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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분열 속의 발전: 문화의 르네상스(죽림칠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분열 속의 발전: 문화의 르네상스(죽림칠현)

건방진방랑자 2021. 6. 6.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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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의 르네상스

 

남조의 네 나라(송ㆍ제ㆍ양ㆍ진)는 평균 수명이 40여 년밖에 안 된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나라는 전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군사력도 북조의 이민족 국가들보다 약했다. 그러나 중원의 호족과 지식인 들이 이민족 치하를 피해 대거 남하하면서 강남 지역의 귀족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처음으로 강남에 중원을 능가하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우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오()와 동진(東晋), 그리고 남조(南趙)의 네 나라를 합쳐 보통 6(六朝)라고 부른다. 6조시대에 남중국에서 발달한 귀족 문화(6조 문화)는 동양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다채롭고 화려했다(시대로보면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1000년이나 앞서니까 오히려 르네상스를 서양의 6조시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와 경제, 제도와 문물 같은 것들은 사회생활을 통해 집단적으로 생성되지만, 예술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인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발달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6조시대는 예술이 숙성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6조 사회는 귀족 사회였다. 대중이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로 참여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근대 이후의 일이므로 고대에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려면 아무래도 귀족 중심의 사회여야만 했다.

 

6조시대에는 짧은 기간에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했던 만큼 황제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허약했다. 심지어 전통적인 명문 세기의 지위는 황제라 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렇게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문벌 귀족 사회가 정착된 덕분에, 예술적 자질을 타고난 개인은 마음껏 자신의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 역시 교회와 귀족들의 재정적 후원을 바탕으로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물론 개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귀족에게만 허용된 값비싼 취미였다. 당시의 귀족들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데다 강남 지역 특유의 따뜻한 기후와 아름다운 풍광에 사로잡혀 사뭇 탐미적인 자세로 예술을 추구했다. 수많은 문장가와 화가가 출현해 창작과 비평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그때까지 전인미답의 분야였던 예술 이론을 확립했다.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 회화의 사조인 고개지(顧愷之),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한 예술가들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학 평론서로 꼽히는 유협(劉勰)문심조룡(文心雕龍)도 이 무렵에 탄생했다. 6조시대에 확립된 문학과 예술의 기본 골격은 이후 당 제국에 계승되어 당을 중국 시문학의 최고봉으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6조문화의 진수 문화는 안정기보다 분열기에 더욱 발달하게 마련이다. 고대 중국의 르네상스를 이룬 고개지의 그림()과 왕희지의 글씨(난정서, 아래).

 

 

이 시대의 문화 현상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상의 발달이다. 한 제국의 지도 이념이었던 유가 사상은 고문학과 금문학의 대립을 통해 큰 발달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유가의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허식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유가 사상은 원리상으로 현실 정치와 깊은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은 남북조시대의 분방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마찰을 빚었다(개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6조시대의 문화는 이후까지 통틀어 가장 서양 문화와 가까웠을 것이다). 더욱이 후한 말기에 유학자들이 현실 정치의 참여를 위해 국가 권력에 도전했다 패배의 쓴잔을 맛본 경험은 지식인들의 좌절을 가져왔다.

 

유가에 대한 반발로 성행한 것은 도가, 노장(老莊) 사상이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노자(老子)장자(莊子)를 원조로 하는 도가 사상은 유가처럼 국가를 중심으로 보지 않고 개인을 위주로 여긴다는 점에서 6조 귀족들의 체질에 잘 맞았다. 또한 사회 불안이 가중되고 전란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어지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도가 사상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청담(淸談) 사상이라고 불렀는데, 그 한 예가 유명한 죽림칠현(竹林七賢)완적(阮籍) · 혜강(嵆康) · 산도(山濤) · 상수(向秀) · 유령(劉伶) · 완함(阮咸) · 왕융(王戎) 7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도가 사상은 오로지 현실 도피만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주로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게다가 사회가 차츰 안정되어가면서 유희적이고 탐미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두드러져 본격적인 사상으로 성숙되지는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후한 말기의 태평도와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의 교단으로서 면모를 갖춘 도가 사상의 한 갈래가 있었다. 동진의 갈홍(葛洪)은 이 도교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확립했으며, 북위에서는 이것을 정식 국교로 채택했다.

 

또 한 가지 이 시대의 중요한 사상적 변화는 불교가 도입된 것이다. 불교는 후한 중기에 서역에서 전래되었는데, 당시의 귀족들은 노장 사상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도가적인 관점에서 불교를 보았다. 이를테면 불교의 ()’을 도가의 ()’로 이해하는 식이다. 그 덕분에 초기 불교는 노장적인 성격이 짙었으나 불교는 적어도 도가보다는 체계화와 조직화의 가능성이 컸다. 즉 교단화할 수 있었던 게 장점이다. 그 덕분에 불교는 점차 노장사상을 누르고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교리상으로도 불교는 도가보다 친사회적이었다. 무엇보다 노장사상에서는 소극적인 현실 도피 외에 달리 실행할 교리가 없었지만, 불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바로 윤회개념이다. 현실 도피라는 수단은 현세에만 적용될 뿐이지만, 불교의 윤회와 업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를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교의 도입으로 중국인들은 처음으로 육신만이 아닌 영혼과 영원의 문제를 고찰하게 되었다. 불교는 동진 시대에 크게 성행했고, 이어 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면서는 귀족만이 아니라 서민의 마음속에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한편 이민족들의 북조 사회에서는 불교의 호국적인 측면이 유목민족 출신 지배층의 호응을 얻어 정책적으로 장려되었다. 또한 불교가 융성하자 중국의 불교는 이 시기에 동방의 한반도로도 전래되는데, 남북조시대인 만큼 그 길도 두 가지였다. 371년에는 북조의 전진이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고, 384년에는 남조의 동진이 백제에 전했다. 신라에는 한참 뒤인 528년에 고구려에서 불교가 전해졌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삼국지의 막후에는

고대의 강남 개발

따로 또 같이

문화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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