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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통일의 바람 - 1장 역전되는 역사, 대륙 통일의 먹구름(수나라 등장)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1장 역전되는 역사, 대륙 통일의 먹구름(수나라 등장)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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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 통일의 먹구름

 

 

사위가 남부 전선에서 고군분투할 즈음 평원왕은 서쪽에서 들려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중국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소식이다. 북주의 외척이었던 양견(楊堅)이라는 자가 제위를 찬탈하고 새로 수()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이미 9년 전에 들은 바 있었고, 그때 평원왕은 즉각 수 문제(文帝)가 된 양견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과 책봉을 교환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수 문제가 진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워낙 대륙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수나라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왕조려니 생각했었다. 당시 대륙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50년이 채 못 되었고 북주 같은 경우는 그 절반도 못 되었으니 이번엔 또 얼마나 갈까 싶은 게 평원왕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달랐다. 북주가 간신히 통일해놓은 화북을 꿀꺽 집어삼키더니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곧바로 강남까지 노리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589년에 양견은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진을 정복하고 오랜 남북조시대를 종식시켰다. 220년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무려 369년 만에 천하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평원왕(平原王)으로서는 그동안 수나라에 형식적인 조공으로 체면치레만을 해온 게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병기를 수리하고 군량을 비축하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시작했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답게 수 문제는 눈치도 빠른 위인이었다. 그는 즉각 평원왕에게 사신을 보내 입으로는 중국을 받든다면서 행동으로는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하며 함부로 처신하면 고구려 국왕을 폐위하고 자기 측근을 왕으로 보내겠다고 노골적으로 을러댄다. 형식적으로 고구려 왕이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중국 황제가 고구려의 왕을 바꾸려는 시도는 전에도 없었고 실제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남부의 전황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평원왕은 그만 기 싸움에서부터 밀려 버렸다. 그는 결국 사과의 답신을 준비하던 도중에 죽었는데, 실은 서신을 보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미 수 문제는 고구려의 랴오둥 소유를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고구려를 정벌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었으니까.

 

사실 중국은 분열시대가 워낙 오래 지속되었던 탓에, 한편으로는 오래 전부터 통일이 예고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항아리 속에 있으면서 항아리의 모양을 알기는 어렵다.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수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루었을 때도 아마 당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통일이 오래 가리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남중국과 북중국이 합쳐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나 특별한 후각을 지닌 정세분석가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러다가 곧 다시 남북으로 나뉘겠거니 여겼을 것이다.

 

 

 

 

아마 남중국의 왕조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그런 예상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족 왕조들이 꾸려 온 남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남북조시대 내내 물리력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족들이 세운 호전적인 북중국의 왕조들은 북위가 지배하던 안정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따라서 새 통일제국인 수나라가 북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 정치적 통일이 예상 외로 강력하리라는 점을 말해주는 하나의 증거였다그 가운데서 남조의 왕조들은 후대에 육조(六朝) 르네상스라 불리는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었다(, 동진, , , , 진 등 남조의 여섯 왕조를 육조라고 부른다). 화가 도연명(陶淵明), 고개지, 서예가 왕희지 등이 바로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다. 반면 북조의 왕조들은 시대적 필요에 따라 균전제(均田制)과거제(科擧制) 등 사회 제도를 만들었으니 분열시대에 남중국과 북중국은 마치 분업처럼 각기 중국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중국 역사는 분열기에 성장ㆍ발전하고 통일기에 안정ㆍ퇴조하는 현상을 반복한다.

 

게다가 한반도 왕조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북중국이 통일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기도 했다. 지난번의 통일제국인 한나라, 그리고 분열시대 초기의 위나라는 모두 화북을 중심으로 하는 왕조였다(사실 중국은 늘 화북에 정치적 중심을 두고 강남을 경제적 중심으로 삼는 게 기본 공식이다. 이 점에서는 오늘날의 중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고조선과 고구려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제 수나라가 어떻게 나올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런 걸 가리켜 바로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한나라가 진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했을 때 한반도 북부에는 한의 군현이 설치되었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목 안의 가시 같은 4을 제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마침내 끝났나 싶었을 때 한나라가 멸망했고 이어 화북은 위나라가 장악했다. 고구려는 다시 위나라의 변방 다지기에 주요 타깃이 되어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했다. 이후 중국에 남북조시대가 시작되면서 고구려는 한편으로는 힘을 바탕으로 화북 왕조들과 맞싸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랴오둥까지만 진출하겠다는 약속을 바탕으로 조공 외교를 벌였다. 그 약속을 받아들인 게 바로 북위였으며, 북위가 화북을 지배하는 동안 고구려는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북위는 강남까지 아우르지 못한 반쪽 제국이라는 결함을 지닌 탓에 고구려와 타협해야 했고, 고구려는 어차피 중원을 목표로 하는 중국형 왕조가 아니었으므로 서열을 인정하는 선에서 북위와 타협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렇게 보면 고구려의 평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가 언제든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설 경우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필연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한반도의 삼국이 서로 다투면서도 성장과 번영과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수 문제의 대륙 통일이 곧바로 한반도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원왕(平原王)은 죽으면서 답신을 보내지 못한 것을 무척 걱정했겠지만 그 답신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통일 천자 비록 길기는 했으나 중국의 분열은 결국 새로운 통일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무려 400년 가까이 지나서 다시 대륙 통일을 이룬 수 문제 양견(楊堅)의 모습이다. 그림에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그는 오랑캐로 취급되는 선비족의 혈통이었고, 북주의 외척으로 권세를 휘두르던 소인배였다. 중국이 통일되면서 한반도 삼국이 그간 누려왔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자기들끼리의 다툼은 끝나게 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밀월의 끝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

대륙 통일의 먹구름

고구려의 육탄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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