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통일과 분열, 분열과 통일
그래도 답은 바쿠후
각고의 노력 끝에 권력을 잡은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치고 천황 정치를 부활하려 애썼다. 그러나 100여 년 전 고토바(後鳥羽)의 노력이 그랬듯이, 좋았던 옛날‘로 복귀하려는 고다이고의 꿈도 환상이었다.
우선 고다이고는 무사들의 반발을 고려해 이전의 고쿠시(國司)나 슈고(守護) 제도는 그대로 두고 그 지위에 자기 사람을 앉혔다. 다분히 절
충적인 방식이니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에게는 불만이다. 게다가 그는 바쿠후 타도에 앞장선 무사들의 논공행상에서 실패한 탓에 그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킨 것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고다이고의 중흥 정치는 1년도 못 되어 파탄에 이르렀다.
이런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인물은 바로 아시카가 가문의 수장인 다카우지(尊氏, 1305~1358)였다【그의 원래 이름은 ‘高氏’였는데, 바쿠후 타도의 공으로 황족만이 사용하는 ‘尊’ 자를 하사받았다】. 바쿠후를 타도하기 전부터 권력을 꿈꾼 다카우지는 호조를 무너뜨리면서 이미 로쿠하라탄다이를 손에 넣고 이곳을 통해 교토의 정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거병할 명분이 생겼다. 1335년 호조 가문의 잔당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다카우지는 반란의 진압을 빌미로 자연스럽게 가마쿠라를 점령하고 그곳에 아예 눌러앉아 교토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리하여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진 지 불과 2년 만에 전국은 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잠시 동안 부활한 천황 체제에서 ‘좋았던 옛날’을 전혀 실감하지 못한 무사 세력들은 위기에 처한 고다이고를 도우려 들지 않았다. 다카우지는 천황 세력의 호족들을 손쉽게 제압하고 교토를 점령해 고다이고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1336년 교토에서 3년 만에 다시 바쿠후를 수립했다. 가마쿠라에 이어 두 번째로 들어선 무사 정권, 무로마치(室町) 바쿠후다.
▲ 바쿠후의 교체 가마쿠라 바쿠후로 바쿠후 시대는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무사들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가마쿠라를 타도하는 데 공을 세운 다카우지(위 그림)는 다시 교토의 천황 세력을 굴복시키고 이번에는 아예 전통의 귀족 도시인 교토에서 무로마치 바쿠후를 열었다. 일본의 바쿠후 교체는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풍운아 고다이고는 아직 날개를 완전히 접지 않았다. 그해 12월 그는 교토를 탈출해 남쪽의 요시노에 터를 잡고 측근들을 모아 새 조정을 구성했다. 이로써 일본의 조정은 다카우지가 옹립한 고묘(光明, 1322~1380)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의 두 개로 나뉘었다. 이때부터 바쿠후가 지원하는 북조와 아시카가를 반대하는 일부 가문들이 뭉친 남조가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를 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남북조시대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 등 동양 3국의 역사에 모두 등장한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4장에서 보았듯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250여 년간이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통일 이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발해 왕조가 들어선 시대를 가리켜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발해가 빠져 있어 한동안 발해사는 우리 역사에 포함되지 못했으나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일본의 남북조시대는 중국이나 한반도의 경우와 달리 국가적 차원의 대립이 아닌 정권 간의 대립이며, 따라서 기간도 수십년에 불과하다. 국가를 넘어선 민족적 차원의 대립까지 포함시킨다면, 앞서 살펴본 남송 시대의 중국도 북부에 금, 남부에 남송이 있었던 남북조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서로 어느 정도 맞상대가 되었으나 점차 남조의 약세가 두드러졌다. 결국 3년 만에 고다이고는 영욕에 찬 세월을 뒤로하고 산중에서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의 다카우지는 남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굳이 모험하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남조 세력은 북조의 일부 일탈 세력과 손잡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래서 남북조시대는 예상외로 약 6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다 1392년에 무로마치의 3대 쇼군인 요시미쓰(義滿, 1358~1408)의 강요로 남조의 천황이 북조에 제위를 넘기는 형식으로 전격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이 해는 공교롭게도 한반도에서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해이기도 하다. 혹시 이 사건이 일본의 정국에 다소나마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요시미쓰의 시대는 무로마치 바쿠후의 전성기였다. 그는 힘센 슈고들의 반란과 저항을 진압하고 바쿠후의 권력을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바쿠후 체제의 안정에 필요한 여러 가지 행정 기구들을 정비했다. 1378년 요시미쓰는 교토의 무로마치에 화려한 저택을 짓고 바쿠후를 이곳으로 옮겼는데, 아시카가 가문의 바쿠후를 무로마치 바쿠후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시대에 생겨난 일본의 전통적인 문화로 다도(茶道)가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무사들을 중심으로 불교의 선종이 크게 유행했다. 명상을 중시하는 선종에서는 아무래도 졸음이 가장 큰 적이었다. 그래서 졸음을 쫓는 수단으로 차를 마시는 것이 널리 퍼졌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이것이 발달해 다도가 되었다. 다도는 원래 차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차 품평회를 하던 ‘차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그 행위 자체를 즐기게 되면서 나름의 예법이 발달했다.
▲ 차를 마시는 무사의 모습 무로마치 시대에는 집 안에 다실을 갖추고 다도를 행했는데, 특히 쇼군들이 다도를 즐겨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림처럼 무사들은 조용한 다실에서 차를 마시며 세상의 번뇌를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다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1401년 요시미쓰는 중국 명 제국과 국교를 맺고 ‘일본 국왕’이라는 책봉을 받았다. 사실 여기에는 왜구의 활약이 크게 기여했다. 12세기부터 동북아시아의 해상에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일본의 남북조시대 동안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 무렵부터는 일본 서부 해안 지역 주민들의 상당수가 왜구로 변하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수시로 침탈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명은 일본의 지배자인 무로마치 바쿠후에 왜구를 근절하는 조건으로 조공 무역을 허락했다. 일본으로서는 당제국 시대 이후 실로 오랜만에 중국과 정식 교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명분으로나마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관계를 주창한 고대 천황 시대와는 달리 바쿠후는 ‘왕’이라는 중국의 책봉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답신에서 자신을 ‘일본 국왕 신(臣) 미나모토’라고 자칭했다【요시미쓰가 중국의 책봉과 ‘왕’의 칭호에 만족한 데는 천황이 상징적 존재로 남아있다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천황은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물러앉든 늘 일본 역사 속에 존재했다. 사실 무로마치 바쿠후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의 일반 국민은 천황의 존재조차 몰랐으나, 천황이라는 상징은 지배층에게 늘 일본이 중국과 대등한 ‘제국’이라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를 맞은 것도 천황이 아닌 쇼군이었다. 조선의 국왕에 걸맞은 일본의 지배자는 천황이 아니라 그 아래의 쇼군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중국과 일본의 ‘군신 관계’가 200년 뒤 동북아시아에 피바람을 부르는 전란으로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 해상의 깡패들 무로마치 시대에는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중국과 한반도는 물론 무로마치 바쿠후도 왜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으나, 그 덕분에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무역 허가를 받아냈으니 왜구는 적어도 본국에는 ‘애국’한 셈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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