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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5.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 칠조개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5.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 칠조개

건방진방랑자 2021. 5. 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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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 칠조개

 

 

5-5. 공자께서 칠조개에게 벼슬을 권하시었다. 칠조개가 그것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저는 벼슬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기뻐하시었다.
5-5. 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칠조개(漆彫開)논어전편을 통하여 단지 이 장에서 한번 언급되고 있는 인물이다. 성이 칠조(漆雕) 이름이 개(). 원래 그 이름이 계()였는데, ()나라 경제(景帝)의 실명이 계()였기 때문에 존귀한 사람의 이름을 경피(敬避)하는 과거의 풍습 때문에 한때 그 이름이 개()로 기술된 것이다. 그런데 공안국(孔安國)이 그의 이름을 개()로 표기하면서 계라는 원명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열전은 칠조개의 자()가 자개(子開)라고 하는 정보 이외로는, 단지 논어의 이 장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공자가어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보다 상세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제자열전제자해의 정보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열전제자해와는 다른 계보의 어떤 제자적(弟子籍)을 참고하였다는 것을 추론케 한다. 제자해4는 말한다

 

 

칠조개는 나라 사람이다. 자가 자약이고, 공자보다 열한살 연하이다. 상서(尙書)를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벼슬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너는 이제 벼슬할 만한 나이다. 기회가 자꾸 흘러가 버리고 있지만 않느냐?” 이제 자약은 공자에게 편지를 써서 보고 드렸다: “저는 벼슬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기뻐하시었다.

漆彫開, 蔡人, 字子若. 少孔子十一歲. 習尙書, 不樂仕. 孔子曰: “子之齒可以仕矣. 時將過.” 子若報其書曰: “吾斯之未能信.” 孔子悅焉.

 

 

제자해의 기술로부터 우리는 칠조개가 꽤 나이가 많은 사람이고, 채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혹설에는 칠조개의 나이가 ‘41세 연하로 되어있는데, 그것은 아 무래도 오기인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칠조개가 채나라 사람인지는 의문이 간다. 정현은 칠조개는 노나라 사람이라고 못 박아 말하고 있다. 논어속에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칠조라는 성을 가진 제자가 두 명이 더 나오고 있다. 칠조종(漆雕從)과 칠조치(漆雕侈). 칠조종(漆雕從)은 칠조도(漆雕徒), 칠조도보(漆雕徒步), 칠조도보(漆徒徒父)의 이명이 있다. ()를 고()라고 하기도 하고 자문(子文)이라고도 한다. 칠조치(漆雕侈)는 칠조치(漆雕哆)라고도 쓰며, ()는 자렴(子斂)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모두 노()나라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칠조는 노나라의 성이며, 칠조개 역시 노나라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칠조(漆雕)는 칠()과 조()를 의미한다. 칠은 옻칠이요, 조는 자개를 박는 것을 의미한다. 칠조는 자개칠 가구를 만드는 장인에서 유래된 성임을 알 수가 있다. 염백우ㆍ염옹ㆍ염구의 염()도 염()을 의미하는 것이다. 염옹의 아버지가 불초지부(不肖之父)’였다는 의미도, 결국 그가 아마도 수수(洙水)가의 낮은 판자촌에서 염색일에 종사했던 천장(賤匠)이었다는 정도의 이야기일 것이다. 오늘날 서울 주변의 피혁공장 같은 데서 일하는 고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칠조(Lacquer Carver)나 염(Dyer)이나 모두 당대로서는 좋은 신분으로는 평가되기 어려운 천한 장인집안(artisan family) 사람들이었다.

 

칠조개가 언제 공자 아래서 수학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나이로 보아자로보다 두 살 밖에는 어리지 않다 초기에 입문한 인물일 수도 있고, 또 나중에 늦깎이로 입문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고 향학열에 불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의 향학열로 보아, 그는 장인으로서 인생을 충분히 경험하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 학문에 뜻을 세운 사람이었을 확 률이 높다.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일수록 진중하고 또 깊게 천착하는 성향이 있다. 대학에서도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들이 산만치 않고 관심이 보다 집중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도 같다.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을 권한 것은 역시 획기적인 것이다. 우선 칠조개가 천한 장인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공자의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늦깎이로 공부하는 그의 생계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보상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마음씨를 느낄 수 있다. 세월은 자꾸 흐르는데 그렇게 공부만 하고 있으면 어쩌나! 네 나이도 벌써 나이인데 …….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의 기사에는 그의 늦은 연령과 흐르는 세월에 대한 공자의 배려가 노골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칠조개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저는 벼슬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吾斯之未能信.

