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공자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
7-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道)에 뜻을 두며, 덕(德)을 굳게 지키며, 인(仁)을 항상 떠나지 아니하며, 예(藝) 속에서 노닌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 7-6.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
이것은 공자가 자기 삶의 역정을 자술한 것이다.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상달(上達)의 궁극이 종교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데 공자의 삶의 위대성이 있고 초기공단의 건강함이 엿보인다. 여기 예(藝)라는 것은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와 같은 육예(六藝)를 말하는 것이나, 그 핵심은 역시 음악이었다. 그가 말하는 음악은 작곡과 연주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연주를 한다는 것은 곧 창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연주가 정밀한 악보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곡이라고 연주할 때마다 달라지는 것이다. 그 속에서 노닐 수밖에 없다.
도(道)란 보편적 진리를 말하며 그것은 요즈음 말로 하면 과학(science)이다. 그 다음 덕(德)은 그 도가 나의 개별적 존재의 내면으로 심화되어 축적되는 것을 말한다. 도가 객관적이라면 덕은 주관적인 것이며, 도가 보편적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것이며, 도가 천지대자연에 외재하는 것이라면 덕은 나의 몸이라는 천지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도와 덕을 합치면 도덕이 되는데, 이 도덕은 요즈음 말하는 ‘도덕(morality)’보다는 함의가 훨씬 넓은 것이다. 공자의 도ㆍ덕이나 노자의 도ㆍ덕이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仁)이란 공자에게 있어서는 인 간됨의 원천이며, 도덕적 완성(moral perfection)의 궁극이다. 동사만을 떼어서 말한다면, 지(志)는 지향성이며, 거는 굳게 지키는 것이며, 덕에 굳세게 흔들리지 않고 의거하여 삶의 제문제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의(依)는 한시도 떠남 이 없이 그것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유(游)는 노니는 것이니, 해탈인의 향유이다.
道 | 보편적 진리, 과학 | 과학 | 志 | 지향성(志向性) (intentionality) |
德 | 개별적 덕성, 내면적 과정 | 도덕 | 據 | 집수성(執守性) (grounding) |
仁 | 심미적 감성, 도덕적 완성 | 依 | 실천성(實踐性) (realiz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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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 | 예술과 기술, 창작 | 예술 | 遊 | 향완성(享玩性) (enjoyment) |
‘지(志)’라는 것은 마음이 지향해가는 것을 일컬은 것이다. ‘도(道)’는 인간관계의 일용지간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정확히 알기만 해도 마음이란 반드시 그리로 가게 되는 것이니, 가는 것이 바르면 샛길로 빠지는 미혹이 없을 것이다.
志者, 心之所之之謂. 道, 則人倫日用之間所當行者是也. 如此而心必之焉, 則所適者正, 而無他歧之惑矣.
‘거(據)’는 거(居)라고 발음한다. ‘거’는 굳게 고집하여 지키는 것을 뜻한다. ‘덕(德)’은 도를 행하여 마음에 얻어지는 바가 있는 것이다(덕德은 득得이다). 마음에 얻어지는 것을 지키고 잃지 아니 하면 시종 한결 같아질 것이니, 날로 새로워지는 공(功)이 있게 될 것이다.
據者, 執守之意. 德者, 得也, 得其道於心而不失之謂也. 得之於心而守之不失, 則終始惟一, 而有日新之功矣.
‘의(依)’라는 것은 어기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인(仁)’하면 사욕(私欲)이 다 제거되고 마음의 덕(德)이 온전하여진다. 공부가 이 수준에 이르게 되면 밥 한 그릇 먹는 사이라도 인에서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면 존양(存養)이 익어서 어딜 가나 천리의 유행(流行)이 아님이 없다【천리에 지배되는 행동만 하게 된다는 뜻이다】.
依者, 不違之謂. 仁, 則私欲盡去而心德之全也. 功夫至此而無終食之違, 則存養之熟, 無適而非天理之流行矣.
