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동양식 제국주의의 결론
‘군부’라는 개념
강대국인 청과 러시아를 상대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자 일본 정치에서 군대의 지위는 더없이 확고해졌다. 이제 군은 행정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렸으며, 정부의 대내외 주요 정책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영향력과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군은 향후 일본의 최종 목표를 중국 정복으로 정했다.
조선을 병합하고 나서부터는 ‘군부(軍部)’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군대가 아닌 군부라는 말은 군이 정부에 못지 않은, 아니 그 이상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더구나 군부라는 말은 군 내부에서 만들어 사용한 것이므로, 이미 군 자체가 스스로 정치 세력으로 탈바꿈했음을 나타낸다. 19세기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영국 제국주의를 뒷받침한 것도 막강한 해군력이었으나 군대가 대외 정책의 결정에 나선 적은 없었다. 이제 일본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정치’, 바로 ‘일본식 제국주의’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군국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전쟁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이다. 세계대전의 전야인 20세기 초의 세계정세로 보면 군국주의가 가장 그럴듯한 노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선 이웃 나라들에 커다란 위협이었고, 해당 국가 자체에도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았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터져 나온 한발의 총성은 멀리 동북아시아에 있는 군국주의의 후각에도 즉각 포착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 제국주의 열강과 영국과 프랑스 등 선발 제국주의 열강이 맞붙은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무대로 벌어졌으므로 원래는 일본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후발 제국주의에 속하는 일본은 ‘색깔’로 보면 당연히 독일의 동맹국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의 무대는 유럽이 아니라 동북아시아니 색깔보다 당장의 이득이 중요하다. 일본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천우신조‘라고 표현하면서 즉각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회에 “동양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확립하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 지위를 쟁취한다.”라는 게 일본의 계획이었다. 19세기 이후 일본은 어느 전쟁에서도 패한 적이 없었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 참여하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 세계대전의 방아쇠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저격한 직후 범인인 세르비아 청년(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체포되는 장면이다. 이 한 발의 총성이 계기가 되어 한 달 뒤에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생사가 걸려 있지도 않았고 당사자도 아니었다. 그런 여유에서 일본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와 달리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일본이 국제전에서 선전포고를 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유일하다). 참전의 명분은 영일동맹이었다. 영국과 일본 중 한 측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다른 측이 지원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영국은 일본의 참전에 난색을 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억지로 참전한 것이니, 영일동맹은 그야말로 구실일 따름이었다. 어부지리(漁父之利)를 꾀하려는 일본의 의도는 누가 보아도 뻔했지만 연합국 측은 이미 참전하기로 했으니 유럽으로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 요구를 거부하고 동양에서 ‘제 역할’을 찾았다. 그것은 독일이 진출해 있던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 해군은 남태평양 일대의 독일령 섬들을 차례차례 점령했다(독일은 뒤늦게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선 탓에 작은 섬들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독일에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동양에서 연합국 측에 할 수 있는 지원은 한 셈이었다. 지원이라기보다는 잇속 차리기였지만.
그나마 일본 육군이 중국 내의 독일 조차지인 산둥의 독일군 요새를 격파한 것은 연합국 측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일본이 전쟁에서 한 일은 유럽 전선에서 피 흘리고 있는 연합국들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산둥을 점령할 때는 러일전쟁 직후 남만주철도를 경영한다는 명분으로 만주에 주둔시킨 군대가 큰 몫을 했다(이들이 이후 악명 높은 관동군으로 편제된다)【러일전쟁으로 만주의 통제권을 확보한 일본은 1906년 만주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 만주 경영에 나섰다. 해외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국책회사를 앞세우는 방식은 그리 낯설지 않다. 영국이 동양 진출을 위해 설립한 동인도회사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합병한 이후 조선 경영을 위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도 마찬가지로 국책주식회사였다(불행하게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 땅에 세워진 최초의 주식회사로 기록에 남았다)】.
▲ 최초의 패배 일본은 이제 대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한 제국주의 열강의 자격을 얻었다. 그 자격으로 참여한 게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간섭전쟁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본은 19세기 이래 국제전 사상 최초의 패배를 당한다. 사진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행진하는 일본군이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산둥의 점령으로 일본은 동양에서 더 이상 전쟁에 기여할 일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바라던 목표도 이루었다. 그래서 일본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독일 세력을 몰아낸 뒤에도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병력을 증원했다. 이 무력을 바탕으로, 유럽에서는 여전히 포성이 한창이던 1915년에 일본은 중국의 실권자인 위안스카이에게 21개 조의 요구를 강요했다. 그 내용은 산둥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권리를 일본이 대신 차지하고, 남만주와 몽골, 중국 연안 일대를 일본이 관리하며, 중국 내 탄광 개발과 중국의 치안에 일본이 관여하겠다는 것이었다.결국 일본이 세계대전이라는 ‘피의 제사’에 참여한 이유는 이 잿밥을 먹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왕성한 식욕은 잿밥으로 달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치달을 무렵 러시아에서는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연합국들로서는 세계대전 이외에도 또 한 가지 과제가 생긴 셈이었다. 과연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마자 연합국 측은 즉각 대소간섭전쟁에 나섰다.
다시 전쟁이라니, 전쟁을 통해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일본은 이 기회에 동부 시베리아까지 손에 넣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맨 먼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속속 러시아에서 발을 빼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시베리아 경영의 꿈을 포기하지 않다가 가장 늦게, 가장 비참한 상태로 1925년에 시베리아에서 철병했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외 전쟁에서 기록한 최초의 패배였다【역사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한 나라치고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대표적인 예로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1941년 히틀러의 독일은 둘 다 당대 유럽의 군사 강국이었으나 겨울에 러시아를 공략했다가 결정타를 맞았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도 무대가 동북아시아였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 여러 가지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우선 중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얻었고, 전쟁 덕분에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세계대전은 패전국만이 아니라 승전국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므로 연합국 측에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별로 받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미국밖에 없었다(둘 다 전장인 유럽에서 멀리 있는 덕분이다). 전쟁 중에 일본은 산업과 무역이 크게 성장해 종전 후에는 자본 수입국에서 자본 수출국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또 한 가지 커다란 소득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크게 상승한 것이었다. 종전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주창으로 결성된 국제연맹에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당당히 이사국으로 참여해 세계 5대 강국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행사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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