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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최후의 전성기: 아이디어맨 옹정제(양렴은제, 황태자밀건법, 지정은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최후의 전성기: 아이디어맨 옹정제(양렴은제, 황태자밀건법, 지정은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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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디어맨 옹정제

 

실로 오랜만에 중원을 정복한 이민족 왕조였으므로 강희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민심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중심이 약해지면 언제든 다수가 들고일어날 것이다. 지배하는 소수는 관용만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다음 황제인 옹정제(雍正帝, 1678~1735)의 과제였다.

 

지배 체제를 공고화하려면 무엇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다. 우선 그는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와 내각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통치 체제를 단일화하기로 결정하고,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해 두 기관의 기능을 한데 통합했다. 군기처는 만주족과 한족의 군기대신으로 구성된 최고 의사 결정 기구였으나 황제 직속이었으므로 황제의 비서실과 같은 기능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국무위원 전체를 비서로 거느린 격이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졌으면 그다음 과제는 권력을 행사하는 메커니즘, 관료제를 정비하는 것이다. 옹정제는 강력한 황권을 이용해 관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했다. 민생이 안정되려면 우선 관료들의 부패가 없어야 하며, 부패가 없으려면 관료들이 급료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고안한 방법이 양렴은제(養廉銀制).

 

명대 중기부터 은납제(銀納制)가 시행되었으나 조세는 여전히 현물이 위주였다. 각 지역은 농민들이 조세로 납부한 곡물을 집수해 중앙으로 보냈다. 그런데 곡물을 중앙으로 수송하는 과정에는 아무래도 손실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방관은 미리 손실분을 감안해 재량껏 농민들에게서 세량을 더 받았는데, 이런 관행에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점차 그 몫은 관리들이 챙기게 되었고 걸핏하면 부패의 온상이 되곤 했다.

 

양렴은제는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관리들의 급료를 그만큼 올려주는 제도였다. 말하자면 음성적인 수입을 양성화하려는 의도로 일종의 수당을 지급한 셈이다. 이것을 양렴은(養廉銀), 청렴을 배양하는 돈이라 불렀으니, 아무리 철면피 탐관오리라고 해도 양렴은을 받으면서 따로 삥땅을 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옹정제는 지방의 사정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지방의 고위 관료들과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다. 지방관이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친전서(親殿書)라고 불렀는데, 옹정제는 이 친전서에 붉은 글씨로 직접 주석을 달아 답신을 보냈다. 정성도 정성이려니와 황제의 친필이 담긴 서신을 지방관이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짧고 굵은 치세 아버지 강희제가 워낙 오랫동안 장기 집권한 탓에 옹정제는 넷째 아들이면서도 마흔넷의 늦은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불과 13년 동안의 재위 기간에 치밀하고 정교한 정책을 구사해 굵직하면서도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

 

 

그렇듯 모든 정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옹정제의 태도는 황태자밀건법(皇太子密建法)에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강희제가 오랜 기간을 통치한 탓에 그 아들들은 수도 많았고 장성해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랜만에 이루어지는 제위 계승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인 옹정제 자신도 치열한 암투 끝에 즉위한 터였다. 그는 가뜩이나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판에 제위 계승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제국의 안정이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혀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제위 계승 제도를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은 황제가 재위할 때 태자를 책봉하는 것이었다. 그 장점은 명확하다. 후계자가 미리 확정되면 중앙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고, 태자에게 장차 군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보통 열 살 전후의 어린 맏아들을 태자로 책봉하는데, 그 아들이 장차 현명한 군주감이 될지를 보장할 수 없다. 송 제국이나 명 제국은 초반에는 잘 나가다가 중대 이후 어리석은 황제들이 제위에 오르며 중앙 권력이 무너졌다. 권력 안정을 위한 태자 책봉이 오히려 권력 불안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자밀건법은 획기적이었다. 무조건 맏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지 않고 황제가 평소에 아들들 가운데 후계자감을 점찍어둔다. 그리고 예전처럼 태자를 미리 공표하는 게 아니라 그 이름을 써서 상자에 밀봉해두었다가 황제가 죽을 무렵에 공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위 계승자를 유언으로 정하는 방식인데, 강력한 전제군주가 남긴 유언을 어길 자는 없다. 어느 나라에나 있었던 왕자의 난이라는 홍역을 청이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옹정제가 만든 태자밀건법의 덕분이었다.

