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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4부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 2장 시선의 전복 봉상스의 해체, 우리의 술문화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4부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 2장 시선의 전복 봉상스의 해체, 우리의 술문화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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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술문화

 

 

시점변환이야말로 연암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 중 하나다. 말하자면, 타자의 눈을 통해 조선의 문화나 습속을 바라봄으로써 익숙한 것들을 돌연 낯설게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사신들의 의관은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건만,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도리어 연극하는 배우 같다고 한다. 또 도포와 갓과 띠는 중국의 중옷과 흡사하다. 연암이 변관해와 더불어 옥전의 어느 상점에 들어갔더니, 수십 명이 둘러서서 자세히 구경하다가 매우 의아하게 여기면서 서로 말하기를, “저 중은 어디에서 왔을까한다. 유학자보고 중이라니?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중국의 여자와 승려와 도포들은 옛날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조선의 의관은 모두 신라의 옛제도를 답습한 것이 많았고, 신라는 중국제도를 본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한 까닭에 민간에서는 중국의 중옷을 많이 본떠서 1천여 년을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변할 줄을 모른다”.

 

입만 열면 공자, 맹자, 주자를 읊조리면서 정작 패션은 천 년 전 불교적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표리부동’, 그런데도 조선 사람들은 도리어 중국의 승려가 조선의 의관을 본떴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겨울에도 갓을 쓰고 눈 속에도 부채를 들어 타국의 비웃음을 사고 있으니, 주제파악을 못해도 한참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예의에 살고 예의에 죽는다할 정도로 프라이드가 강한 조선 선비들의 복장이 사실은 중국의 중옷에서 유래했다는 이 역설, 연암은 냉정한 어조로 그 연원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마치 사건 혹은 통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그것의 자명성을 해체시켜 버리는 니체의 계보학을 연상시킬 정도로 분석의 틀이 치밀하다.

 

다음과 같은 경우도 그런 예 중 하나이다.

 

 

술 마시는 풍속은 세상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험하다. 술집이라고 하는 곳은 모두 항아리 구멍처럼 생긴 들창에 새끼줄을 얽어서 문을 만든다. 길 왼쪽 소각문에 짚을 꼬아 만든 새끼로 발을 드리우고 쳇바퀴로 만든 등롱(燈籠)을 매달아둔다. 이런 건 필시 술집이라는 표시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東人飮酒毒於天下 而所謂酒家 皆甕牖繩樞 道左小角門 藁索爲簾 簁輪爲燈者 必酒家也

 

 

중국의 술집들이 지닌 멋드러진 운치를 논한 뒤에 이어지는 말이다. 조선의 술집이란 운치는커녕 비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술잔은 커다란 사발 크기인데, “반드시 이마를 찌푸리며 큰 사발의 술을 한 번에 들이켠다. 이는 들이붓는 것이지 마시는 게 아니며, 배부르게 하기 위한 것이지 흥취로 마시는 게 아니다[必以大椀蹙額一倒 此灌也非飮也].” 옳거니! 소위 대학가에서 지금도 횡행하고 있는 사발식의 전통이 연암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술을 한번 마셨다 하면 반드시 취하게 되고, 취하면 바로 주정을 하게 되고, 주정을 하면 즉시 싸움질을 하게 되어 술집의 항아리와 사발들은 남아나질 않는다[故必一飮則醉 醉則輒酗 酗則輒致鬪敺 酒家之瓦盆陶甌 盡爲踢碎].” 이 또한 지금껏 면면히 이어지는 배달민족의 전통아닌가(^^).

 

알코올 중독의 기준은 술의 양이 아니다. 얼마를 먹었건 자기통제력이 상실되면, 그건 모두 알코올릭(alcoholic)’의 상태라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술문화는 범국민적 알코올릭을 지향하는 셈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이 비슷한 소설 제목이 유행했던 기억이 난다. 맞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엽기적으로 술을 마시는지를 우리 자신은 알지 못한다. 다른 것과 견주어질 때, 그때 비로소 불을 보듯환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연암이 겨냥하고 있는 바도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이렇게 패러독스를 구사하고 있는 와중에도 연암은 이주민(李朱民)이라는 친구를 떠올린다. 술주정이 심해서 함께 동행하지 못했지만, “만리타향에서 술잔을 잡으니 뜬금없이 그 친구가 생각난다. 이주민이 오늘 이 시간 어느 술자리에 앉아 왼손으로 술잔을 잡고 만리타향에 노니는 나를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萬里他鄕 忽思故人 未知朱民今辰此刻 坐在何席 左手把杯 復能思此萬里遊客否].” 고질적 습속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해대면서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또 어쩌지 못하는 이 따뜻한 가슴! ‘알코올릭에 대해 한참 흥분하며 연암의 논의를 따라가고 있던 나 또한 이 대목에선 빙그레 미소를 짓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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