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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2장 병든 조선, 당쟁의 사상적 뿌리③: 기축옥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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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2장 병든 조선, 당쟁의 사상적 뿌리③: 기축옥사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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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의 사상적 뿌리

 

 

사상적 당쟁과 정치적 당쟁이 함께 어우러지면 뭔가 사건이 터져나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1589년 드디어 서인과 동인은 한 차례 크게 맞부딪쳐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라는 대형 사건을 일으킨다.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지만 학파로는 동지였던 이이와 성혼은 정파로도 서인에 속하는 동지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의 주목과 관심 속에서 성장하던 정여립(鄭汝立, 1546 ~ 89)이라는 제자가 묘한 행적을 보인다. 스승인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 편으로 붙는가 싶더니 이이가 죽자 서인의 단독 거두가 된 성혼을 거세게 비판한 것이다(그가 이이를 배신한 것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었으니, 이래저래 이조전랑은 골치아픈 자리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므로 정여립은 곧 서인들에게 밀려 중앙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한다. 물론 서인의 촉망 받는 신인이었다가 편을 바꾸었으니 동인들에겐 혜성같이 나타난 슈퍼스타다. 스타가 된 덕분에 고향에서 관직도 없이 지내는 그에게 동인에 속한 지방관들이 줄줄이 꼬여든다.

 

자신의 신세를 처량히 여기던 정여립이 그것을 반전의 기회로 여긴 것은 당연하다. 그는 주변 인물들로 대동계(大同契)라는 일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매달 한 차례씩 활쏘기 대회를 여는 등 지역의 유지라는 신분을 넘어선 정치활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게다가 승려와 규합해서 전주에서 장차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등,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흥할 것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민간에 퍼뜨린다(‘木子이고 奠邑이란 이니 —— 과 같다 —— 말할 것도 없이 이씨가 망하고 정씨인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그들이 기축년(1589) 말에 한양에까지 진격할 것이며, 구체적인 책임 부서까지 정해놓았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이와 관련해서 조선 초기부터 나돌던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이 있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 이 책은, 도참설과 풍수지리 등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깔고 은유와 파자(破字)를 많이 써가면서 장차 정씨 성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이씨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구하리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정여립의 사건을 비롯해서 이후에 일어난 민란들 중 상당수가 정감록과 정신적인 연관을 가지게 된다(물론 모두 이씨 조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탓인데, 이를 바꿔 말하면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아닌 진정한 왕국을 꿈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문을 들은 서인이 가만 있을 리 없고, 이성을 가진 선조(宣祖)가 그냥 놔둘 리 없다. 서인 세력과 선조는 즉각 동인과 정여립 일당에 대해 일망타진에 나선다. 한양에서 선전관(宣傳官, 왕명을 집행하는 무관)과 의금부(義禁府, 반역ㆍ모반 같은 중죄를 담당한 수사기관) 도사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여립은 그간의 기세에 어울리지 않게 금세 꼬리를 내리고 자살했으나, 파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인이 여당이었던 시절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죽어지낼 동안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같은 노래나 지으며 신세를 한탄했던 정철(鄭澈, 1536 ~ 93)은 이 사건을 특별히 담당하는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동인의 보스인 이발(李潑, 1544 ~ 89)을 비롯해서 수십 명의 동인 측 사대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고 유배보내며 오랜만에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꾀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거리지만, 역모가 사건으로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대규모 옥사가 빚어졌으니, 역시 말만의 역모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정여립 모반 사건은 앞서의 사화(士禍)들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사화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제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아니라 사대부들 간의 사적인 친분 관계(당파)조차 쉽게 대형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왕실 외척들끼리 세력다툼을 벌인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제외하면, 그동안 말만의 역모는 국왕 대 사대부(士大夫)의 대결(무오사화, 갑자사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결(기묘사화)을 거쳐 당파 간의 무한 대결로까지 발전(?)했다. 이제 사대부 정치는 올 데까지 왔고 타락할 데까지 타락했다. 그 다음은 뭘까?

 

 

구름 속의 논쟁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그때까지 성리학에 철학적 뿌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나 뒤늦게 학자들이 성리학을 포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무렵 일반 사회에서는 이미 체제의 모순이 폭발하고 있었다. 홍길동과 임꺽정이 바로 이 시기에 활약했다. 위쪽은 17세기에 소설화된 홍길동전의 표지이고, 아래쪽은 20세기에 신문 연재된 임꺽정전의 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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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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