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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자한 제구 - 16. 공자, 물을 예찬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자한 제구 - 16. 공자, 물을 예찬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2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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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공자, 물을 예찬하다

 

 

9-16. 공자께서 개울 다리 위에 계시었다. 흐르는 물을 쳐다보시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
9-16. 子在川上, :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우리가 공자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가장 많이 인용하는 장 이 바로 이 장이라 말할 수 있다. 체계적인 철학논술은 아니지만 실로 그의 우주관ㆍ인생관ㆍ역사관ㆍ가치관을 나타내는 가장 본질적인 통찰을 담은 파편이라 할 것이다. 서양철학의 본원이 희랍철학에 있고, 희랍철학의 본원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Pre-Socratic Philosophers)에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들의 철학은 기실 모두 이와 같은 단편(fragments)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오히려 단편적이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고 또 많은 후대의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사유를 독입(讀入, to read in)시킬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하여 유니크한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여왔던 것이다.

 

키무라(木村英一)는 이 16장으로부터 23장까지 호학(好學)을 주제로 하는 공자의 자술적 단편이 집중적으로 모여져 있으므로, 그 호학 단편 그룹의 관()을 차지하는 이 장은 역시 부단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움에 임하는 자세, 그 호학의 우주관, 호학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명제라고 말한다. 하나의 맥락적 관 점으로서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신출의 정현 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는 것은 과거에로 사라짐이다. 사람이 나이가 드는 것이 꼭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이 빠르고 허망함을 나타낸 것이다. ()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용되지 못하고 생애가 끝나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 往也. 言人年往如水之流行. 傷有道而不見用也.

 

 

한대의 경학자들이 얼마나 용렬한 사람들이었나를 잘 나타내주는 하나의 표본이라 할 것이다물론 한대의 주석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위대한 정보의 체계도 있다. 그런 것을 폄하하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공자의 탄식이 비록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발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이렇게 중요한 단편으로서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 그의 사상의 총체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단지 공자 생애에 관한 가십(gossip)거리 수준의 단편적 애상(哀傷)으로 치부해버리거나, 공자의 탄성마다 모두 공자가 벼슬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끝났다는 단 하나의 인생 테마를 가지고 그토록 지겹게 다 도배질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가 냇가에서 외친 이 탄성은 그의 인생에 대한 통찰을 의미함과 동시에 분명 거대한 우주의 운행에 대한 코스밐 인사이트(cosmic insight)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탄이나 비판이 아닌 비전이요 비상(飛翔)이다.

 

공자의 이 탄성은 역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대강 공자와 동시대)의 판타레이(Panta rhei)적 동()의 철학(Philosophy of Flux)과 유사한, 우주론적 발상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며 불변하는 실체는 아무 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도 우주도 역사도 물이 흐르듯이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불변은 단지 지속일 뿐이며 그 지속은 변화의 지속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적 사고가 중시된다. 시간이 완벽하게 거부될 때 만이 순수한 공간적 사유가 가능해지지만, 공자에게는 그러한 기하학적 사유는 별로 중요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바로 이 공자의 탄성이 희랍철학과 중국철학을 가르게 되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다. 희랍철학은 철저히 공간적으로 추상화되어 갔으나 중국철학은 철저히 시간적인 함수들을 고수했다.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론적 사유를 계승치 아니 하고,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세기 초)의 존재론적 사고를 너무 단선적으로 계승했다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성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론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토니즘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플라토니즘의 이데아론적 측면이 기독론적 천국론(Christological Kingdom of Heaven)과 결합하면서 결국 기하학적 사유는 매우 종말론적이고 신화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뮈토스에서 탈피한 로고스가 다시 뮈토스로 회귀한 것이다. 서구인들의 연역적 사고는 과학을 잉태시켰지만, 그 배면에는 항상 기하학적 사유의 독단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순수 추상성은 인간세에서 또다시 종교적 성격을 지닐 때도 많다.

