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각각 제자리를 얻다
9-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로 음악이 바르게 되었다. 아(雅)와 송(頌)이 각기 제자리를 얻었다.” 9-14. 子曰: “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
애공 11년 겨울 공자는 돌아왔다. 나이는 68세. 이제 정치적 꿈의 실현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그에게는 오직 문화에 대한 집념만 남아있었다. 노나라 고국이 상징하는 주나라 고문명의 전통을 이제 세계적인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전통의 문헌정리사업에 여생을 헌신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음악이었다. 공자가 말하는 음악은 기악곡인 동시에 시(詩)였다. 시(詩)는 풍(風)ㆍ아(雅)ㆍ송(頌)이라는 세 장르로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을 바로 공자가 정립한 것이다. 풍(風)을 정리하면, 자연히 아(雅)ㆍ송(頌)이 제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풍(風)은 중원지역 각국에 산재해있던 발랄한 서민들의 민요이며, 민요는 대체로 남녀상열지사를 주제로 삼는다. 공자는 풍으로서 160편을 정리했다. 아(雅)는 귀족의 노래인데,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나뉜다. 대아는 보다 장중하고, 소아는 보다 진실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민요적 성격이 남아있다. 아(雅)로서는 105편을 정리하였다. 송(頌)은 40편, 종묘제례악이다. 주송(周頌), 상송(商頌), 노송(魯頌)이 있는데 노송의 존재는 공자가 편했다는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해준다.
신출의 정현 주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있다.
“노나라에 돌아온 것은 애공 12년 겨울이었다(沃案. 보통은 11년). 이때 도가 쇠하고 악이 폐하였다. 공자가 귀환하여, 이 어지럽게 된 음악들을 바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와 송의 소리가 각기 제 박자에 맞게 되었고, 어울리는 영역이 확보되어 서로 침범하지 않게 되었다[反魯, 哀公十二年冬也. 是時道衰樂廢, 孔子來還, 乃正之. 故雅頌之聲, 各應其節, 不相奪倫.].”
정현은 분명 ‘각득기소(各得其所)’를 어떤 전문적 음악의 문제로서 풀이하고 있다
노나라 애공 11년 겨울에, 공자는 위나라로부터 기나긴 방황을 끝내고 드디어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때에 주례가 아직 노나라에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詩)와 음악(音樂)이 꽤 잔결(殘缺: 망가지고 빠지고)되어 차서(次序)를 상실하였다. 공자는 천하사방을 넓게 주유하면서 음악을 수집하였고 또 그것을 서로 참고해가면서 고정(考訂)을 행하였기 때문에 설(說)을 세웠고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뒤늦게 정치적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므로 귀국하여 음악을 바로잡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魯哀公十一年冬, 孔子自衛反魯. 是時周禮在魯, 然詩樂亦頗殘闕失次. 孔子周流四方, 參互考訂, 以知其說. 晩知道終不行, 故歸而正之.
육경(六經) 중에서 가장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경 이 역시 『시경(詩經)』이라 할 것이다. 앞으로 위대한 『시경』의 한글역주가 나와야 한다. 『시경』을 제대로 번역하려면 반드시 음운학과 박물학의 기초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 중문과의 음운학 전공자 중에서 훌륭한 『시경』 전문가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고대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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