 

 

사지(斯之)’는 우리말로 그 점에 관해서는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의 의미를 특별하게 부여한다면 사도에 있어서는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 핵심적인 단어는 ()’이다. (), 논어에서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의미는 인간의 언어의 신험성에 관한 것이다. 언어의 신험성이란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자기가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말이란 사실과의 대응이라는 현상적 차원을 넘어서서 양심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차원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동양인들은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 순수이성의 세계와 실천이성의 세계를 분리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벼슬을 한다는 것은, 곧 공무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사회의 공복(公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의 공복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 대하여 권력과 동시에 권력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태까지 인류가 사회적 삶을 유지해온 이래 공무원이 없어본 적은 없다. 공무원 조직의 형태와 성격의 변화만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지배적 권력의 타입(types of domination)과 관련되는 것이다. 베버의 말대로 그것 이 개인적 탁월성에 의존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배의 형태(the charismatic type of domination)이든, 유전되는 신분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지배의 형태(the traditional type of domination)이든, 모두가 합의하는 어떤 원칙적 과정에 의존하는 법제적인 지배의 형태(the legal type of domination)이든지를 막론하고 이 모든 지배의 형태에 공통되는 하나의 테마는 지배자의 도덕적 책임(moral responsibility)’인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관료제(bureaucracy)가 바로 법제적 지배의 형태에 속하는 것이며, 또 전문적 자율성(professional autonomy)과 정치적 중립성(political neutrality)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라 해도, 그러한 자율성과 중립성만으로 관료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자율성과 중립성은 근대적 관료제의 기본룰의 운영방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룰을 밑받침하고 또 뛰어넘는 어떤 도덕적 차원이 없이는 한 국가의 관료제는 정직하게 운영될 길이 없다. 그리고 근대적 관료제 속에도 지배권력의 여러 가지 형태가 혼효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법제적인 과정만으로 합리적인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이다. 법제적 중립성을 악용하는 온갖 비리들 이 법제적 틀 속에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날 동네 목욕탕에서 평생을 무슨 특수한 동제품을 생산하는 아담한 공장을 착실하게 운영해온 중소기업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분은 나에게 한숨을 내쉬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 칠십 평생에 공무원을 만나 단 한 번도 뇌물을 안 바쳐도 되는 상황은 없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아니요, 또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 공무원사회에 무차별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중소기업 사장이 살아야 했던 20세기에 비해 요즈음 21세기의 한국 관료사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에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측면이 아직도 도사리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개혁의 가장 큰 과제상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공무원들은 공무원들의 입장에서 항변할 수밖에 없는 어떤 고충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충을 충분히 수렴해가면서 우리나라의 공무원의 권위와 삶의 질과 도덕적 책임감이 제고될 수 있는 방향으로 어떤 과감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최대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을 권했다고 하는 사실은, 단순한 권유에 그친 것이 아니요, 실제로 벼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사태일 것이다. 칠조개는 나이도 많았고, 식솔이 딸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또 늦깎이로 성실하게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했을 것이다.

 

천자문에는 학우등사(學優登仕)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자장(子張)13에 자하의 말로서 기록된 배우고 남음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학이우즉사(學而優則仕)]’4글자로 변형시킨 것이다. 과거에는 배움[]과 벼슬[]이 이원적으로 분리되질 않았다. ()이란 사()가 하는 것이다. ()는 곧 사(), ()는 곧 사()를 위하여 존립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권유는 너무도 당연한 시세(時勢)였다. 나이도 들고 공부도 그만큼 했으니 이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대한 칠조개의 답변은 참으로 의외였다. 그것은 당대의 상식을 거부한 발언이었다. 칠조개의 오사지미능신(吾斯之未能信)’은 전통적 고주석에 의하면 두 가지 방면에서 그 의미의 분석이 가능하다(황간의 소). 그 첫째는 아직 학문이 미숙하기 때문에, 학문이 충분히 익을 때까지는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言己學業未熟, 未能究習, 則不爲民所信, 未堪仕也]. 그 둘째는 이 말이 이루어질 당대의 군주가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기가 꺼려진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言時君未能信, 則不可仕也. 魯君之誠, 未治於民. 故曰未能信也].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대의를 파악하지 못한 용렬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두 가지 해석은 전혀 취할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칠조개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의 고백이지 결코 외재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 언급이 아닌 것이다.

 

나는 칠조개의 고백은 벼슬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부정성을 내포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정성의 내면적 이유가 곧 미능신(未能信)’이다. 즉 내가 타인을 권력적으로 지배하는 입장에 서서, 나의 언행의 신험성을 확보할 길이 없다는 실존적 파라독스를 고백한 것이다. 주자의 신주에 인용된 정명도의 말은 이러한 의미맥락의 대강을 얻고 있다.

 

 

칠조개는 이미 그 대의를 보았다. 그래서 공자께서 기뻐하신 것이다.

漆雕開已見大意. 故夫子說之.

 

 

여기 대의를 보았다 함은, 학문의 정도가 반드시 벼슬로 나아가는 데에만 있지는 아니하다고 하는 새로운 사문(斯文)’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인간의 그릇됨이, 불기(不器)나 만성(晩成)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면, 당장 눈에 보이는 권력의 자리만이 나의 가능성이 발현되는 그릇됨은 아닐 것이다. 벼슬길에 오르지 않더라도 나의 배움을 통하여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이미 공자가 산 노나라의 성읍국가의 구조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칠조개는 공자가 창조해가고 있는 배움의 길의 그러한 새로운 가능성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기뻐했던 것이다[자열子悅]. 공자의 기쁨은 자신의 삶이 지향한 새로운 문화적 이상의 가능성을 칠조개의 실존적 고백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확인하는 기쁨이었던 것이다.

