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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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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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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왕국을 만들기 위해 국왕도 당파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일찍이 세조(世祖)가 그러했듯이 왕국으로 컴백하려면 왕당파라는 측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조 때와 달리 사대부(士大夫) 체제가 굳어져 있는 지금은 더더욱 측근의 힘이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광해군(光海君)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세력 중에서 왕당파의 리더를 발탁하고자 한다. 이이첨은 책략이 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별로 한 게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최적임자는 바로 정인홍이다. 연배도 높고 의병장으로 활약한 경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이황과 더불어 성리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조식의 수제자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광해군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적도 있었다(유영경이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려 한 사실을 숨기려 했을 때 그것을 적발했다).

 

과연 정인홍은 광해군의 구미에 딱 맞는 사건을 엮어준다. 1611년 그는 성균관 유생들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이언적은 명종(明宗) 때 양재역 대자보 사건에 휘말려 유배된 문신이지만, 그보다는 성리학의 지치주의적 정치철학을 발전시킨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정치 이데올로기에 국한되어 있던 유학에 철학적 성격을 가미했으니 말하자면 주희(朱熹)의 한반도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비록 그는 경기 출신이지만 이황과 기대승에게 영향을 주어 영남학파의 태동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존경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다의 문묘종사를 지내려 할 때 거세게 반대하고 나선다(앞에서 보았듯이 문묘종사란 국가에서 유학의 거두에게 사당을 지어 주는 것이었으니 오늘날의 무형문화재 이상 가는 영예다). 왜 자기 스승은 제외하느냐는 것인데, 조식의 수제자로서 당연히 할 만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건 자긍심 강한 성균관 유생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결과가 된다. 대학의 자율과 자유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 격분한 유생들은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린다. 졸업장 명부에서 제적당한 격이니 정인홍은 열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쪼르르 달려가 보스에게 탄원했고 광해군(光海君)은 성균관 유생 전원 제적이라는 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야당의 입장에 있었던 소북은 그 사건으로 다시 한번 대북에게 두들겨맞았다. 물론 이것도 당쟁이긴 하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미 대북을 왕당파로 만들었으므로 과거의 당쟁과는 다르며, 엄밀히 말해 국왕과 사대부(士大夫)의 대결이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국왕에게는 건수로 활용할 만한 사건이 계속 터진다. 이듬해인 1612년에는 황해도에서 허위 역모 사건이 꾸며졌다. 내용인즉슨 터무니없다. 김경립(金景立)이라는 자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사기를 치다가 걸리자 봉산 군수 신율(申慄)은 그를 고문해서 김백함(金百緘)이라는 자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김백함을 체포하니 그의 아버지 김직재(金直哉)가 일찍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아버지의 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가 파직된 사연이 드러났다. 역모를 조작할 수 있는 좋은 건수다. 고문에 못 이긴 김백함은 엉뚱하게도 인목왕후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 1562 ~ 1613)을 불었고, 때마침 충청도에서 강도질을 하다 잡힌 박응서(朴應犀, ? ~ 1623)라는 자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진다박응서는 선조(宣祖) 초기에 영의정이었던 박순(朴淳)의 서자로, 학문과 재주가 뛰어났으나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좌절한 인물이다. 그는 같은 처지의 명문 출신 서자들과 함께 강변 7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신세를 한탄하다가 광해군(光海君) 즉위 초에 서얼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애 달라고 탄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공교롭게도 광해군은 그 자신도 왕실의 서자로 설움을 겪었으면서도 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許筠, 1569~1618)은 친구인 박응서가 체포된 뒤 신분 해방의 꿈을 접었으나 1618년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당했다.

 

광해군으로서는 가장 큰 라이벌인 영창대군과 소북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를 빌미삼아 그는 김제남에게 사약을 안기고 그 이듬해에 영창대군을 유배시켰다가 죽였으며, 그밖에 100명이 넘는 소북 세력을 숙청했다. 이로써 반대파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광해군(光海君)은 왕당파를 심복으로 삼아 왕권을 단단히 다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재야의 구심점 조식은 평생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으면서도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한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 특유의 학자=관료, 학문=정치의 등식을 알면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당쟁에도 열심이었으니, 유학에 도가 사상을 가미해서 남명학파(南冥學派, 남명은 조식의 호다)를 이룬 스승의 학풍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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