미도 전혀 다른 것이다. 조(棗, 대추)는 발음 상 조(早)와 통한다. 그것은 ‘조기(早起)’【며느리가 이제부터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하겠다는 의지를 밝힘】를 뜻하는 것이다. 율(栗, 밤)은 발음상 율(慄)과 통한다 그 것은 ‘경율(敬慄)’【엄숙하고 경건하게 모든 사태에 떠는 마음으로 임하겠다는 자세를 밝힘】을 뜻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이제 시가에서 살아야 할 며느리의 가장 큰 덕성임을 시아버지가 다짐하는 상징적 예식인 것이다. 이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장공(莊公) 24년조에 밝혀져 있다.
재아가 주나라가 사(社)를 밤나무[율栗]로 삼은 것은 ‘사민전율(使民戰栗)’의 목적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단지 상투적인 편의 의미를 밝힌 것일 수도 있지만 공자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어린 군주에게 ‘폭력’과 ‘위세’ 만을 가르치는 매우 사악한 발언이다. 더구나 공자가 이상으로 삼는 문아(文雅)한 주(周)나라의 상징을 ‘전율(戰栗)’, 즉 공포로 해석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사(社)의 나무는 각기 그 땅에 적합한 수종을 선택할 뿐이다. 재아의 해석은 완전히 임의적인 망언이다(공안국 설).
쏟아진 물은 이미 주어 담을 수 없다. 이루어진 일을 내 지금 말해 무엇하리오[成事不說]? 끝나버린 일을 이제 와서 내가 왈가왈부 하겠는가[遂事不諫]?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지사를 탓해 무엇하리[旣往不咎]! 이세 마디는 제자 재아에 대한 공자의 심한 꾸지람이요, 저주와 회한이 섞여있는 쓴소리이다!
혹설에 의하면 사(社)의 뒷뜰이 죄인을 죽이는 형장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재아가 이러한 답변을 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하여튼 이러한 대화의 배경에는 당시의 복잡한 정치상황이 걸려있었을지도 모른다.
애공이 즉위한지 4년째 되는 유월(六月) 신축일(辛丑日)에 박사(亳社)에 재난이 있었다[六月辛丑, 亳社災]라는 기록이 『춘추경(春秋經)』에 기록되어 있다. 노 나라에는 원래 군주와 귀족들이 참배하는 주사(周社)가 있었고, 일반 토착민들의 사랑을 받던 박사(社)가 따로 있었다. 이 박사(亳社)라는 것은 전 왕조인 은나라의 사(社), 즉 측백나무의 사직신을 모신 사당이었다. 은나라의 전통을 이은 은사(殷社)였던 것이다. 이 박사에서 민중들은 토신(土神)에게 풍작을 빌었다. 그런데 이 사당이 화재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놓고 애공은 무심코 재아에게 불탄 자리에 새로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할지 몰라 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아가 너무 과중한 해석을 사주(社主)에 관해 내려서 애공에게 겁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청나라 이돈(李惇)의 설이다.
밤나무라는 사직신이 백성을 전율케 하는 힘이 있듯이, 위세를 부려 처벌해야 할 놈들은 확실히 단속하라는 충고가 재아의 입장이라는 설도 있다. 다시 말해서 저 횡포한 삼환(三桓) 등의 대신들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가 있다는 재아의 호전적 발상에 대해, 공자는 그들의 횡포가 이미 그렇게 콘트롤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므로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어린 군주만 다치게 될 뿐인 경솔한 발언이라고 하여, 재여를 경계하는 말이라는 것이 청나라 방관욱(方觀旭)의 설이다. 방씨의 제설은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에 잘 소개되어 있다.
카이즈카씨는 이 설에 박사 앞 광장은 양호(陽虎)의 쿠데타로 인하여 노나라 백성들이 양호를 지지하는 맹세의 대집회를 거행했던 불행한 기억이 서린 곳이라는 사실을 첨가한다. 재아는 애공에게 삼환(三桓)을 제압하는 또 한 번의 정변을 권고했고, 이에 대해 공자는 그런 무리한 정책은 양호의 쿠데타와 같은 불행한 역사만 반복할 뿐이라고 재아를 꾸짖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이미 70객이었고, 무리한 정변이 국민 삶에 초래할 파탄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재아(宰我)’의 제자인데, 이름이 여(予)이다. 하ㆍ은ㆍ주 삼대의 사(社)가 똑같지 않은 것은 예부터 사(社)를 세움에 각기 그 토양에 적합한 수종을 심어 사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전율(戰栗)’은 무서워 벌벌 떠는 모습이다. 재 아는 또 하필 말하기를, 주나라 밤나무 수종을 사용한 이유의 뜻이 여차하다고 구라를 피웠다. 옛날에 사(社)의 뜰에서 죄수를 도륙했던 사례가 있어 이런 설을 부회한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宰我, 孔子弟子, 名予. 三代之社不同者, 古者立社, 各樹其土之所宜木以爲主也. 戰栗, 恐懼貌. 宰我又言周所以用栗之意如此. 豈以古者戮人於社, 故附會其說與?
‘수사(遂事)’라는 것은,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어도 대세가 이미 결정된 상황을 일컫는 것이다. 공자는 재아가 대답한 내용은 사를 세운 본뜻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당시 임금의 살벌하는 마음을 열어 주었으니, 이미 나가버린 말은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를 일일이 반복하여 말씀하심으로 깊게 꾸짖으시고 재아로 하여금 이후 이런 일이 없도록 말조심케 하려 하신 것이다.
遂事, 謂事雖未成, 而勢不能已者. 孔子以宰我所對, 非立社之本意, 又啓時君殺伐之心, 而其言已出, 不可復救, 故歷言此以深責之, 欲使謹其後也.
○ 윤언명이 말하였다: “옛날에는 각각 그 토질에 적합한 나무로써 그 사(社)를 이름했을 뿐이며, 그 나무에서 어떤 뜻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재아가 이런 것도 모르고 망령되이 의미부여를 하여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책망하신 것이다.”
○ 尹氏曰: “古者各以所宜木名其社, 非取義於木也. 宰我不知而妄對, 故夫子責之.”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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