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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꿈과 현실 사이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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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꿈과 현실 사이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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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 사이

 

 

그러나 이번 개혁의 범위는 국가 이념을 바로잡는 데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적 관념과 예식, 생활양식이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나,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가례의 예법이 일반 백성들의 가정에서까지 생활상의 원칙으로 지켜지게 된 것은 모두 이때부터다(이를테면 유교식 관혼상제라든가 과부의 재가가 금지된 것 등이 그런 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 사회에 관한 인상은 바로 그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정치와 행정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까지 겨냥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바로 향약(鄕約)의 보급이다. 1517년 조광조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조선 8도에 시행하게 함으로써 개혁의 바람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킨다. 향약이야 원래 중국 송나라 시대에 여씨 형제가 처음 도입한 제도지만, 300년 이상이나 지나서 새삼스럽게 조광조가 향약에 주목한 이유는 주희(朱熹)가 그것을 토대로 사회개혁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향약은 성리학 이념을 향촌 사회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勤), 나쁜 일은 서로 바로잡아주며(過失相規), 이웃끼리 서로 예의로써 대하며(禮俗相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 향약의 4대 강령인데, 취지 자체는 좋다. 다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어야 할 도덕을 관 주도의 캠페인으로 집행하려 한 것은 다분히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하는데, 400년 뒤까지도 정부 주도의 캠페인이 먹힌다면 역사의 심각한 퇴행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향약은 조광조(趙光祖)가 품은 개혁의 꿈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여기까지만 봐도 조광조의 개혁이 다소 급진적이라는 느낌은 충분하다. 사실 그는 급진성을 넘어 조급증까지 보였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정변 하나로 쉽게 바뀔 수 있어도 원래 문화나 생활의 영역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조선은 어차피 궁극적으로는 그가 꿈꾼 것처럼 완전한 유교왕국으로 진화하겠지만, 그 과정에 걸리는 기간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짧지 않으며, 그에 따르는 진통도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작지 않다. 그럼에도 조광조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대에 꿈이 현실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조광조도 자신의 개혁이 다소 급진적이라는 점은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급진적이라서 실행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반대파가 있기 때문에 급진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을 제거하면 개혁은 순조롭게 성공할 것이다. 반대파의 핵심은 어느새 새로운 훈구파가 되어 있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들이다. 그래서 조광조(趙光祖)는 다음 개혁 대상으로 그들을 낙점한다.

 

그렇잖아도 조광조의 거센 개혁 드라이브에 밀려 과연 누구를 위해 반정을 도모했는지를 회의하던 공신들은 예상치도 않았던 공격을 받는다. 1519년 조광조의 건의로 시행된 현량과(賢良科)가 그것이다. 국가를 위해 일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천거해서 관직에 등용시킨다는 현량과의 기본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사실 옳은 인재의 선발을 위해 과거제(科擧制) 보다 천거제를 중시한 것은 사림파의 전통이기도 했다. 그 문헌적 근거는 대학(大學)에 있다. 제가(齊家)와 치국(治國)보다 근본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수신(修身)에 철저한 인재를 뽑으려면 시험 방식의 과거를 통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언행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게 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다(‘지배 이념으로서의 유학과 철학으로서의 유학의 차이라고 할까?). 특히 조광조(趙光祖)주희(朱熹)의 철학을 정리한 소학(小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면서 관인이 되기 전에 수신부터 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니, 경전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짓는 인물을 관리로 선발하는 과거제가 그의 안중에 차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뼈가 지나치게 강하면 근육이 버텨내지 못하는 법, 아직 체력이 약한 개혁에 근육을 붙이려는 현량과(賢良科)는 결국 뼈를 부숴 버리는 결과를 빚고 만다. 추천제도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 쉽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광조는 현량과를 이용해서 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바 있던 박상(朴祥)김정(金淨)은 물론 김식(金湜, 1482 ~ 1520), 안처겸(安處謙, 1486 ~ 1521) 삼형제 등 소장파 성균관 유생들을 천거해서 요직에 임명한다. 조광조(趙光祖)의 관점에서는 물론 나라를 위해 일할 훌륭한 인재들이며 최소한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겠지만, 훈구대신들이 보기에는 조광조가 세 불리기에 나서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이야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겠으나 정광필(鄭光弼, 1462 ~ 1538), 신용개(申用漑, 1463 ~ 1519) 등 중도의 입장에 서 있던 존경받는 원로 정승들까지 반대파로 돌아선 것은 조광조를 위해서나, 개혁을 위해서나 좋지 않다. 결국 그런 불찰이 개혁의 불발로 이어지게 된다.

 

 

유학의 생활화 향약은 마치 농촌공동체의 자치적인 도덕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광조(趙光祖)제도로써 시행한 데서 보듯이 실은 권장사항이 아니라 강제적인 규율이었다 (자치하라는 것도 명령으로 집행되면 이미 자치가 아니다). 이제 유교 이데올로기는 지배층의 이념으로만 머물지 않고 전사회적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사진은 여씨향약을 한글로 풀이한 여씨향약언해인데, 말하자면 ‘15세기판 새마을운동 지침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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