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푸이
서양의 문물을 본받으려는 자구책(양무운동과 변법)이나 서양의 것을 배척하려는 자구책(의화단운동)이나 다 실패했다. 이제 중국에는 남은 카드가 없다. 마지막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양자를 절충하는 것뿐이다. 서태후 보수파 정권은 ‘신정(新政)’이라는 이름으로 뒤늦은 변법에 착수했다.
신정의 목표는 명백했고, 그래서 그 과정도 뻔했다. 우선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서양식 군관 학교를 세웠다. 근대식 상업을 육성하기 위해 상부(商部)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그리고 교육제도를 개혁해 서양식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으로 수 문제가 만든 이래 1400년간이나 관리 임용 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던 과거제(科擧制)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통치 능력을 상실한 정부가 하는 개혁이 효과를 볼 리 없었다. 신정이 별무신통이자 서태후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그것은 입헌군주제의 도입이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강국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었다. 10년 전 일본에 패한 청은 새삼 일본의 힘에 감탄했다. 일본은 전통적인 전제군주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이겼다. 이건 입헌군주제가 전제군주제를 이겼다는 뜻이다. 적어도 청 조정은 이렇게 해석했다. 입헌군주제가 시대적 추세라고 여긴 서태후 정권은 서둘러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만들고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형식만 갖춘다고 해서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제정, 그것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정이 하루아침에 공화정으로 바뀔 수는 없었다. 설령 서태후 정권보다 유능한 정부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혁명을 낳은 봉기 우창 봉기로 마침내 중국 최후의 제국인 청이 무너졌다. 사진은 봉기를 성공시킨 다음 날 혁명당원들의 모습이다. 이날 그들은 호북군정부를 세웠는데, 이것은 간이 정부이기는 하지만 중국 역사상 최초로 왕정이나 제정을 채택하지 않은 정부였다.
사태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과거제(科擧制)가 없어지자 학생들은 새로 도입한 중국의 학교 제도를 외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밖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조국의 실상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도쿄의 중국 유학생들은 정부에 의한 어떠한 개혁도 무용하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점차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도쿄에서 잡지를 창간하고 학교를 세우면서 조직을 이루기 시작했다. 1905년 중국동맹회라는 통합 조직이 생겨 났는데, 그 대표는 쑨원(孫文, 1866~1925)이었다. 동맹회는 중화민국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정하고 삼민주의라는 강령도 채택했다.
한편 중국 내부에서도 혁명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혁명은 지식인들만의 구호가 아니었다. 몇 차례 봉기가 실패한 뒤 1910년 10월 10일, 드디어 양쯔 강 남안의 우창에서 지식인과 군대가 연합해 봉기를 성공시키고 중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중화민국 군정을 수립했다. 훗날 이 사건은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기록되었으며, 거사가 벌어진 10월 10일은 ‘쌍십절(雙十節)’이라는 이름의 건국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우창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즉시 전국으로 퍼져나가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사태가 잇달았다.
▲ 명의 태조 주원장을 참배하는 쑨원 2000년에 걸친 제국 체제를 타도했는데도 새 중국 정부가 돌아갈 곳은 ‘한족 제국’이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성공시킨 쑨원이 명 태조 주원장의 묘소를 참배하는 장면이다.
이 소식을 들은 쑨원은 서둘러 귀국했다. 1912년 1월 1일을 기해 그는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수도는 난징으로 정해졌고, 쑨원이 임시 대총통을 맡았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제국 정부와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꼴이 되자 청 조정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맡겨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그 기회를 이용해 오히려 쑨원 측과 협상에 나섰다. 정치적 욕심보다는 조국에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을 우선시한 쑨원은 선뜻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의했다.
쑨원과의 약속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거꾸로 청 황실을 정리하기 위한 해결사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 생겨난 중화민국 정부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압력에 굴복해 어린 황제 선통제(宣統帝, 1906~1967)는 황실 우대를 조건으로 1912년 재위 4년 만에 퇴위했다. 그가 바로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푸이(溥儀)다(그는 ‘현역’ 신분으로 제위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선통이라는 연호 이외에 묘호는 없다). 이로써 청 제국은 297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으며, 동시에 진시황(秦始皇)이 대륙을 통일한 이래 2133년 동안 지속된 중국의 제국 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 마지막 황제 푸이 푸이는 1908년 서태후의 유언에 따라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가 1912년 여섯 살에 폐위된 비운의 황제였다. 즉위식장에서 지루함을 못 견딘 푸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의 아버지 순친왕(醇親王)은 “울지 마라, 곧 끝난단다.”라고 다독였는데, 그의 말처럼 푸이의 재위는 몇 년 안 가 끝나버렸다. 이후 푸이는 군벌과 일본의 손에 의해 여러 차례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하다가 196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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