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인들과의 우정
중국 장사치들과의 만남이 아름답고 애틋한 ‘우정의 소나타’라면, 선비들과의 교제는 일종의 ‘지적 향연(symposium)’이다. 고금의 진리, 천하의 형세,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을 두루 망라하는 색채로 비유하면 전자는 경쾌한 블루 톤에, 후자는 중후한 잿빛 톤에 해당될 것이다.
연암은 서울을 떠나는 순간부터 중원의 선비들과의 만남을 준비한다.
내가 한양을 떠나서 여드레 만에 황주에 도착하였을 때 말 위에서 스스로 생각해보니, 학식이라곤 전혀 없는 내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위대한 학자라도 만나면 무엇을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고 질의를 할 것인가 생각하니 걱정이 되고 초조하였다.
余離我京八日 至黃州 仍於馬上 自念學識固無藉手 入中州者 如逢中州大儒 將何以扣質 以此煩寃
그래서 예전에 들어서 아는 내용 중 지전설과 달의 세계 등을 찾아 매양 말고삐를 잡고 안장에 앉은 채 졸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풀어내었다. 무려 수십만 마디의 말이, 문자로 쓰지 못한 글자를 가슴속에 쓰고, 소리가 없는 문장을 허공에 썼으니, 그것이 매일 여러 권이나 되었다. 비록 말이 황당무계하긴 하나, 이치가 함께 붙어 있었다.
遂於舊聞中 討出地轉月世等說 每執轡據鞍 和睡演繹 累累數十萬言 胷中不字之書 空裏無音之文 日可數卷 言雖無稽 理亦隨寓
말 안장에 있을 때는 피로가 누적되어 붓을 댈 여가가 없었으므로, 기이한 생각들이 하룻밤을 자고 나면 비록 남김없이 스러지긴 했지만, 이튿날 다시 가까운 경치를 쳐다보면 뜻밖에 기이한 봉우리가 나타나는 듯 새로운 생각이 샘솟고, 돛을 따라 새로운 세계가 수시로 열리는 것처럼, 정말 긴 여정에 훌륭한 길동무가 되고 멀리 유람하는 길에 지극한 즐거움이 되었다. 「곡정필담(鵠汀筆談)」
而鞍馬增憊 筆硯無暇 奇思經宿 雖未免沙蟲猿鶴 今日望衡分外奇峰 又復隨帆劈疊無常 信乎長途之良伴 遠游之至樂
물론 예상과 달리 그런 만남은 연경이 아니라, 열하에서 이루어졌다. 「곡정필담」이 그 보고서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텍스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곡정 왕민호인데, 그는 강소성 출신으로 54세가 되도록 과거에 응하지 않은 재야선비이다. 그에 대해 연암은 이렇게 평한다. 그는 “진실로 굉유(宏儒)요 괴걸(魁傑)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종횡반복이 많았다[彼固宏儒魁傑 然多縱橫反覆].” “더러는 동쪽을 가리키다가 서쪽을 치고[或有指東擊西]”, “나를 치켜 올리면서 동시에 억눌러서 말을 꺼내게 했으니, 굉장히 박식하고 말을 좋아하는 선비라 이를 만하다. 하지만 백두(白頭)인 채 궁한 처지로 장차 초목으로 돌아가려 하니 정말 슬픈 일이다[以觀吾俯仰 以導余使言 可謂宏博好辯之士 而白頭窮邊 將歸草木 誠可悲也].”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그를 보며, 연암의 심정 또한 착잡했던 모양이다.
왕민호 외에도 무인 출신 선비인 학지정, 황제의 시벗이자 고위급 관직에 있는 윤가전, 강희제의 외손인 몽고계 파로회회도(破老回回圖) 등이 열하에서 사귄 친구들이다. 대개 성격들이 엇비슷한 편인데, 이들 그룹 가운데 ‘튀는’ 인물이 하나 나온다. 추사시라는 ‘광사(狂士)’가 그다. 생긴 건 멀쩡한데 유교, 불교, 도교를 넘나들며 난감한 질문만 골라 하고, 기껏 대답하면 냉소로 일관하는 ‘비분강개형’ 인물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귀국은 불교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나요[貴國佛敎 始於何代]?”