 

옹정제의 세심함은 제도만이 아니라 사상의 측면에도 고루 미쳤다. 아버지 강희제가 한화 정책으로 정권 안정에 기여했다면, 옹정제는 한족 지식인층에게 내재해 있는 반청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애썼다. 그 방법으로는 강압과 논리가 병용되었다. 우선 그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라는 책을 직접 저술해 청의 중국 지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렇게 이론적 논거를 확립하고 나서는, 여기에 어긋나는 사상에 관해서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 탄압을 가했다. 강희제 시절에도 문자옥(文字獄, 일종의 필화 사건)이라고 부르는 지식인 탄압 사건이 있었지만, 옹정제 시절에는 문자옥이 여러 차례 연이어 발생했다.

 

 

황제를 결정하는 문서 옹정제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태자밀건법이라는 독창적인 제위 계승 제도를 마련했다. 전 황제가 죽기 전에 황태자를 미리 정하고 밀봉해놓았다가 유언으로 발표하는 방식인데, 진작 도입되었더라면 중국 역대 제국들을 괴롭힌 제위 계승이 한결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옹정제의 치세에는 세제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 이전까지 청의 세제는 명대에 만들어진 일조편법(一條鞭法)이었다. 그러나 명대에도 중기 이후부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일조편법이 청대에 제대로 기능할 리 없었다. 항상 골치 아픈 문제는 사람에게 매기는 세금, 즉 정은(丁銀)이었다. 토지가 없는 가난한 농민들은 인두세를 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요역 위주라면 몸으로라도 때우겠는데 은납제(銀納制)에서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더구나 지주나 관료, 부호 상인 들은 갖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이 부담해야 할 정은마저 요리조리 탈세했다. 이러한 정은의 손실분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전가되었으므로 백성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그동안 그런 모순을 알고도 고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은은 인구를 대상으로 하므로 제대로 부과하려면 자세한 인구 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차례 인구조사를 해보았으나 워낙 넓은 지역에 워낙 많은 인구인 탓에 정확한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해준 게 바로 1711년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에 관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1711년 이후의 인구에 대해서는 정은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므로 사실상 전국의 총 정은액을 고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은이 상수화되면 변수는 토지 하나뿐이다. 그래서 옹정제는 아예 정은을 토지에 대한 세금인 지은(地銀)에 통합시켜버렸다. 그래서 새 세제의 명칭은 지정은제(地丁銀制)였다.

 

지정은제가 도입된 덕분에 가난한 농민들은 부당하게 부과되는 정은으로 인한 고통을 한층 덜게 되었다. 그러나 지정은제(地丁銀制)는 단기적인 성과 이외에 역사적인 의미도 가진다. 중국 역사상 세법의 개정은 무수히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토지와 사람을 세금의 부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정신은 늘 변하지 않았다(그런 의미에서 모든 세제는 당대의 조용조(租庸調)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정은제로 인해 사람이 통합됨으로써 근대적인 단일 항목의 세제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300년에 걸친 청 제국의 중국 지배 기간 중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약 130년간을 청의 전성기라고 말한다. 이 기간 동안 강희제와 건륭제(乾隆帝, 1711~1799)의 치하가 무려 120년에 이르기 때문에 이 시대를 강희ㆍ건륭 시대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사이에 불과 13년간 재위한 옹정제는 짧은 기간에 청을 중국식 통일 제국으로 탈바꿈한 굵직한 치적을 남겼다.

 

 

서양인이 그린 황제 말을 탄 건륭제의 당당한 모습이다. 그림에서 서양식 분위기가 보이는데, 그 이유는 화가가 예수회 선교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이기 때문이다. 그는 랑세녕(郞世寧)이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중국에서 선교와 더불어 그림을 그렸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급변하는 만주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

아이디어맨 옹정제

현대의 중국 영토가 형성되다

장수의 비결

안정 속의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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