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
난징 조약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것이 하나의 전범이 된다는 데 있었다. 이제 중국의 실력은 백일하에 드러났으며,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은 아무도 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양 질서의 핵이었던 중국이 그럴진대 다른 나라는 볼 것도 없었다. 1854년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일본을 개항하는 것은 난징조약의 후속 조치나 다름없었다(당시 서구인들은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조선에 대해서는 직접 통상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곧이어 1844년에는 미국과 프랑스가 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문을 연 주체는 영국이었고 난징 조약에는 엄연히 영국에 최혜국(最惠國) 대우【최혜국 대우란 이후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그 나라에 부여하는 이익은 모두 자기 나라에도 부여한다는 조항이다. 즉 난징 조약에서 중국이 영국에 최혜국 대우를 약정했다면, 이후 중국이 다른 열강과 맺는 모든 조약을 영국이 사후 차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날강도 같은 조항이고 오늘날에는 국제법에도 어긋난다(중국은 국제조약의 관념 자체가 없어 그 독소적인 내용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터무니없고 ‘비합리적인’ 조항은 사실 서구식 ‘합리주의’와 통한다. 조약을 맺을 당시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 나중에 다른 나라와 맺게 되는 조약에서 등장할지도 모르므로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조약 안에 명기해두자는 것이다】를 한다는 조항이 있었으므로 중국에서의 우선권은 영국에 있었다. 과연 영국은 그 독소적 조항을 적시에 써먹었다.
난징 조약에 큰 기대를 걸었던 영국은 예상한 만큼 무역상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국은 난징 조약을 더욱 불평등한 조약으로 개정하려 했으나 난징 조약에는 개정에 관한 조항이 없었다. 그런데 청과 미국이 체결한 조약에는 12년 뒤에 내용을 개정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미국과 맺은 조약을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이때 최혜국 대우의 조항이 말을 했다. 영국은 자신이 최우선의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다른 조약의 내용까지도 가져다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난징 조약이 체결된 지 12년이 지난 1854년에 영국은 조약의 개정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그동안 난징 조약이 극히 불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청 조정이 그 억지를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 없었다. 결국 영국은 또다시 물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마음먹었다. 때마침 터키에서 터진 크림 전쟁(1853~1856)으로 중국 문제는 잠시 미루어졌지만,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다시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 세계 최초의 불평등조약 1842년 영국 군함 콘월리스 함상에서 난징 조약이 체결되고 있다. 영국 측 대표인 포틴저는 초대 중국 대사 겸 홍콩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50년 뒤에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줄은 당시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리하여 2차 아편전쟁이 벌어졌는데, 지난번에도 손쉽게 이겼지만 이번에는 크림 전쟁에서 동지로 싸운 프랑스와 손잡기까지 했으니 승패는 볼 것도 없었다. 1857년에 연합군은 광저우를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베이징의 관문인 톈진을 함락시켰다. 할 수 없이 청 조정은 다시 불평등조약인 톈진 조약을 맺게 되는데, 여기에 러시아가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다. 프랑스와 러시아까지 참여했으니 난징 조약 때보다 입이 두 개나 늘었다. 청 조정이 조약에 불만을 품고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재차 군대를 동원해 굴복시키고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톈진조약으로 베이징에 외교 사절을 주재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를 얻었던 서구 열강은 베이징 조약을 통해 더 많은 개항장과 전쟁 배상금까지 얻어냈다.
열강과 조약을 체결할 때마다 불평등이 심화되자 청 조정의 무능함은 이제 백성들도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려면 세금을 늘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사회적 불만과 불안이 팽배한 가운데 중국 역사상 가장 장기간에 가장 대규모인 ‘반란’이 일어났다. 바로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이다. 이 운동은 2차 아편전쟁이 벌어지기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청 조정이 전쟁에 전념하지 못한 것은 이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스도교도인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은 자신이 조직한 상제회(上帝會, 옥황상제의 ‘상제’인데, 그리스도를 상제라고 표현한 것이다)가 관헌의 탄압을 받자 1850년 광시 성에서 봉기했다. 반란 세력은 민중의 전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배만반청(排滿反淸)의 구호를 드높이 외쳤다. 침략하는 서구 열강보다 청 조정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구호가 먹힌 탓인지, 정부의 힘이 약한 탓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금세 세력을 크게 떨쳐 난징을 점령하고 1853년에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수립했다.
