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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자한 제구 - 13. 공자가 외지인 구이(九夷)에 살려 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자한 제구 - 13. 공자가 외지인 구이(九夷)에 살려 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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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공자가 외지인 구이(九夷)에 살려 하다

 

 

9-13. 공자께서 편벽한 변방의 아홉나라에 가서 살고 싶어하셨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곳은 누추한 곳인데, 어찌 그런 곳에서 사실 생각을 하십니까?”하니,
9-13. 子欲居九夷. 或曰: “, 如之何!”
 
공자께서 대답하시었다: “군자가 그곳에 거하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을까보냐!”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이 장에 대해서도 구구한 해석이 많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구이(九夷)’오랑캐라는 개념에 집착하여 종종의 억측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나 일본의 국수주의적 사유를 일삼는 사람들은 공자가 이()를 흠모했다 하여 실상 공자가 이상화했던 나라가 일본이라는 둥, 조선이라는 둥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진사이 같은 사람조차 공자가 화()를 떠나 이()에 살고 싶어했다면[夫子之欲去華而居夷], 그 이()는 다름아닌 일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라이(荻生徂徠)는 이에 반발하여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지, 어찌 논어에 억지로 부회하여 황당무계한 말을 망작한단 말인가[若夫吾邦之美, 外此有在. 何必傅會論語, 妄作無稽之語 乎]?”했는데, 이는 소라이 말이 맞다. 다산은 이에 대하여 언급이 없고, 단지 황소나 형소에 구이(九夷), 현도(玄菟), 낙랑(樂浪), 고려(高麗), 만절(滿節), 부유(鳧臾), 색가(索家), 동도(東屠), 왜인(倭人), 천비(天鄙)라고 규정한 것에 대하여, ‘현도’, ‘낙랑은 한무제 때 사군(四郡)의 이름이니 공자가 알바 아니다, 라는 주석만을 남기고 있다[玄菟樂浪武帝四郡之名, 非孔子之所得知也].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가 사는 삶의 영역을 질서있는 문명국가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친숙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은 혼란스러운 오랑캐국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문명국가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자바섬이나, 아프리카나,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에게도 자기 삶의 영역 이외의 세계는 오랑캐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한말 한국인에게 맨해튼은 분명 오랑캐의 나라였다. 공자가 그 주변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삶의 영역은 역시 중원(中原)이다. 그것은 황하 중류지역인 것이다. 이 지역 이외의 미지의 영역은 오랑캐영 역일 수밖에 없다. 중원은 코스모스(cosmos)이고, 중원 밖은 카오스(chaos)일 수밖에 없다.

 

     
구이(九夷)
chaos
중원(中原)
cosmos
구이(九夷)
chaos
     

 

그러나 공자는 코스모스에 안주하고 싶지를 않는 것이다. 그는 항상 모험을 감행하며 새로운 미지의 영역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카오스! 구이(九夷)의 세계에 가서 살고 싶다! 이때의 반론의 핵심은 누추하다[]’이다. ‘누추하다는 것은 중원이 문명적으로 우월하며 구이의 세계에는 문명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는 선입견이다. 공자는 여기 문명의 본질을 제시한다. 문명은 인간 밖의 사회체제로서 존재하는 고정된 질서가 아니라 군자의 덕을 함양한 인간의 내적 조건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곳이든, 어느 사회든 군자가 그곳에 거하면, 바로 그곳에서 문명이 싹트고 문명이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군자가 그곳에 거하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을까보냐!’ 참으로 위대한 공자의 언설이다.

 

아무리 하꼬방 동네 판잣촌에 가서 살아도 군자가 그곳에 산다면 그 사는 판잣촌이 문명의 센터가 되고 인간의 낭만이 깃드는 곳이 될 수가 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 살면 그 집이 금방 퇴락하여 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살면 구들도 새로 놓고 도배질도 철철이 하고 책상도 짜서 놓고 책도 들여놓고 그윽한 정취가 스며들게 된다. 사람이 가보고 싶은 곳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문명이요 문화다. 이 장은 5-6과 함께 공자의 진취적 정신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명제로서 해석해야 마땅하다. 이 지구상에 어디엘 가든지 반드시 한국인들이 있다. 한국인의 진취적 기상은 참으로 놀랍다. 아무리 편벽한 곳이라도 그곳에서 새로운 자기의 코스모스를 일궈내는 것이다. 나는 아프리카 편벽한 한 구석에 사는 한국인을 만났을 때 바로 공자의 이 말을 떠올린 적이 있다. 공자가 구이에서 살고 싶어했던 그 진취적 기상이 유교문명에서 자라난 그들의 핏줄에 스며든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동방의 이()에 아홉 종이 있었다. 구이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은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있고 싶다(5-6)고 하신 말씀과 같다. 구이의 나라라 할지라도 군자가 그곳에 거하면 또 새로운 문명이 발생하는 것이니, 어찌 누추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東方之夷有九種. 欲居之者, 亦乘桴浮海之意. 君子所居則化, 何陋之有?

 

 

문명(文明)과 문화(文化)는 다르다. 문명은 명()이다. 그것은 어둠에 대하여 밝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코스모스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빛(φωτισμός)의 세계에 대하여 코스모스를 어둠(σκοτίᾱ)으로 규정하지만 우리 동방사상은 코스모스를 항상 빛으로 밝음으로 명()으로 인식한다. 선왕지도(先王之道)는 주로 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주력하는 것은 문화(文化)이다.

 

문화의 핵심은 화()에 있다. 문명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바로 그 화()의 문제가 동학(東學)에서 말하는 다시 개벽의 문제인 것이다. ()가 없으면 정체되고 고착화되며 생명력을 잃고 축소되다가 사멸되는 것이다. ()이 화()를 도입하지 못하고 다시 암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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