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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통일의 바람 - 1장 역전되는 역사,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양원왕, 평원왕, 온달)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1장 역전되는 역사,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양원왕, 평원왕, 온달)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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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

 

 

6세기 중반 한반도에 신문이 있었다면 남부일보의 톱기사는 단연 나제동맹(羅濟同盟)의 파괴와 백제 성왕(聖王)의 죽음, 신라의 한강 하류 점령이었겠지만, 북부의 경우는 달랐을 것이다. 장수왕(長壽王) 시대부터 거의 매년 북위에 조공해 왔던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북위가 534년에 동서로 분열된 소식이 일면 톱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150년 동안 중국 화북의 패자로 군림했던 북위가 사라진 것은 곧 향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크게 변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북위는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 동위와 서위로 분리되었지만 더 이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축으로 역할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동위는 곧 북제로 명패를 바꾸었다가(이 때문에 남조의 제를 남제라고 부르게 된다) 서위에게 멸망되었고 서위도 얼마 못 가 557년에 북주로 바뀌었다. 또한 같은 해에 남조의 양나라도 무너지고 진()이 들어섰으나 건국자인 진패선(陳覇先)이 하급 무장의 신분이었던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안정적이고 오래갈 만한 왕조로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고구려의 현실 인식이다. 바야흐로 중국 대륙 전체가 다시금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으나 고구려 왕실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북위에게서 랴오둥 소유를 공인받은 이래 고구려는 대중국 관계에서는 오로지 조공으로 일관하면서 한반도 문제에만 신경 썼을 뿐이다. 조공의 대상이 사라지자 고구려는 한 순간 긴장했으나 곧 동위, 북제, 북주에게 차례로 조공하기 시작했고 남조의 양과 진에게도 마찬가지로 조공과 책봉을 교환했다. 결국 고구려는 이미 사라져 버린 기존의 질서에만 집착하면서 대륙의 정세 변화를 무시하려 애쓴 것이다.

 

차라리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의 패자라도 되었더라면 고구려의 느슨한 현실 인식은 면죄부라도 받았으리라. 그러나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백제와 신라가 부쩍 커버린 지금에는 그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수왕을 뒤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492~519)부터 안장왕,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수시로 백제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매번 됐다 싶을 때마다 끼어드는 신라 때문에 나제동맹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면서 물러나야 했다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는 늘 직접 타깃이 아니었지만, 설사 그럴 마음이 있다해도 신라를 직접 공격하는 루트는 강원도의 험한 지세 때문에 대규모 병력 이동이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신라가 훗날 고구려, 백제를 제치고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른 데는 지형적 요건도 중요하게 작용한 셈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초기 신라는 오히려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접하지 못하고 문명의 오지에 머물러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바로 그런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즉 신라는 고구려의 최전성기였던 광개토왕(廣開土王) - 장수왕(長壽王) 시대에 존망의 고비를 넘기면서부터는 장밋빛 미래가 약속되어 있었던 셈이다. 물론 진흥왕(眞興王)의 영악한 행위는 그 미래를 앞당긴 결과를 낳았지만.

 

