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창조
문화군주 세종의 풍모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업적은 바로 한글을 창제한 것이다. 숱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오늘날 화폐의 주인공이 되는 영예까지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1446년 9월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발표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문자 시대’의 문을 연다.
물론 한글이 없었을 때는 한자를 썼다. 또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고유의 말은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썼다(향가에서처럼 순수하게 한자의 음만을 빌려 문장 전체를 표기한 것을 향찰鄕札이라고 부르지만 이두와 같은 원리이므로 이두에 포함시키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말은 전통적인 우리말을 쓰되 글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 쓴 셈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알다시피 언어학적으로도 우리말은 교착어(膠着語)이고 중국어는 굴절어(屈折語)다(쉽게 말해 교착어는 어근에 접두사나 접미사 같은 게 자유롭게 붙어서 이루어지는 말이며, 굴절어는 각 낱말들의 의미가 고정되고 분리된 성격이 강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 보니 문법에서도 차이가 있거니와 무엇보다 글을 통해 완벽한 의사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였다.
그래서 세종은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최항(崔恒, 1409~74), 신숙주(申叔舟, 1417~75), 성삼문(成三問, 1418~56) 등의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우리말에 어울리는 문자 체계를 만들어내기로 결심한다. 바야흐로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 나라의 글을 창조한다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무릇 문자란 원래 그림에서 출발하여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림이 추상화되어 기호가 되고 그 기호가 최종적으로 정리된 결과로서 탄생하게 마련이다(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의 한자, 알파벳의 원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등이 모두 그렇다). 따라서 지배 집단이 일정한 기간 동안 작업해서 문자 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또 그 문자가 오늘날까지 쓰이는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다. 비록 일본의 가나(假名) 문자가 9세기에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이두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문자 기호가 기본적으로 한자를 단순화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게다가 ‘만든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한글만큼 완벽한 문자 창조라고는 볼 수 없다.
이 작업에서도 역시 세종의 개인적 역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43년에 그는 직접 28개의 문자 기호를 만들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루어지는 한글의 기본 체계를 고안해서 학자들에게 연구의 방침을 정해주었다(훈민정음이라는 용어도 이때 만들어졌다). 3년 뒤 학자들은 28개 기호의 음가를 확정하고 용례를 만들어 『훈민정음』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이것이 한글의 공식적 탄생인데, 이렇듯 ‘생년월일’이 명확한 문자 체계도 대단히 드물다【문자까지 인위적으로 창조하는 일이 가능했다는 것은 일찍부터 정치가 사회 전반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여러 민족이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거란문자는 한글처럼 요(遼)의 건국가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920년에 제정해서 공표한 문자였다. 또 몽골문자는 위구르문자에서 차용해서 만든 것인데, 한글이나 거란문자처럼 제정자가 확실하지는 않다. 이처럼 동아시아 민족들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문자가 아닌 ‘창조된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정치적인 오리엔테이션이 강한 동양 역사의 특성을 말해준다. 유럽의 문자들 중에는 어느 것도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개인(들)이 만든 게 없다】.
▲ 한자표기용 한글? 훈민정음의 첫 부분이다. 흔히 한글은 우리 문자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창제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원래는 한자의 발음기호를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한자가 도입된 삼국시대 초기 이래 1천 년이 넘게 지나면서 한자의 발음이 중국과 많이 달라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어와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훈민정음의 유명한 첫 구절은 바로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하지만 만들어 놓고도 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갓 태어난 훈민정음의 시운전은 집현전 학자들 중에서도 고참에 속하는 권제(權踶, 1387~1445)와 정인지, 안지(安止, 1377~1464)가 맡았다. 14세기에 출생한 노장파에 어울리게 1445년에 그들이 지은 최초의 한글 작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이성계의 조상들에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실의 인물들을 칭송한 시가다. 이듬해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68)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부처의 일생을 묘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었고, 여기에 세종은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직접 지어 화답한다. 이렇게 왕실과 사대부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한글은 그 해 말에 아전들을 뽑는 이과(吏科)의 과목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만약 그런 분위기가 지속되었더라면 한글은 아마 일찌감치 ‘조선의 국어’로 자리잡았을 것이며, 머잖아 공문서를 작성하는 데까지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얼마 못 가서 사장될 운명에 처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 주범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왕권을 누르고 정치 권력의 중심에 복귀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이다. 한자 문화에 경도된 그들이 조선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한글은 멸시되고 공식 문자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닫히게 된다【그 덕분에 지금 쓰는 ‘한글’이라는 이름도 실제 한글이 생겨난 지 400여 년이나 지나서야 탄생하게 된다. 처음 태어났을 때 ‘훈민정음’이라는 책 이름으로 불리던 한글은 나중에 언문(諺文)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언(諺)’은 ‘속된 말, 상스런 말’이라는 뜻이므로 한글은 처음부터 대단히 모욕스러운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최세진(崔世珍, ?~1542)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한글을 ‘반절(反切)’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것도 한글의 철자가 한자의 일부분이라는 뜻이므로 언문 못지 않게 치욕적인 이름이다(예를 들어 “동東의 음은 덕홍德紅切”이라고 하는데, ‘덕’의 초성 ‘ㄷ’을 따고, ‘홍’의 중성과 종성인 ‘ㅗ’, ‘ㅇ’을 따서 ‘동’자의 음을 표기한다는 뜻이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한글의 이름은 언문에서 국문으로 바뀌었다가 최초의 한글 전용주의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1914)에 의해 처음 ‘한글’로 불리게 된다】.
그나마 규방의 부녀자들이 아니었다면 한글은 전승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 때문에 한글은 한때 ‘암클’, 즉 여자들이나 쓰는 문자라는 이름까지 얻었지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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