 

공자의 세계관은 철저히 시간적이다. 그래서 후기묵가류의 기하학적 사유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리고 노자의 세계관 역시 시간적이다. 노자, 그리고 장자가 말하는 도()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로고스처럼 항상 변화와 대립과 투쟁과 조화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순수공간적 존재로서의 도()는 선진사상가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모든 대세의 정점에 바로 본 장의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 불사주야(不舍晝夜)’라는 이 한마디의 탄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는 부()라고 발음한다. ‘()’는 상성(上聲)이다. 천지의 조화는, 지나가는 것은 과거로 흘러가버리고 오는 것은 미래를 연결시켜 주어, 한 순간의 멈춤도 있을 수 없으니, 이러한 변화 그 자체가 도체()의 본래의 모습[本然]이다. 그러하니 손으로 가리켜 쉽게 볼 수 있는 도체(道體)의 모습이란 이 시냇물의 흐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시냇가에서 이 탄성을 발하여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시시(時時)로 성찰케 하여 호발의 간단(間斷: )도 없게 하려 하신 것이다.

, 音扶. , 上聲. 天地之化, 往者過, 來者續, 無一息之停, 乃道體之本然也. 然其可指而易見者, 莫如川流. 故於此發以示人, 欲學者時時省察, 而無毫髮之間斷也.

 

정이천이 말하였다: “이것은 도체(道體)이다沃案. 이런 개념적인 용어들은 거의 다 불교용어에서 온 것이다. ‘도체(道體)’라는 말은 서양철학의 누우메나(noumena)’ 즉 현상에 대비되는 본체 즉 서브스탄스(substance)’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희랍인과 인도인 그리고 불교사상가들의 도체는 실제로 기하학적 존재이며 여기 공자가 말하는 서자(逝者)’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송유들이 이렇게 현상론적 개념과 본체론적 개념을 혼동해서 쓰고 있다는 데 송대유학의 특질이 있다. 그러나 공자는 우주의 본체 그 자체를 현상으로부터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았다. 하늘의 운행은 쉼이 없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며, 물은 흘러 쉼이 없으며 만물은 생성됨이 끝이 없으니, 모두 도()와 더불어 한 몸[]이 되어 밤낮으로 그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를 본받아 자강불식(自彊不息: 주역(周易) 건괘(乾卦) 대상전(大象傳))하는 것이다.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그 순수함이 또한 그침이 없는 것이다.’

程子曰: “此道體也. 天運而不已, 日往則月來, 寒往則暑來, 水流而不息, 物生而不窮, 皆與道爲體, 運乎晝夜, 未嘗已也. 是以君子法之, 自强不息. 及其至也, 純亦不已焉.”

 

정명도가 말하였다: “한나라 이래로 유자들이 이 장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였다(沃案. 맞는 말이다. 그 우주론적 함의를 파악 하지 못하고 인생의 푸념으로만 풀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인의 마음이 순 수하여 간발의 그침도 없다는 것을 간파하여야 한다. 마음이 순수하여 그침이 없다는 것은 곧 하늘의 덕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천덕(天德)이 있어야만 곧 왕 도(王道)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니, 그 요체는 오직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근독(謹獨)에 있을 뿐이다.”沃案, 또다시 그 요체를 중용(中庸)신독(愼獨)’사상으로 귀결시킨 것은 송유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유학이 심성수양론에 매달리는 한 결코 불학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다.

又曰: “自漢以來, 儒者皆不識此義. 此見聖人之心, 純亦不已也. 純亦不已, 乃天德也. 有天德, 便可語王道, 其要只在謹獨.”

 

나 주희가 생각한다. 이 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본 편이 끝날 때까지 모두 사람들을 면려하여 배움에 나아가게 하려는 말로 되어있다.

愚按: 自此至篇終, 皆勉人進學不已之辭.

 

 

마지막 주희의 말은 주희의 텍스트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의미 있는 발언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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