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공자, 옛 것을 좋아하여 민첩히 구하는 자라고 천명하다
7-1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요, 옛 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구하여 아는 자이로다.” 7-19.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
『중용(中庸)』 20장에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라는 말이 있어 인간의 지혜의 단계를 3분하여 말한 듯한 인상을 주고, 「계씨」 9에도 비슷한 논의가 있다. 그러나 본 장에서 공자는 그러한 3단계를 근원적으로 전제하여 말한 것 같지 않다. ‘생이지지’, ‘학이지지’, ‘곤이지지’의 문제도 지(知)의 차원이 근원적으로 삼 단계로 나뉜다는 것이 아니다. 생지나, 학지나, 곤지나 결국 지(知)에 이르기는 매한가지라는 데 그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열심히 배워서 알고, 어떤 사람은 곤혹스럽게 고생을 함으로써 알지마는, 결국 앎에 도달한다는 측면에서는 셋이 다 같은 것이다.
或生而知之, 或學而知,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생이지지(生而知之)’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갓난 애기가 나 도올과 같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까? 결국 머리가 좋다고 하는 것은 후천적 지식의 축적의 내용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지식을 흡수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요, 또 그 과정에 걸리는 시간의 완급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수학문제라 할지라도 뇌기능의 정상가동이라는 보편적 신체적 조건을 전제로 하면, 결국 그것을 잘 푼다, 못 푼다 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 연역적 전제들을 이해하는 체계적 노력이 뒷받침하면 결국 풀 수는 있는 것이다. 좋은 선생, 좋은 학생의 협업만이 요구될 뿐이다. 물론 동일한 노력의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빨리 푸는 사람과 계속해서 느리게 푸는 사람의 차이는 영원히 존속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수학적 머리가 영민하지 못하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방면에서 얼마든지 효율적인 삶의 가치를 발휘할 수가 있다. 선천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암기력과 계산능력 같은 것인데, 이러한 차별성은 막대한 인간의 노력의 양에 비하면 참으로 하찮은 것이다. 오히려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이점 때문에 사람이 게을러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수가 있다. 머리가 좋기 때문에 결국 손해를 보고 마는 것이다.
공자는 여기서 인간의 지력의 선천적 우월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자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대개 음악을 잘하는 사람, 작곡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수학적 계산능력이 빠른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 는 것이다. 오직 옛 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구해서 앎을 획득했을 뿐이다. 이 말은 공자의 노경의 술회이다. 자신의 생의 지난 역정을 돌아볼 적에 자기 삶이 지독하게 노력한 과정이었을 뿐이라는 생각만 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솔직한 한 인간의 고백이다. 나는 이러한 공자의 꾸밈없는 태도를 사랑한다. 나도 어려서부터 주변사람들에 비해 항상 암기력과 계산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래서 시험을 잘 본 적이 별로 없다. 같은 시간에 몇 문제밖에는 못 푸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러한 문제들이 결국 막대한 노력으로 극복될 수가 있고, 한번 극복이 되면 점차 모든 것이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대학교 시절에 타인의 수십배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공자나 나나 결국 같은 삶의 역정을 보낸 사람이라는 이 동질감이 내가 『논어』를 사랑하고 공자를 좋아하게 되는 까닭이리라.
‘민(敏)’을 ‘면(勉)’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면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다는 뜻이 된다.
‘호(好)’는 거성이다. ○ ‘생이지지(生而知之)’라는 것은 기질이 청명(淸明: 맑고 총명함)하고 의리가 소저(昭著: 밝고 뚜렷함)하여 배움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아는 것이다. ‘민(敏)’이란 신속함이니, 쉬지 않고 신속하게 노력하는 것이다[급급汲汲].
好, 去聲. ○ 生而知之者, 氣質淸明, 義理昭著, 不待學而知也. 敏, 速也, 謂汲汲也.
○ 윤언명이 말하였다: “공자가 생지(生知)의 성인이면서도 매번 배우기를 좋아한다[好學]고 말하는 것은 단지 학인들을 면려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대 저 사람이 나면서부터 안다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의리(義理)일 뿐이다. 대저 예악이나 개개 사물의 이름이나 고금의 역사적 사건이나 변천 같은 것은 또한 반드시 배움을 기다려 그 실제 정황을 신험해봄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
○ 尹氏曰: “孔子以生知之聖, 每云好學者, 非惟勉人也, 蓋生而可知者義理爾, 若夫禮樂名物, 古今事變, 亦必待學而後有以驗其實也.
이 장에 관해서는 윤언명의 주가 주희의 주보다 몇천 배 더 낫다. 화정처사(和靖處士: 윤언명의 호칭. 정이천의 직제直弟)가 말하는 ‘의리(義理)’는 이성주의 자들(Rationalists)이 말하는 ‘이성’이나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양심’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경험주의자들이 말하는 후천적 습득의 세계는 부정될 수가 없는 것이다. ‘생이지지(生而知之)’는 참으로 공허(Empty)한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인간의 지식의 내용(경험주의자들의 세계)과 형식(이성주의자들의 세계)을 결합하여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종합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선험적 카테고리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어디까지나 그것을 주체로 해서 경험을 수용했기 때문에 구성설이나 주관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관념론의 병폐는 항상 지나치게 우리가 사는 세계를 연역적으로 조작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순수오성의 개념인 12범주(카테고리)도 전통적인 논리학의 범주들이며 그것이 모든 경험적 사실을 규정할 수 있는 선험적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칸트 개인의 독단적 형이상학적 가설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요즈음 아이씨(IC) 칩의 세계가 2진법으로 다 해결되듯이 12범주도 결국 음양이라는 주역적 카테고리 하나로 다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konstitutives Prinzip)가 나에게 선험적으로 구비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해방되지 못하면, 유가철학의 인(仁)이나 도가철학의 자연(自然)이나 불가의 선(禪)의 세계에 입문할 수 없다. 앞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칸트적 종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선천(선험)의 입장에서 후천(후험)을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의 입장에서 선천을 통합하는 새로운 종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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