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만의 재도전
내부의 저항을 진압한 일본 정부는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노골적으로 바깥을 향해 아(亞)제국주의 군국주의 노선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차 목표는 일찍부터 노리던 한반도였다.
없는 계기라도 만들어야 할 판에, 때마침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발생했다. 개화파인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은 김옥균을 지원해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나 정변은 사흘 만에 수구파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은 오히려 쿠데타가 성공한 것보다 상황을 더욱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소득을 얻었다. 하나는 일본 공사관이 습격을 당했다는 훌륭한 ‘전과’이고, 다른 하나는 청의 군대가 수구파를 지원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이 두 가지 변수를 기민하게 활용한다.
공사관이 습격을 당했다는 것을 빌미로 일본은 군대를 서울에 파견하고 조선 정부에 사죄와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물론 당장의 실익보다는 조선에서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는 이득이 더 크다. 또 청군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직접 중국에 가서 톈진조약을 맺었다(이 조약은 1857년 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열강과 중국이 체결한 톈진 조약과는 다르다). 어차피 조선을 침략하려면 조선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청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톈진 조약은 그것을 위한 포석이었다. 세 조항으로 이루어진 톈진 조약의 마지막 조항에서 청과 일본 양국은 이후 조선에 출병할 때 상호 통지할 것을 약속했다. 이것은 이미 두 나라가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기로 합의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후 이 조항은 일본의 구상대로 조선을 놓고 양국이 승부를 벌이는 데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일본은 내부의 반발을 진압하고 새 정부의 기틀을 다지느라 분주한 가운데서도 철저하고 집요하게 조선 침략을 준비했다. 그것은 일단 제국주의 노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과는 크게 달랐다. 서구의 경우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상품 시장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한 탓에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섰으나, 국가 주도의 인위적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를 이룬 일본은 ‘식민지’의 개념부터 달랐다. 사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과 통상을 개시한 이래 무역 성적표를 보면, 조선은 일본 상품의 수출 시장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1890년경 일본의 대조선 수출량은 일본 수출 총액의 2퍼센트도 되지 못했다. 더구나 수출 품목도 일본의 기계공업 제품이 아니라 수공업과 집 안 공업에서 생산되는 잡화에 불과했다. 심지어 영국에서 수입한 면제품을 조선으로 재수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 도망가는 공사관 1882년 조선에서 일본이 주도한 군대 개혁에 반대해 구식 군대가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일본 공사관 일행이 인천 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멀리 커다란 일장기가 보인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더욱 강화했다.
일본이 조선 침략을 계획한 경제적 이유는 시장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쌀과 금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단순히 무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통째로 소유해야만 가능했다. 따라서 일본의 침략은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처럼 경제적 측면에만 국한될 수 없었던 것이다.
7장에서 보았듯이, 서구 열강(특히 독일)도 처음에는 중국을 영토 분할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으나 실현 불가능함을 깨닫고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볼 때 조선은 영토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지역이 아니었다. 다만 수백 년 동안 한반도의 정치ㆍ외교ㆍ군사를 장악하고 지휘한 중국만이 걸림돌일 뿐이었다(일본은 300년 전 임진왜란壬辰倭亂도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성공했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청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으나, 당시 청은 오로지 서구 열강만을 경계할 뿐 일본은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하기야 30년 동안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키운 군사력이 있었으니 알았다 해도 걱정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전쟁이 터지는 데는 안팎의 사정이 연관되었다. 바쿠후 시절 서구 열강(주로 영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선하는 작업이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로, 1894년 5월 31일 제국의회에서는 정부 불신임안을 가결했다. 의결권이 제한된 제국의회였으나 정치 무대에서 반정부 세력이 득세한다는 것은 정부 측에 결코 유리할 리 없었다. 메이지 정부가 발족한 이래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다. 그러나 안의 위기를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적인 장기다.
궁지에 몰린 메이지 정부가 타개책을 찾아내는 데는 불과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에서 정부 불신임안이 가결된 바로 그날(5월 31일)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고, 조선의 민씨 정권은 즉각 청에 출병을 요청했다【지금의 관념으로 보면, 자국민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외국에 군대를 요청한 것은 지탄받아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 정부로서는 외국군을 끌어들인다는 생각이 거의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은 스스로 중국에 사대했을 뿐 아니라 외교와 군사의 권리를 의탁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지방 현감이 자기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 정부에 군대를 요청한다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청도 그런 생각이었기에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고 별다른 긴장감 없이 조선에 파병했을 것이다】. 10년 전에 맺어둔 톈진조약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을까? 한성발 급전을 들은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하늘이 도운 것이라며 기뻐했다.
