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사람의 장단점, 모든 게 나의 본보기
7-2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세 사람만 길을 가도 반드시 그 속에 내 스승이 있다. 그 선한 자를 가려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는 나를 고치는 귀감으로 삼는다.” 7-21.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
어려운 주석을 달 필요가 없다. 세 사람이라는 표현도 반드시 3인에 한정되는 말은 아닐 것이지만, 그 문학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의 ‘개지(改之)’는 불선자를 귀감 삼아 나를 고친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고, 불선자 그를 고쳐준다는 뜻으로도 해석은 가능하다. 후자는 사회적 실천이 될 것이나 공자의 기질로 볼 때, 좀 과한 해석이다. 「이인」 17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 하나는 나 자신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악할 것이니, 그 선한 사람을 택하여 따르고, 그 악한 사람은 귀감 삼아 나를 고친다. 이 두 사람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
三人同行, 其一我也. 彼二人者, 一善一惡, 則我從其善而改其惡焉, 是二人者皆我師也.
주희의 주석은 명료하기는 하지만 좀 유치하다. 어찌 세 사람이나, 악인, 선인으로 구분되겠는가? 전체가 여유있는 해석이 가능한 문학적 표현일 것이다. 나의 번역의 묘미를 잘 따져보시기를.
○ 윤언명이 말하였다: “어진이를 보고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못한 자를 보고 안으로 자기를 되돌아 볼 줄 안다면(4-17),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니, 선에 나아감이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 尹氏曰: “見賢思齊, 見不賢而內自省, 則善惡皆我之師, 進善其有窮乎?”
중동의 사막문명이 인류에게 많은 예지를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인류 를 대결과 파멸과 오욕의 역사로 휘몰아 넣은 측면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 가장 근원적 가치관의 구도에 선인과 악인, 선과 악,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간의 우주적 대결(cosmic struggle)의 드라마라는 이원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 이원론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의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에서부터 시작하여 신ㆍ구약 간약시대(intertestamental period)에 성행한 에세네 파의 ‘빛의 자녀들(sons of light)’과 ‘암흑의 자녀들(sons of darkness)’의 대결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쿰란공동체는 이 대결구도를 매우 명료하게 구현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 대결구도는 불행하게도 기독교의 초대교회운동으로 전승되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이러한 대결은 매우 절박한 요청이었다. 자기들 에클레시아 회중을 박해하는 로마세력이나 유대화파 세력이나, 자체 내의 내분세력이라고 간주된 영지주의나 아리우스파, 이 모든 세력을 ‘이단(heretics)’으로 몰아야 했고, 이단이야말로 ‘사탄의 종들’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이미 바울에게서부터 구체화되고 있다. 순교자 유스틴(Justin Martyr)이나 오리겐(Origen), 그리고 사막의 수행성자 안토니(Antony)의 언어는 기독교적 신념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사탄으로 규정하는 극렬한 어휘들로 가득차 있다. 철학적인 성찰을 갖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는 사탄을 존재론적 으로는 거부하면서도 그의 설교집이나 기도문에는 사탄이라는 어휘가 수없이 등장한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말틴 루터(Martin Luther)도 로마가톨릭세력에 충실하게 남으려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사탄(agents of Satan)으로 규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러한 묵시론적 비전은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일반 서구인들까지도 인류의 역사를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선의 세력이 승리해가는 도덕적 역사(moral history)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사탄을 나로부터 소외시키는 모든 사유는 유일신론(monotheism)의 근본적 논리를 위배하는 이단적 사유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향은 로마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나, 에반젤리칼이나 오쏘독스를 막론하고 근대세계에 있어서 강렬한 모우멘텀을 더해가기만 하였 고, 오늘날 무슬림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서구인들의 사유에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칼 맑스와 같은 사상가의 역사인식도 결국 이러한 ‘대사탄전쟁’이라고 하는 묵시론적 세계관의 세속적 형태일 뿐이다.
결국 나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사탄’으로 규정하는 가치체계가 이 세계를 미궁 속으로 계속 빠뜨리고만 있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나의 스승이라는, 이토록 평범한 공자의 한마디가 반 만년 인류의 종교적 사유의 모든 죄악을 일소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서구적 사유에 중독된 그 누구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인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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