“귀국의 사대부들은 세 가지 교 가운데, 무엇을 가장 숭상합니까[貴國士大夫於三敎中 最崇何敎]?”
“귀국에서도 예전에 신승(神僧)이 있었나요. 그 이름을 듣고 싶습니
다[貴國古亦有神僧 願聞其名].” 「황교문답(黃敎問答)」
연암으로서는 참 난처한 질문이다. 유교 중에서도 가장 교조적인 주자학을 신봉하고, 게다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는 조선의 선비에게 웬 불교?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 귀퉁이에 있긴 하지만, 풍속은 유교를 숭상하여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선비와 걸출한 학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생이 묻는 바는 이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승에 관한 것이로군요. 우리나라 풍속은 이단의 학문을 숭상하지 않아 신승이 없기 때문에 실로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敝邦雖在海隅 俗尙儒敎 往古來今 固不乏鴻儒碩學 而今先生之問 不及於此 乃反神僧之是詢 弊邦俗不尙異端之學 則固無神僧 在固不願對也
이렇게 침착하게 답하자, 이번에는 느닷없이 유학자들을 마구 비판한다.
지금의 학자들은 죽어도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한번 학문이라는 영역을 싸잡아쥐면 더욱 육경이라는 벽돌을 쌓아서, 보루를 견고하게 만들어놓고는 때때로 여러 사람의 말을 바꿔치기해 자신의 깃발을 새것처럼 꾸밉니다. 절반은 주자의 학문을 따르고, 절반은 그 반대 학파인 육상산의 학문을 따르면서 모두가 한 학파에 숨어들어서 머리를 내밀었다가 숨었다가 하는 모습이 마치 호숫가 갈대숲의 도처에 숨어서 출몰하는 도적놈과 같습니다. 책의 좀벌레나 뒤지던 사람을 양성해서 성(城)이나 사직에 붙어사는 쥐새끼나 여우처럼 만들어서는 고증학이란 학문을 가지고 붙어살게 합니다.
今之儒者 亡不出境 兜攬釆地 益築六經 以堅其壁壘 時換群言 以新其旌旗 半朱半陸 俱爲逋主 頭沒頭出 遍是水泊 養蠧魚爲狐鼠 則攷證爲其城社
반면에 잘 달리는 준마를 억눌러서 느려터진 둔마를 만들어 놓고는 훈고학이라는 학문을 가지고 그 입에 재갈을 채워 찍소리도 못하게 만듭니다. 혹 여기에 반발하여 단단히 무장을 하고 깊숙이 쳐들어가 공격을 하다가는 도리어 공격과 겁탈을 당하여, 그 형세가 결국에는 말에서 내려 결박을 당하고 두 무릎을 땅에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유학자라는 사람은 아주 두렵습니다. 겁이 납니다. 겁이 나요. 저는 평생 유학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抑騏驥爲鴑駘 則訓誥爲其鉗橛 或有懸軍深入 反遭攻刦 其勢不得不下馬受縛 雙膝以跪 今之儒者 絶可畏也怕也怕也 敝平生 不願學儒也
자못 논리가 엄정하고 치밀하다. 육상산은 주자와 동시대 철학자로 훗날 양명학이라 불리는 학설의 원조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주자의 성리학에 맞서 ‘심(心)’을 테제로 표방한 까닭에, 그의 학문을 ‘심학’이라고도 부른다. ‘반은 주자요, 반은 육상산’이라는 말은 서로 입장이 대립되는 두 학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당시 유학자들의 얄팍한 처세술을 나름대로 짚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게 진심이 아니라는 데 있다. 여기에 동조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또 앞에서 던진 물음들과 이 진술 사이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처럼 그는 “성인도 욕하고 부처도 욕하여, 저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욕을 해대야만 분이 풀리는[罵聖罵佛 惟意所欲 痛罵一頓]” 그런 유의 인물이다. 그러니 연암 같은 노련한 인물로서도 맞장구를 쳐야 할지, 냉담하게 무시해야 할지 몰라 영 헷갈릴밖에. 그럼에도 연암은 그의 괴팍함을 잘 참아내는 한편, 그의 개성을 낱낱이 묘파해놓았다. 추사시 역시 『열하일기』를 장식하는 개성있는 엑스트라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