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은유
초월적인 중심을 전복하고 현실의 변화무쌍한 표면을 주시할 때 진리 혹은 선악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허무주의(nihilism)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무화라는 벡터(vector)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변화하는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때에 맞게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시켜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편이 바로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열하로 가는 무박나흘의 대장정’을 아직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비몽사몽 상태를 연암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솔솔 잠이 쏟아져서 곤한 잠을 자게 되니 천상의 즐거움이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듯 달콤하기 그지없다. 때로는 가늘게 이어지고, 머리는 맑아져서 오묘한 경지가 비할 데 없다. 이야말로 취한 가운데 하늘과 땅이요, 꿈 속의 산과 강이었다. 바야흐로 가을 매미 소리가 가느다란 실오리처럼 울려 퍼지고, 공중에선 꽃들이 어지럽게 떨어진다. 깊고 그윽하기는 도교에서 묵상할 때 같고, 놀라서 깨어날 때는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와 다름이 없었다. 여든한 가지 장애(八十一難, 불교에서 말하는 81가지의 미혹)가 순식간에 걷히고, 사백네 가지 병(四百四病,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몸에 생기는 모든 병)이 잠깐 사이에 지나간다.
或旖旎婀娜至樂存焉 或簾纖巧慧 妙境無比 所謂醉裡乾坤 夢中山河 秋蟬曳緖空花亂落 其冥心如丹家內觀 其警醒如禪牀頓悟 八十一難 頃刻而過 四百四病 倐忽以經
이런 때에 추녀가 높은 고대광실에서 한 자나 되는 큰상을 받고 아리따운 시녀 수백 명이 시중을 든다 해도, 차지도 덥지도 않은 온돌방에서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베개를 베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술 몇 잔에 취한 채, 장주도 호접도 아닌 그 사이에서 노니는 재미와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當是時也 雖榱題數尺 食前方丈 侍妾數百 不與易不冷不溫之堗 不高不低之枕 不厚不薄之衾 不深不淺之杯 不周不蝶之間矣
참을 수 없는 졸음의 경지를 ‘도교의 내관’ ‘선가의 돈오’에 비유하는 것도 독보적이거니와, ‘차지도 덥지도 않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깊지도 않지도 않은’ ‘장주도 호접도 아닌’ 등으로 변주되는 ‘사이’의 수사학은 한층 돋보인다.
이처럼 연암은 ‘사이의 은유’를 즐겨 사용하였다. 예컨대 이런 묘사가 그런 경우이다.
별안간 먼 마을 나무숲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마치 맑은 물이 하늘에 고여서 어린 듯, 연기도 아니며 안개도 아니요, 높지도 낮지도 않고 늘상 나무 사이를 감돌며 훤하니 비치는 품이 마치 나무가 물 가운데 선 것 같고, 그 기운이 차츰 퍼지며 먼 하늘에 가로 비낀다. 흰 듯도 하고, 검은 듯도 한 것이 마치 큰 수정 거울과 같아서 오색이 찬란할뿐더러 또 한 가지 빛인 듯 기운인 듯 그 무엇이 있다.
이렇듯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저 뭐라 형용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넘어갈 상황에서 연암은 늘 그것이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음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장복이와 헤어지면서 이별론을 펼치는 장면 또한 그러하다. ‘저 강물은 내가 아노니,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으며, 잔잔하지도 않고 거세지도 않은 물결이 돌을 이끌어 안고 흐느껴 우는 듯하며’, ‘음산하지도 내려쪼이지도 않는 햇볕이 땅을 감돌아 어슴프레 해미가 끼고, 하수(河水) 위의 다리는 오랜 세월에 곧장 허물어지려 하’는데, ‘이 가운데 사람은 넷도 아니요, 셋도 아님에도 서로 묵묵히 말없는 이 이별이야말로 천하의 가장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으리라’ 뭐라고 꼭 짚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수사적 변주 속에서 이별의 애상이 한층 고조되는 것만은 분명,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깊은 밤 고북구의 한 성을 지날 때, 별빛 아래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글자를 쓸 때도 ‘사이’의 은유들이 반짝인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제때를 만난 가을인 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었으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이러한 언표들은 단순히 장식적 수사가 아니다. 대상이나 사실은 항상 경계에서 움직인다. 즉 명료하게 하나의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어의 명징함이 그런 식으로 ‘환(幻)’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연암이 현란할 정도로 ‘사이’의 은유를 구사하는 건 그러한 ‘환의 장막’을 뚫고 나가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그때 대상은 애매하게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으로 분사된다. 숨겨진 곳에서 길을 찾고, 길 밖에서 길을 찾는 이 전략은 사방으로 산포된 ‘복수의 길들’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사이’의 은유들은 연암 사유를 떠받치는 기저를 이룬다. 이 점을 좀더 파고들기 위해 『열하일기』 바깥의 텍스트들을 음미해보자. 먼저 「낭환집서(蜋丸集序)」, 장님이 비단옷 입고 대로를 걷는 것과 멀쩡한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 이 둘을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나은가? 이 황당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암은 먼저 ‘옷과 살’의 사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옛날에 황희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昔黃政丞自公而歸. 其女迎謂曰: “大人知蝨乎? 蝨奚生? 生於衣歟?” 曰: “然,” 女笑曰: “我固勝矣.” 婦請曰: “蝨生於肌歟?” 曰: “是也” 婦笑曰: “舅氏是我.”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夫人怒曰: “孰謂大監智, 訟而兩是.” 政丞莞爾而笑曰: “女與婦來. 夫蝨非肌不化, 非衣不傅, 故兩言皆是也. 雖然, 衣在籠中, 亦有蝨焉; 使汝裸裎, 猶將癢焉, 汗氣蒸蒸, 糊氣蟲蟲, 不離不襯衣膚之間.”
이 아리송한 변증에 대한 연암의 주석은 이렇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을 알 수가 있겠는가.” 자못 명쾌해 보이지만,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닌 ‘가운데’라니?
「공작관문고자서(孔雀館文稿 自序)」에서 들고 있는 ‘이명(耳鳴)과 코골기’의 비유는 한술 더 뜬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너 이 소리 좀 들어봐라. 내 귀에서 앵앵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爾聽此聲, 我耳其嚶, 奏鞸吹笙, 其團如星]!” 옆의 아이가 귀를 맞대고 귀 기울여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시골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피우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수레가 덜그덕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我無是矣]?”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해 연암은 이렇게 해석해준다.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있는데 더욱 심할 따름이다. 귀가 울리는 것은 병인데도 남이 몰라줄까 봐 걱정하는데,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코 고는 것은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면 성내는데, 하물며 병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중략)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의도에 가까울 것이다.
嗟乎己所獨知者, 常患人之不知, 己所未悟者, 惡人先覺, 豈獨鼻耳有是病哉? 文章亦有甚焉耳, 耳鳴病也, 閔人之不知, 况其不病者乎? (中略) 毋聽耳鳴醒我鼻鼾 則庶乎作者之意也.
이해되는가? 더 헷갈린다고? 맞다. 그러면 연암의 일차적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사이의 은유들을 통해 그가 의도하는 바는 어떤 해결책이나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물음을 구성해내라는 것,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면에 숨겨진 성격을 보려 하고, 그것을 인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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