‘유(游)’라는 것은 사물을 완미(玩味)하고 감정을 잘 조절하는 것을 일컫는다. ‘예(藝)’라는 것은 예ㆍ악의 질서이며 사ㆍ어ㆍ서ㆍ수의 법도이다. 모두 지극한 이치가 깃드는 것들이며 일용지간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예술인 것이다【예술은 항상 기술이라는 의미를 동반한다. 육예(六藝)가 다 삶의 수단이 되는 기술이다】. 아침ㆍ저녁으로 육예에 노닐어 그 의리(義理)의 취향을 넓혀간다면, 모두 사무(事務)에 대처하는 것이 여유가 생기고 또한 마음도 방종으로 흐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游者, 玩物適情之謂. 藝, 則禮樂之文, 射, 御, 書, 數之法, 皆至理所寓, 而日用之不可闕者也. 朝夕游焉, 以博其義理之趣, 則應務有餘, 而心亦無所放矣.
○ 이 장의 대의는 사람이 학문을 한다는 것이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대저 배움이란 입지(立志: 뜻을 세움)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니, 도에 뜻을 세우면 마음이 바름에 존(存)하게 되어 딴 길로 가지 않게 될 것이다. 덕에 거(據)하면 도를 마음에 얻어 그것을 잃지 않게 되고, 인에 의(依)하면, 덕성(德性)이 항상 작용하여 물욕(物欲)이 설칠 수 없고, 예에 유(游)하면 작은 사태라도 놓치는 일이 없고 움직이나 쉬나 모두 존양(存養)이 있게 된다. 배우는 자는 이에 그 선ㆍ후의 차례와 경ㆍ중의 도리를 잃지 않으면, 본ㆍ말이 같이 구비되고, 내ㆍ외가 서로 함양되며, 일용지간에 조그만 틈(허점)도 없이 그 속에서 여유롭게 헤엄치듯하여 홀연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 此章言人之爲學當如是也. 蓋學莫先於立志, 志道, 則心存於正而不他; 據德, 則道得於心而不失; 依仁, 則德性常用而物欲不行; 游藝, 則小物不遺而動息有養. 學者於此, 有以不失其先後之序, 輕重之倫焉, 則本末兼該, 內外交養, 日用之間, 無少間隙, 而涵泳從容, 忽不自知其入於聖賢之域矣.
송유들에게는 평범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라는 보편 주의적 테제(universalistic theme)가 있다. 이것은 기독교로 말하면 평범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테제를 용인하기를 아주 꺼려할 것이다. 하나님에게로의 신앙이나 복속이라는 개념이 깨어지고, 예수를 평범한 인간과 동일시하는 아리아니즘(Arianism)의 오류가 부활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4대종교 중에서 기독교와 같이 애매한 성격을 취하는 종교는 하나도 없다. 불교와 유교는 인간과 신을 동일시한다는 의미에서 대차가 없다. 그리고 이슬람은 완벽하게 인간과 신을 격절시켜, 인간은 신에게로의 완벽한 복종을 통해서만 평화를 얻는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호발의 터럭도 없다. 따라서 마호메드도 아주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간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이라고도 저것이라고도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애매한 중간자 성이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애매성은 불행하게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편의에 따라 이단자를 때려잡는데 악용되어 왔다. 예수가 신이라고 말하면, 지상의 예수는 허환(虛幻)이 되므로 도케티스무스(가현주의)라고 때려잡고, 예수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하면 예수를 격하시켰다고 때려잡는 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교ㆍ불교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온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하여, 기독교ㆍ이슬람ㆍ유대교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불완전함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근원적 시점의 차이를 발견케 되는 것이다.
이슬람(Islam) | 인성 ≠ 신성 | 인간은 불완전하다 |
기독교(Christianity) | 인성ㆍ신성 공존 | |
불교(Buddhism)ㆍ유교(Confucianism) | 인성 = 신성 | 인간은 완전하다 |
그런데 송유의 문제점은 모든 인간이 성인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에 맞추어 모든 사회체제나 정치제도, 그리고 문화적ㆍ물질적 향유에 있어서 보편주의적 가치관을 구현해야 하는데, 도학자들은 소외받는 대중 중심으로 정책을 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한결같이 반대했을 뿐 아니라, 지독한 엘리티즘의 특권의식에 빠지는 성향이 있었다. 그리고 공자를 우리와 다른 특별한 성인으로서 교조화(敎祖化)시키는 모순적 사유를 곳곳에서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적 사유를 해결치 못한 채 애매한 언어로써만 사대부의 권위주의에 안주하고, 총체적인 우주관을 정비하지 못한 것이 조선유학의 대체적인 병폐라고 말할 수 있다. 다산 같은 석학도 내면적 도덕관, 사회적 제도관, 평등주의적 인간관이 통합되는 새로운 코스몰로지를 구상하는 데는 실패한 불운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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