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산’이 있었던 자리
비평사적 관점에서 볼 때 문체반정(文體反正)은 하나의 특이점이다. 일단 ‘문체와 국가장치’가 정면으로 대결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그 사건으로 인해 18세기 글쓰기의 지형도가 첨예한 윤곽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열하일기』가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었고, 연암이 정조의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피해갔음은 이 책 2부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때 다산은 어디에 있었던가?
혈기방장한 20대 후반을 통과하면서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고 있었던 다산은 문체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이런 책문을 올린다.
신은 혜성(彗星)ㆍ패성(孛星)과 무지개 흙비 오는 것을 일러 천재(天災)라 하고 한발 홍수로 무너지거나 고갈되는 것을 일러 지재(地災)라 한다면, 패관잡서는 인재(人災)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 생각합니다. 음탕한 말과 더러운 이야기가 사람의 심령을 방탕하게 하며, 사특하고 요사스런 내용이 사람의 지식을 미혹에 빠뜨리며, 황당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사람의 교만한 기질을 신장시키며, 화려하고 아름답고 쪼개지고 잔다란 글이 사람의 씩씩한 기운을 녹여버립니다. 자제가 이것을 일삼으면 경사(經史) 공부를 울타리 밑의 쓰레기로 여기고, 재상이 이를 일삼으면 조정의 일을 등한히 여기고, 부녀가 이를 일삼으면 길쌈하는 일을 마침내 폐지하게 될 것이니, 천지간에 재해가 어느 것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臣以爲彗孛虹霾 謂之天災 旱澇崩渴 謂之地災 稗官雜書 是人災之大者也 淫詞醜話 駘蕩人之心靈 邪情魅跡 迷惑人之智識 荒誕怪詭之談 以騁人之驕氣 靡曼破碎之章 以消人之壯氣 子弟業此而笆籬經史之工 宰相業此而弁髦廟堂之事 婦女業此而織紝組紃之功遂廢矣 天地間災害 孰甚於此
신은 지금부터라도 국내에 유행되는 것은 모두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오는 자를 중벌로 다스린다면, 거의 사설(邪說)들이 뜸해지고 문체가 한 번 진작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체책(文體策)」
臣謂始自今 國中所行 悉聚而焚之 燕市貿來者 斷以重律 則庶乎邪說少熄 而文體一振矣
참으로 과격한 논법 아닌가? 패관잡서를 천지간에 비할 데 없는 재앙이라 규정지으며 책자를 모두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오는 자를 중벌로 다스리라니. 마치 불순분자를 뿌리 뽑겠다는 ‘공안검사’의 선전포고가 연상될 정도로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진두지휘한 국왕 정조의 입장과 그대로 ‘오버랩’ 된다.
경상도의 작은 고을 안의현의 원님 노릇을 하던 중 배후조종자로 낙인찍힌 연암과 최선봉에서 발본색원을 외치는 다산, 한 사람이 부(富)도, 권세도 없는 50대 문장가라면, 또 한 사람은 막 중앙정계에 입문한 패기만만한 청년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대칭적 배치는 그들의 출신성분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히 전도되어 있다. 연암이 집권당파인 노론벌열층의 일원인 반면, 다산은 집권에서 배제된 남인의 일원이다. 그럼에도 연암은 애초부터 과거를 거부하고 권력 외부에서 떠돌며 문체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열어젖혔고, 그에 반해 다산은 정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일찌감치 정계에 진출하여 국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화려한 경력을 쌓는 도중이었다. 한쪽이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계속 미끄러져나간 ‘분열자’의 행보를 걸었다면, 다산은 주변부에서 계속 중심부를 향해 진입한 ‘정착민’의 길을 갔던 셈이다.
그간 연암과 다산을 동질적으로 느꼈던 건 많은 부분 둘 다 모두 정치적으로 낙척(落拓)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 혹은 국가권력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둘은 상호 역방향을 취한다. 연암은 권력으로부터 계속 비껴나간 데 비해, 다산은 정조의 사후 유배생활 기간에도 중앙권력을 향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원심력과 구심력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 차이는 단순히 지배권력에 저항했는가 여부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차이다. 근본적으로 무의식적 욕망 혹은 신체적 파장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들이 생산한 담론의 이질성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벡터의 차이와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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