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Homo Rudens)
그러니 이런 악동의 눈에 길 위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건이 유쾌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한번은 길에서 소낙비를 만나, 비를 피하느라고 점포에 들러 차대접을 받고 있었다. 점포의 앞마루에 여인네들 다섯이 부채에 붉은 물감을 들여 처마 밑에 말리고 있는데 별안간 말몰이꾼 하나가 알몸으로 뛰어들었다. “머리에 다 해어진 벙거지를 쓰고, 허리 아래에 겨우 한 토막 헝겊을 가릴 뿐이어서 그 꼴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고 그야말로 흉측했다.” 마루에 있던 여인들이 왁자그르 웃고 지껄이다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일거리를 버리고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주인이 화가 치밀어 팔을 걷어붙이고는 뺨을 한 대 때렸다. 말몰이꾼의 말인즉슨, “말이 허기가 져서 보리찌꺼기를 사러 왔는데 당신은 왜 공연히 사람을 치오” 한다. 주인은, “이 녀석, 예의도 모르는 녀석. 어찌 알몸뚱이로 당돌하게 구는 거야” 하자, 말몰이꾼이 문 밖으로 뛰어나가버린다. 주인은 분이 풀리지 않아 비를 무릅쓰고 뒤를 쫓아 나가자, 말몰이꾼도 ‘열받아서’ 주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주인은 그만 흙탕 속으로 나가떨어지고, 온몸이 진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돌아온다. 분풀이할 곳을 찾고 있던 차 말몰이꾼과 동행인 연암과 눈이 마주쳤다. 사태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연암은 흡친 위기감을 느낀다. 여차하면 한 대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연암의 전략은?
먼저, 넌지시 눈을 내리뜨고 얼굴빛을 가다듬어 늠름히 범하지 못할 기세를 보인다. 일단 분위기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심사다. 그 다음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면서 정중하게 사과한다. “하인이 매우 무례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만 다시 마음에 두지 말으시지요.” 우아하게 감동시킨다는 속셈이다. 과연 작전이 적중했다. 주인이 곧 노염을 풀고 웃으며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선생, 다신 그 말씀 마십시다” 한다. 위기탈출! 순발력과 의뭉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 한번은 동관역에 머무를 때 얼치기 점쟁이와 만난 적이 있다. 복채나 건지려고 연암에게 접근했는데, 연암은 사주나 관상 같은 걸 허망하다고 여기는 터라 사주를 내어주지 않았다. ‘썰렁한’ 대화를 주고받다 점쟁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 안에 역대 유명한 인물들의 사주를 적어놓은 책자가 있는 걸 보고 연암이 열심히 베끼기 시작했다. 도중에 돌아와 그걸 본 점쟁이는 종이를 빼앗아 찢으면서, “천기를 누설하면 안 돼”하며 노발대발이다. 연암은 한 번 껄껄 웃고 일어나 사관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다. 그런데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문장이 이어진다. “손에는 오히려 찢긴 나머지 종이쪽이 있었다.” 그러니까 점쟁이가 종이를 찢을 때, 연암도 안 빼앗기려고 힘깨나 쓴 것이다. 천기누설이라는 점쟁이의 말도 어이없지만, 찢어진 종이를 챙겨오는 연암의 행동은 또 얼마나 황당한지!
솔직히 말하면, 이런 이야기는 굳이 기록될 필요가 없다. 아마 이전에 연행을 다녀간 사대부들도 이 비슷하게 적잖은 트러블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표체계에는 이런 식의 삽화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경험과 문자 사이의 엄청난 괴리. 그러나 연암의 연행록에는 이런 사건들이 어엿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진심으로 이런 농담과 해프닝들을 즐겼고, 게다가 한술 더 떠 가감ㆍ첨삭ㆍ윤색까지 시도했다. 따라서 누군가 『열하일기』를 이렇게 규정한다 해도 지나친 과장이라고 탓할 수는 없으리라. ‘호모 루덴스(Homo Rudens, 놀이하는 인간)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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