그렇다면 553년 나제동맹이 깨졌을 때 당연히 고구려는 찬스라고 여겼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백제와 신라가 성장했다 해도 11 대결이라면 충분히 각개격파할 수 있다. 더구나 554년에는 신라의 한강 하류 주둔군이 관산성으로 내려가 백제와 대가야를 맞아 싸우고 있었으니 그 참에 고구려가 한강 하류를 탈환하려 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 찬스가 순수한 가정으로만 남은 이유는 당시 고구려의 사정 때문이다. 장차 중국 대륙에 격변이 있을 것임을 하늘이 고구려에 예고해 주기라도 하듯이 북위가 멸망하던 바로 그 시기에 고구려에는 홍수와 지진, 전염병, 태풍, 가뭄, 기근 등이 차례로 덮치며 전국을 재앙에 가까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안원왕 말기에는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귀족들이 치열한 파워게임을 벌이기까지 한다. 두 왕비의 소생을 둘러싸고 귀족 세력이 추군과 세군의 두 파로 나뉘어 무력 충돌까지 빚었으니 나라 밖의 정세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런 상황에서 추군 귀족의 지원으로 545년에 어렵사리 양원왕(陽原王, 재위 545~559)이 즉위했으니 당연히 귀족들의 입김이 거세어지고 왕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신라에게 강원도 일대의 10개 군을 빼앗긴 것은 바로 그런 내부 문제 때문이다당시 신라군의 사령관이었던 거칠부는 젊은 시절 승복을 입고 고구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냉전시대의 용어로 말하면 간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는 혜량이라는 고구려 승려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밀약을 맺었다. 장차 거칠부가 고구려를 공격할 경우 혜량은 그에 호응하는 대신 일신의 안위를 약속받았으니,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주역인 이완용의 까마득한 선배에 해당한다. 강원도를 정복한 거칠부가 혜량을 다시 만나 제자의 예를 올리자 혜랑은 지금 우리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워 곧 망할 것 같으니 나를 신라로 데려가달라고 말한다. 비록 매국노의 눈치 빠른 판단이지만 혜량의 그 말은 당시 고구려의 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게다가 551년부터는 북부의 돌궐이 신흥 세력으로 등장해서 고구려 북변을 침공하기 시작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양원왕은 백제 성왕(聖王)이 죽은 것을 알고 뒤늦게 소규모 병력을 배에 실어보내 웅천(지금의 안성 부근)을 공략하지만 뭍의 지원군이 올 수 없는 상황에서 엉성한 상륙작전이 성공할 리 없다.

 

밖에서 죄어오고 안에서 곪아가는 고구려의 내외 사정은 양원왕 다음에 즉위한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때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무렵부터 다시 남진의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느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때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장수왕(長壽王) 시대와는 다른 이유에서다. 그 시대에 남진은 영토 확장을 위한 선택과목이었으나 이제는 생존을 위한 필수과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륙의 정세가 워낙 급속히 바뀌는 탓으로 고구려는 지속적인 조공 외교를 맺을 중국의 적절한 왕조를 찾기에도 바쁠 지경이다. 아마 이 무렵 평원왕은 장차 랴오둥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살아남는 길은 오로지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는 것 밖에는 없다. 일단 평원왕은 북조의 북주와 더불어 남조의 신흥 제국인 진나라에 조공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외교라기보다는 관행에 불과하다. 오히려 북주는 고구려에게 랴오둥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면서 무력 침공까지 해온다. 이래저래 고구려는 한반도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처지다.

 

586년 장안성(長安城,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심기일전의 계기다(그 이전의 평양성은 오늘날 평양의 북변 외곽에 자리잡았으나 이때부터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 되었다). 그런 왕의 심정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신하들보다 사위였다. 평강공주의 탁월한 안목으로 바보 거지에서 일약 용맹스런 부마가 된 온달(溫達)은 북주의 공략에서도 빛나는 전과를 세워 대형(大兄)이라는 벼슬까지 받았다. 출신의 비천함을 만회하려는 노력에서였을까? 사냥 솜씨만큼 전장에서도 자신있다는 심정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스승이자 아내인 평강공주에게 보은하려는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온달은 590년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하류를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노라는 각오를 다지며 남진에 나선다.

 

그러나 고구려 병사들은 이미 최근 50년 동안 별다른 전과를 올려본 적이 없는 약졸들로 전락해 있다. 용맹한 장수와 나약한 병졸은 전쟁에 임하는 최악의 조합이다. 결국 온달은 지금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을 공략하던 중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마침 그 해에 평원왕도 죽자 이후 고구려는 다시금 남진을 획책하지 못하게 된다.

 

 

사람 잡는 아차산 아차산을 위험 지역으로 본 500년 전 비류는 과연 혜안이 있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죽은 곳도 이곳이고, 바보였다가 부마가 된 고구려의 장군 온달이 죽은 곳도 여기다(관산성에서 전사한 성왕(聖王)도 실은 이곳을 빼앗겼기에 죽은 셈이다). 사진은 서울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성이다. 한강을 굽어보는 이 산성을 점령하면 최소한 한강 이북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극히 중요한 요처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밀월의 끝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

대륙 통일의 먹구름

고구려의 육탄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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