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건방진방랑자 2021. 6. 5. 08:06
728x90
반응형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후한은 처음부터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역시 황족이긴 했으나 원래부터 황위 계승권자인 게 아니라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이처럼 후한 시대에는 한 황실의 일족이나 옛 전국시대 명문가의 자손, 전직 고위 관리,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호 등이 지방 호족으로 각지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호족은 전한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이 성장할 만한 여건이 좋았다. 철제 농구가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관개시설이 확대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황무지도 많이 개간되었다. 게다가 비교적 평화로운 통일 제국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계급 분화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가 대거 출현했다. 이들은 농민에게서 토지를 사들여 겸병하거나 황무지를 대규모로 개간해 토지를 더욱 늘려갔다. 이렇게 해서 늘어난 토지는 더러 노비들을 시켜 경작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하호(下戶)라고 부르는 가작인(假作人, 당시에는 토지를 빌려주는 것을 라고 했다)에게 맡겼다. 이것이 소작농의 시작이다. 하지만 말이 소작이지 소작인들은 지주에게 거의 예속되어 있어 노비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신분이었다. 게다가 하호들은 주로 몰락한 농민이나 유랑민, 빈민들이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기 몸뚱이밖에 없는 처지였다.

 

대토지 소유자들이 그냥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 그쳤다면 굳이 호족이라는 용어로 부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경유착은 오늘날만의 부패 현상이 아니다. 권력을 가지면 그것으로 부를 얻고 싶고, 부를 가지면 그것으로 권력을 사고 싶게 마련이다. 지방에서 경제적인 실권자가 된 대지주들은 차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넘보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중앙집권제 아래 묶여 있다. 하더라도 중앙정부가 전국 각 지방을 일률적인 정도로 통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거의 독립국이었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제후국들의 역사적 경험도 있다.

 

옛날의 제후라, 좋지! 당시 제후국들은 각국을 떠돌던 책략가나 지식인들을 받아들여 인재로 삼았다지 않은가? 호족들은 그런 선례를 본받아 집 안에 수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이들의 지식과 재능, 그리고 힘을 자신의 두뇌와 손발로 활용했다. 또한 호족들은 다른 지역의 호족과 통혼하거나 여러 가지 경제적 관계를 맺어 긴밀한 유대의 그물을 형성했다. 자연히 지방의 행정조직이나 관료들은 호족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 지방의 호족들은 점차 본격적인 권력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문벌 귀족으로 발전해갔다. 호족에 뿌리를 둔 이 신흥 귀족들은 마침내 400년간 군림해온 한 제국의 문을 닫고 귀족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새 시대의 문을 열고자 했다.

 

 

부패한 외척ㆍ환관 정치에 호족들의 등쌀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영향으로 탐관오리들이 들끓게 되자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강력한 시황제의 진 제국도 진승과 오광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보다 훨씬 오래 존속한 한 제국의 말기도 비슷했다. 후한 중기부터 치솟던 농민들의 분노는 이윽고 184년에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이번의 농민 반란은 진승과 오광의 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선 중국 전역에서 36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농민이 일제히 봉기한 것은 규모로 보나 조직력에서 보나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노란 깃발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린 이 반란군은 장각(張角)을 우두머리로 삼고 치밀한 모의 끝에 거사한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황건 반란군은 정신적ㆍ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후한 중기부터 사회적 혼란이 극심해짐에 따라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는 황노 사상이 만연했다. 이것은 점차 황노 신앙으로 바뀌어 종교적인 색채를 강렬하게 띠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를 토대로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 교에 가입할 때 쌀 다섯 말을 바친 데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라는 종교 교단이 형성되었다(사회 엘리트 = 유가, 일반 민중 = 도가의 공식은 10세기 넘어서까지도 기본 구도였다).

 

당시 한의 정권은 외척이 잡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조직적이고 이념적이고 강력한 반란군을 맞아 외척 정권은 총력을 기울여 대항했다. 우두머리인 장각이 죽자 황건의 난의 주류는 어느 정도 진압되었으나, 그 불길은 작은 불씨로 변해 오히려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지방 호족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원래 사병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던 데다, 황건의 난에 맞서기 위해 중앙정부는 지방 호족들의 군사 활동을 허락하고 장려한 터였다. 이제 비축된 힘을 가지고 실력 행사에 나설 때다.

 

호족들은 앞다투어 군비를 확장하고 자기 영지의 방어에 나섰다. 환경이 맞으면 방어는 쉽게 공세로 전환된다. 얼마 안 가 호족들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처럼 각자 나라를 세우고 독립국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호족들에게 자체 경비를 권장할 정도로 허약해진 중앙정부는 더 이상 통일 제국을 이끌어갈 힘이 없었다. 220년 후한 황실은 지방 호족 출신의 신흥 귀족인 위()나라의 문제(文帝)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나라를 넘기고 말았다. 이로써 최초의 통일 제국인 한은 410년의 사직(왕망 시대 제외)을 뒤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죽 쒸서 개 준 통일

촌놈이 세운 대제국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흉노 정벌의 도미노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외척과 환괸의 악순환

또 다시 분열의 시대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