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북벌론이란 관념에 갇히지 않고서
‘사이의 은유, 차이의 열정’을 당대의 첨예한 이념적 사안들에 투사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가 중화주의, 북벌, 주자학 따위를 어떻게 비틀고 헤집고 다녔는지를 대강 살펴본 바 있다. 그걸 바탕 삼아 몇 가지 첨점들을 좀더 탐색해 보자. 때론 와이드 비전으로, 때론 현미경을 들이대고서.
당시 청왕조 치하의 한족 지식인들의 고심은 이런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절대 만주족 오랑캐의 통치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들이 명왕조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일까. 천하를 통치하는 건 하늘의 뜻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오랑캐로 하여금 천하를 지배하게 한 그 하늘의 뜻은 대체 뭐란 말인가.
「곡정필담(鵠汀筆談)」에서 연암은 묻는다.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라고 합니다”만 “흥하고 망하는 즈음에는 귀신의 조화마저도 거짓과 진실이 번갈아 섞이고” “하늘이 나라를 주려는 사람에게 꼭 말을 하고서 주는 것은 아니겠으나, 몰래 붙들고 보호해주어 마치 간절하고 은혜로운 뜻이 있는 것처럼 합니다.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그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잔인하고 참혹하게 하기를 마치 철천지원수를 갚듯이 하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물론 그에 대한 정답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이걸 단서로 삼아 사유의 길을 모색해갈 뿐이다.
곡정 왕민호의 말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무릇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양쪽에서 줄을 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줄을 당기다가 줄이 끊어지면, 끊어지는 곳 가까이 처했던 쪽이 먼저 넘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거스르는 것과 순종하는 차이, 즉 밀고 당기는 차이는 있어도 어느 쪽이 옳다든지 어느 쪽이 틀렸다든지 하는 것은 없”는 법이니, “의리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라고.
그러면 청의 건국 역시 그런 것인가?
본 청나라 조정이 나라를 얻은 정정당당함은 천지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나라를 처음 세우는 사람은 누구라도 혁명을 하는 시점에서 상대방을 원수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세우는 처음에 전 왕조를 위해 도리어 원수를 갚아주는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는 오직 우리 왕조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중략)
本朝得國之正 無憾於天地刱業者 莫不爲仇於革命之際 國朝還有大恩於定鼎之初 爲前朝報讎 惟我朝是已
단지 천하를 위하여 대의를 밝히고 나라의 원수를 갚았으며, 백성을 피바다와 해골더미의 산에서 건져내려고 했기에, 하늘이 편을 들고 백성이 따랐습니다. 「곡정필담(鵠汀筆談)」
只爲天下明大義復大仇 拯救斯民於血海骨山之中 天與之 民歸之
연암은 논변의 끄트머리에 이렇게 주를 달아놓았다. “그는 매양 청의 창건이 정당하다고 말끝마다 외고 있으나 그래도 이야기할 때는 때때로 자기의 본심을 드러냈으니, 특히 역대 왕조의 역순과 성패의 자취를 빌려서 이리저리 자기의 회포를 표시한 것이다[雖極口每誦淸得國之正 談說之際 時露本情 特借歷代逆順成敗之迹 以俯仰感慨 ]”라고.
만주족 오랑캐의 통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순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곤혹스러움. 물론 연암 같은 조선의 선비들 역시 그런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 청나라는 명나라의 옛 신하들을 쓰다듬고 사해를 하나로 여겨, 우리나라에 혜택을 보태어준 것 또한 여러 세대가 지났다. 금이 조선에서 나는 물산이 아니라고 하여 공물의 물품에서 빼주었고, 무늬가 있는 조선 말이 쇠약하고 작다고 하여 면제시켜주었으며, 쌀ㆍ모시ㆍ종이ㆍ돗자리의 폐백도 해마다 바치는 양을 감해주었다. 근년 이래로는 칙사를 내보내야 할 일도 관례대로 적당히 문서로 처리함으로써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번거로운 폐단을 없애주었다.
今淸按明之舊 臣一四海 所以加惠我國者 亦累葉矣 金非土產則蠲之 綵馬衰小則免之 米苧紙席之幣 世減其數 而比年以來 凡可以出勅者 必令順付以除迎送之弊
이번에 우리 사신이 열하에 올 때에는 특별히 군기대신을 파견하여 길에서 맞이하도록 하였고, 사신이 천자의 뜰에 설 때에는 청나라 대신과 함께 서도록 반열을 명했으며, 연희를 구경할 때에는 조정의 신료들과 나란히 즐기게 해주었다. 또 조서를 내려, 정식 사신이 올리는 공물 이외에 특별 사신의 토산품은 바치지 말도록 면제해주었다. 이는 실로 전에 볼 수 없던 성대한 특전으로, 명나라 시절에도 받지 못했던 대우이다. 「행재잡록(行在雜錄)」
今我使之入熱河也 特遣軍機近臣道迎之 其在庭也 命班于大臣之列 其聽戱得比廷臣而宴賚之 又詔永蠲正貢外別使方物 此實曠世盛典 而固所未得於皇明之世也
‘중화/오랑캐’, ‘조선/청’ 이런 식의 이분법은 지식인들을 맹목으로 만든다. 그래서 청나라가 베푸는 호의에 대해서도 눈을 감게 만든다. 편협한 소중화(小中華), 조선/호탕하고 유연한 오랑캐, 청 ―― 실제 현실은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소중화주의에 사로 잡히면 잡힐수록 청의 대국적 유연함은 더한층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18세기 조선의 비극이자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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