신속과 일사불란함이 장점인 메이지 정부는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했다. 이틀 만에 의회를 해산하는 동시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먼저 조선으로부터 파병을 요청받은 청의 군대가 아산에 상륙한 날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신속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청군이 전주에 가까운 아산에 상륙한 반면 일본군이 한성에 가까운 인천에 상륙했다는 사실은 이 상황을 보는 양국의 시각을 말해준다. 청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충실히 따른 것이지만 일본은 사태와 무관하게 한성을 공략하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이다.
▲ 압송되는 전봉준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고 있다. 그는 농민 반란을 주도했으면서도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으나 조선 정부의 무능으로 그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1895년에 그는 그 무능한 정부의 손에 처형되었다.
외국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을 들은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서둘러 6월 10일에 조선 정부와 화의를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조선 정부도 그제야 사태의 위중함을 깨닫고 두 나라 군대의 철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끝낼 거라면 애초에 군대를 보내지도 않았다. ‘진압 대상’이 사라지자 일본은 숨긴 의도를 드러냈다. 두 달 가까이 동학 잔당을 없앤다며 부산을 떨던 일본군은 7월 하순에 느닷없이 조선의 왕궁에 침입해 민씨 정권을 제거하고 대원군을 다시 옹립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동학 농민군은 재차 봉기에 나섰으니, 일본군은 반란 진압을 구실로 왔다가 반란을 더욱 키운 셈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이미 겉으로 내보인 발톱을 도로 감출 수 없는 입장이었다. 대원군을 옹립한 지 이틀 만에 일본의 해군과 육군은 황해상에 있는 청의 함대와 아산에 주둔 중인 청의 육군을 기습했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우리는 청일전쟁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일청전쟁이라고 부른다. 뒤에 나오는 러일전쟁 역시 일본에서는 일러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의 명칭에마저 자국의 이름을 앞세우는 일본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영어명은 각각 Sino-Japanese War(청일전쟁)와 Russo-Japanese War(러일전쟁)다. 전쟁의 명칭에서는 침략국을 앞에 쓴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관되게 지켜지는 원칙은 없다】이 발발했는데, 으레 그렇듯이 일본은 선제공격을 가하고 사흘 뒤에야 정식 선전포고를 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300년 만에 일본과 중국은 다시 대회전을 벌이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본의 패배였다면 이번은 설욕전이 될 테고, 그때가 무승부였다면 이번은 결승전이 될 터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번에도 전장이 조선이라는 점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말처럼 전쟁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이홍장이 각별히 공을 들인 청의 육군과 해군은 일본의 기민한 공격 앞에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개전 후 두 달이 채 못 되어 일본군은 평양에서 청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청군을 조선에서 완전히 몰아냈으며, 황해의 해전에서도 청의 주력 함대를 궤멸시켰다. 곧바로 랴오둥에 상륙한 일본군이 뤼순(旅順)을 접수하고 산둥 반도까지 밀고 내려가자 청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300년 전에는 10년 가까이나 전쟁을 벌이고도 이기지 못했지만, 이순신이 없는 이번 전쟁에서 일본은 불과 6개월 만에 완승을 거두었다.
1895년 청은 시모노세키에서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이번에는 서구 열강이 아니라 일본이 조약의 상대였다. 반면 일본은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을 제압한 데 이어 청마저 굴복시켜 서구 제국주의에 못지않은 ‘동양 제국주의’로 떠올랐다.
조약에서는 그동안 서구 열강이 중국과 체결한 각종 불평등조약의 내용들이 망라되고 모방되었다. 청은 일본에 랴오둥 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일본이 받은 배상금은 3억 엔이었는데, 일본의 실제 전쟁 비용은 전부 합쳐 2억 47만 엔이었다). 물론 최혜국 대우 조항도 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조약의 1항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1919년 독립선언서의 첫 대목을 연상시키는 이 조항이 삽입됨으로써 일본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차 포석을 마쳤다.
▲ 청일전쟁 일본 측의 그림에 묘사된 청일전쟁. 전쟁을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일본은 부패하고 무능한 청나라에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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