 

이 대화는 분명, 귀로(歸魯) 후 말년에 이루어진 대화임이 틀림이 없다. 그리고 칠조개의 이러한 답변은 동아시아 문명의 이천 년의 역사 속에서 유교의 역할의 양면성을 나타내주는 전범이 된 것이다. 그 하나는 학문을 통하여 등사(登仕)하는 유림의 전통이요, 그 하나는 학문을 통하여 등사(登仕)를 거부하는 처사의 전통이다. 이러한 양면성이 유학의 생명력이다. 권좌는 방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동시에 굴종적으로 아부될 수는 없는 것이다. 권력의 횡포를 막는 길은 권력 그 자체를 뿌리로부터 무기력하게 만드는 거부의 집단이 확보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이 등사의 거부의 전통을 바로 칠조개와 같은 인물들이 유교 집단 내에서 확립해 나갔던 것이다. 칠조개는 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2편에는 공자 사후에 전개된 유럽과 중의 하나로 맹자의 일파와 맞먹는 일파로 기록되어 있고, 그 사상경향까지 명시되어 있다. 칠조개 학파의 성향을 청렴하고 곧은 절개[廉直]로 규정하고 있다.

 

 

칠조개 학파의 주장에는 어떠한 상대에게도 안색을 비굴하게 바꾸지 않으며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는다고 하는 절개가 있었다. 스스로 곧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노예를 만나도 피하고, 스스로 곧다고 생각되면 제후에게도 큰소리친다. 세상의 치자들이 이들을 청렴하다고 생각하고 예우하였다.

漆雕之議, 不色撓, 不目逃. 行曲則違於臧獲, 行直則怒於諸侯. 世主以爲廉而禮之.

 

 

세속적 위세에 눌리지 않는 칠조개의 인품이 전해져 내려간 것을 알 수 있다.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칠조개의 언행을 한서』 「예문지에는 칠조자 기록한 책이었을 것이다.

 

최근 나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다. 몇년전 도올서원에 나이 먹은 재생이 한 사람 등록하였다. 그는 세속적으로 매우 성공한 사람이었다. 어려운 고시에 합격하여 사무관이 되었고 현실적으로도 매우 유능한 재질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세속적으로 본다면 부러울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연수기간 동안에 도올서원에 몇 림을 나오면서 학업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수학자세가 너무도 진지하고 또 그 인품이 온화하여 주변의 재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매사에 판단이 아주 상식적이고 건강하였으며 사소한 행동에도 자기 헌신의 실천적 자세가 엿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가르치는데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그가 공무원 사회로 복귀하고 몇 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나에게 찾아왔다.

더 이상 공무원 생활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곤 소리 없이 사직원을 내었다. 그의 내면적 갈등을 다 읽어낼 수는 없었다. 물론 그에게 어떤 하자가 있었거나 퇴직을 했어야 하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상태에서 소리 없이 물러났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단 하루라도 참으로 신()을 지킬 수 있는 삶을 무전제적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뻤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그는 생활전선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새로운 삶의 보람이 찾아오리라고 확신한다.

 

 

()’로 발음한다. 칠조개(漆雕開)’는 공자의 제자이다. 자가 자(子若)이다자개(子開)라고도 한다.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는 이 이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은 그 이치가 이와 같다고 참으로 확신하여 호발의 의심도 없는 것을 일컫는다. 칠조개는 스스로 말하기를, 아직 이와 같을 수 없어 사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부자께서는 그 돈독한 뜻을 기뻐하신 것이다.

, 音悅. 漆雕開, 孔子弟子, 字子若. , 指此理而言. , 謂眞知其如此, 而無毫髮之疑也. 開自言未能如此, 未可以治人, 故夫子說其篤志.

 

정명도가 말하였다: “칠조개는 이미 그 대의(大意)를 보았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기뻐하신 것이다.”

程子曰: “漆雕開已見大意, 故夫子說之.”

 

또 말하였다: “옛사람은 도를 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 말이 이와 같다.”

又曰: “古人見道分明, 故其言如此.”

 

사현도는 말하였다: “칠조개의 학문은 상고할 바가 없다. 그렇지만 성인께서 그로 하여금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신 것을 보면 분명 그의 재질이 벼슬할 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심술(心術)의 은미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한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 얻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아직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해가 있을 리 없다. 이런 미묘한 것까지 성인께서 아실 바가 아니었으나 칠조개가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 재목이 벼슬할 만한데도, 그 그릇이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았으니, 훗날 그가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보냐? 부자께서 이 때문에 기뻐하신 것이다.”

謝氏曰: “開之學無可考. 然聖人使之仕, 必其材可以仕矣. 至於心術之微, 則一毫不自得, 不害其爲未信. 此聖人所不能知, 而開自知之. 其材可以仕, 而其器不安於小成, 他日所就, 其可量乎? 夫子所以說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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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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