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첸라마의 동불도 받지 못하는 편협함
어떻든 이처럼 외부자 혹은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혹은 보이지 않던 면목들이 ‘클로즈 업’ 된다. 시선의 전복을 통한 봉상스(bon sens)의 해체! 이런 식의 수법은 단지 풍속의 차원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을 평가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열하에서 판첸라마가 동불(銅佛)을 하사했을 때, 조선 사신단이 마치 꿀단지에 손 빠뜨린 것처럼 당혹스러워하며 한바탕 소동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일에 대해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 구리 불상도 반선이 우리 사신을 위해 먼 길을 무사히 가도록 빌어주는 폐백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이라도 부처에 관계되는 일을 겪으면 평생 누가 되는 판인데, 하물며 이것을 준 사람이 바로 서번의 승려임에랴. 사신은 북경으로 돌아와서 반선에게서 폐백으로 받은 물건을 역관들에게 다 주었고, 역관들도 이를 똥이나 오물처럼 자신을 더럽힌다고 여기고 은자 90냥에 팔아서 일행의 마두에게 나누어주었고, 이 은자를 가지고는 술 한잔도 사서 마시지 않았다. 반선이 준 선물을 조촐한 물건이라고 굳이 말한다면 조촐하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다른 나라의 풍속으로 따져본다면 물정이 어두운 촌티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행재잡록(行在雜錄)」
乃法王所以爲我使祈祝行李之上幣也 然而吾東一事涉佛 必爲終身之累 况此所授者 乃番僧乎 使臣旣還北京 以其幣物盡給譯官 諸譯亦視同糞穢 若將凂焉 售銀九十兩 散之一行馬頭輩 而不以此銀 沽飮一盃酒 潔則潔矣 以他俗視之 則未免鄕闇
이미 살펴보았듯이, 연암 역시 티베트 불교나 판첸라마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밀교적 분위기는 연암으로서도 흔쾌히 긍정하기 어려운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그 역사와 원리를 촘촘히 기록했을뿐더러, 이처럼 판첸라마의 선물에 대해서도 조선인들의 편협함에 대해 냉철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시선에서 보면 정사에서 마두배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신단은 일종의 ‘돌격대’처럼 보인다.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소중화(小中華)주의의 깃발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돌격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