태평천국은 그 이름에 걸맞게 이상적이고 이념적인 국가를 지향했다. 신분 차별을 철폐하자는 것까지는 여느 반란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요구였으나, 금욕적인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고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 점에서 태평천국운동은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19세기 초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이념을 연상시키지만, 실은 중국적 전통도 강했다. 특히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느님의 소유)한 다음 각 지방의 토지를 아홉 개로 나누어 경작자들이 똑같이 경작하도록 한 이른바 천조전무제(天朝田畝制)는, 전국을 장악하지 못한 탓에 끝내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으나 수천 년 전 주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원용한 것이었다. 그 밖에 행정제도에서도 주의 예법을 모방한 게 많았다. 역시 주나라는 중국 한인들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이었다.
▲ 반란인가, 건국인가 청 조정은 내부의 반란마저도 제압할 힘이 없었다. 한족의 왕조를 꿈꾼 태평천국군은 신을 뜻하는 노란색 기치를 내세우고 붉은색 군복을 입었는데, 한 말기의 황건과 명 말기의 홍건을 합친 의미일지도 모른다. 40년 뒤 조선의 동학농민군도 태평천국군처럼 외세 배척을 내세웠다가 부패한 정부가 외국군을 끌어들임으로써 외세에 의해 진압되는 비운을 겪었다.
수백 년 만의 한족 정권인 탓일까? 태평천국의 기세는 초기에 엄청났다. 난징을 수도로 삼고 태평천국은 서쪽과 북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는데, 순식간에 강남 일대의 16개 성(省)과 무려 6000여개의 성(城)을 수중에 넣었다. 그들의 주력은 빈농과 유랑민의 기층 민중이었던 데다 무능한 만주족 정부에 커다란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이미 팔기군(八旗軍)이 무력해진 청 조정은 각 지방마다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대응하라고 명했다. 심지어 조정은 자치군에 관직과 군비 징수권까지 부여했다【이 조치는 훗날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역사적 결과를 낳았다. 역대 한족 왕조들을 위협한 지방의 번진들이 청대에는 성장하지 못했는데, 그 조치로 인해 부활한 것이다.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이 끝나고서도 군대를 해체하지 않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앙 정치에 일일이 간섭하게 된다. 20세기에 그 번진들은 북양군벌(北洋軍閥)로 발전해 청 제국이 무너지고 난 뒤에 군벌 정치 시대를 연다】.
이쯤 되면 사실상 제국은 와해된 상태였다. 온갖 수단을 다해도 기세 좋게 밀고 오는 태평천국군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실제 임자는 청이 아니라 서구 열강이라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제 임자가 나설 차례였다.
태평천국운동 초창기에 서구 열강은 간섭하기는커녕 중립적이거나 오히려 반란군에게 우호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태평천국은 서구의 그리스도교적 이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데다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군대의 사기도 드높아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난징 조약 체결 이후에도 청 조정이 조약을 성실하게 이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강은 공격하는 한족과 수비하는 만주족 중 누가 이길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원하는 것을 다 얻자 열강의 태도가 달라졌다. 더 이상 중립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나라 일에 직접 군대를 내기는 거북하다. 그래서 열강은 직접 나서지 않는 대신 청 조정을 위해 특수부대를 편성해주었다. 서양 무기로 무장시키고 서양식 훈련을 실시하고 서양인을 지휘관으로 하는 부대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짧은 기간에 조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기에서 워낙 우세했으므로 가는 곳마다 태평천국군에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별명이 늘 이기는 군대, 즉 ‘상승군(常勝軍)’일 정도였다. 이 상승군과 더불어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기타 군벌의 군대들이 합세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마침내 1864년 난징이 함락되면서 길었던 태평천국운동은 종식되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