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의 비결
청 제국 이전에 북방 민족들이 세운 국가는 대개 정복에는 능했어도 통치에는 서툴렀다. 남북조시대에 화북을 지배한 북조 나라들이나 10세기 거란의 요, 12세기 여진의 금, 13세기 몽골의 원 등은 모두 군사력에서는 뛰어났으나 지배 기술이나 문화에서는 전통의 한족 왕조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에 북방 민족의 제국이 들어설 때에는 언제나 지배 민족이 소수였고 피지배 민족이 다수였다. 그래서 소수의 북방 민족은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주로 차별과 억압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힘만 세다고 해서 뒤진 문화가 앞선 문화를 오래도록 지배할 수는 없다. 더구나 힘이란 언제까지나 강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차별과 억압을 통한 지배는 지배하는 측의 힘이 약해지면 금세 밑천이 드러나고 만다. 북방 민족의 제국들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한족 제국들에 비해 훨씬 짧았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그에 비해 청은 무려 3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으니 여느 한족의 통일 제국에 못지않게 장수한 셈이다. 게다가 당시 중국의 인구는 1억 명가량이었는데 반해 만주족은 60~1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소수의 지배층이 압도적 다수의 피지배층을 오랜 기간 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우선 강희제가 출범시킨 적극적 한화 정책의 덕분이 크다. 앞서 보았듯이, 강희제는 한족 문화를 활발하게 수용했을 뿐 아니라 제도적인 면에서도 한족에게 차별을 두지 않았다. 예전의 몽골은 소수 지배층인 몽골인과 색목인을 특별히 우대하고 국가 기구의 주요 부서장으로는 반드시 몽골인을 임명하는 등 철저한 차별 정책으로 일관했지만, 강희제는 정복 국가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오히려 한인들을 중용했다. 또 승진에 제한을 두었던 원대와 달리 청대에는 한족 관료도 얼마든지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정부의 주요 부서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가급적 만주족과 한족의 동수로 구성했다. 예를 들어 내각에서 일하는 내각대학사의 수는 만주족 2명, 한족 2명이었다. 6부의 책임자들도 만주족과 한족이 비슷한 비율로 섞였다. 물론 그렇게 한 의도는 민족 간의 차별을 두지 않고 형평을 맞추려는 데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 관료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늦추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와 같은 강희제의 한화 정책은 시기에 따라 강도와 비중이 달라졌어도 청대 내내 이어졌다(원대에도 한화 정책을 추진한 쿠빌라이의 치세에 번영을 누리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청은 만주족 고유의 특성을 잃지 않았다. 입관 후에까지도 의정왕대신회의와 같은 만주 시대의 제도를 유지했으며, 공식적으로는 한문을 사용하면서도 누르하치 시절에 만든 여진 문자도 계속 사용했다. 특히 정복 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군사 제도는 만주족 전통의 팔기제(八旗制)를 주축으로 삼았다. 또한 전국에 변발의 풍습을 강요한다든가, 만주 지역에 봉금책을 적용한다든가, 문자옥이 여러 차례 발생한 데서 보듯이 한족에게 회유와 더불어 탄압책도 적절히 섞었다. 한마디로, 고도로 능란한 통치 기술을 구사한 것이다.
▲ 화려한 군복 청 제국의 군사 제도인 팔기군의 복장이다. 정황ㆍ양황ㆍ정백의 3기는 황제의 직할대이고, 양백ㆍ정홍ㆍ양홍ㆍ정남ㆍ양남의 5기는 제후들이 관할하는 군대였다. 각 기마다 무기와 급료도 달랐으니 이 복장은 곧 계급장인 셈이다.
한족과의 관계를 잘 정립한 게 장수의 첫째 비결이라면 둘째 비결은 영토와 관련이 있다. 실은 북방 민족이 중원을 지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여느 한족 왕조에 비해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지배자가 북방 출신이므로 북방의 수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 당ㆍ송ㆍ명 등 중국 역대 한족 왕조들의 국력이 약화된 것은 늘 만주와 서북변의 북방 민족들에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주 출신의 청이 중원을 차지했으니 만주 쪽의 국방은 자동으로 안정적이었다(그 이북은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강희제와 건륭제의 정복 사업으로 서북변까지 평정됨으로써 청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족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장수의 셋째 비결은 대내적인 요인, 즉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다. 이 제도로 거의 모든 신생국에서 나타나는 왕자의 난이 방지되었다. 사실 옹정제까지는 제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약간 있었지만 태자밀건법 덕분에 다음 황제인 건륭제가 즉위할 때는 그런 조짐이 전혀 없었다【엄밀히 말하면 태자밀건법이 실효를 거두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섯째인 건륭제가 태자로 공표될 때는 이미 네 형이 다 죽은 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옹정제는 자신이 즉위할 때부터 건륭제를 후계자로 점찍고 특별 교육을 시켰다. 그 덕분에 건륭제는 ‘준비된 지배자’로서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강희와 건륭이 워낙 오래 재위한 탓에 태자밀건법이 실제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청은 역사 상 가장 매끄러운 권력 승계를 선보였을 것이다】. 비록 건륭제가 워낙 오래 재위한 탓에 실제 효력은 건륭제로 끝났으나 동서양의 어느 역사에서는 왕위 계승이 항상 문제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 의미는 컸다.
더구나 태자밀건법은 자질이 우수한 황제를 제도적으로 배출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도 있었다. 예전처럼 어릴 때 태자가 책봉된다면 나중에 자라서 어떤 황제가 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태자밀건법을 취하면, 비록 황제의 아들들만을 후보로 한다는 제한적 선택이라 해도 오랜 기간에 걸쳐 인물됨을 보고 나서 군주감을 고를 수 있으므로 매우 합리적인 제위 계승이 이루어질 수 있다. 중대 이후 무능한 군주들이 연이었던 명 제국을 연상해본다면, 그런 제도가 없을 경우 청도 역시 강희제와 옹정제의 안정기를 거치고 나서는 무능한 군주가 즉위할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 명ㆍ청의 강역 건륭제의 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비슷해졌다. 지도에서 보듯이, 청 제국의 강역은 명 제국의 강역에 비해 거의 두 배이며, 스칸디나비아까지 합친 유럽 대륙 전체보다도 크다. 물론 강희제와 건륭제의 정복 사업도 활발했으나 그보다 만주 출신의 민족이 세운 청 제국이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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