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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15분 경을 외우는 공덕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15분 경을 외우는 공덕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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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경을 외우는 공덕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15-1.

수보리야! 여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 나절에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하고, 또 점심 때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하고, 다시 또 저녁 때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바쳐 보시한다 하자! 그리고 또 이와 같이 매일 매일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 겁의 시간 동안을 몸바쳐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우러나와 거슬리지 않는다면, 바로 이 사람의 복이 저 사람의 복을 이기리니, 하물며 이 경을 베껴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남에게 해설해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須菩堤!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以恒河沙等身布施, 中日分復以恒河沙等身布施, 後日分亦以恒河沙等身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以身布施. 若復有人聞此經典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受持讀誦爲人解說!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초일분이항하사등신보시, 중일분복이항하사등신보시, 후일분역이항하사등신보시, 여시무량백천만억겁이신보시. 약복유인문차경전신심불역, 기복승피. 하황서사수지독송위인해설!

 

 

앞서 언급했듯이 뜻글자를 가진 중국문명은 비디오를 중시한다고 했다. 허나 인도문명은 알파뱉으로 된 소리글자며, 중국어와는 달리 비성조의 굴절언어이다. 따라서 오디오가 더 중시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즉 눈에서 눈으로 전달되는 것보다는 귀에서 귀로 전달되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전달의 수단이라는 뜻이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는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을 비교할 때, 상대적인 평가이겠지만, 인도는 음악전통이 강하고, 중국은 회화전통이 강하다.

 

금강경을 통하여 계속 나오고 있는 이 수지(受持)’라는 낱말은 내가 받아 지닌다고 그냥 뜻대로 풀었지만, 그것은 ‘dhārayati’에 해당되는 말로써, 실제적 의미는 귀로 듣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memorization’이다. 다시 말해서 가르침을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간직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암기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의 세계는 인간의 마음을 매개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암기 이상의 위대한 신앙행위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소리를 내 마음에 새기는 작업인 것이다.

 

초일분(初日分)’, ‘중일분(中日分)’, ‘후일분(後日分)’은 이미 제1분 제2절에서 밥 때’(식시食時) 이야기를 할 때 이미 언급되었다. 하루를 삼분(三分)해서 생각하는 인도인의 생활습관을 나타낸 말이다. 그런데 정확한 시간이 규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아침, 점심, 저녁 정도의 아주 느슨한 개념이다. 즉 초일분ㆍ중일분ㆍ후일분을 합치면 하루종일의 뜻이 된다. 하루종일 쉼이 없이 몸바쳐 보시한다는 뜻이다.

 

무량백천만억겁(無量百千萬億劫)’의 원어는 ‘bahūni kalpa-koṭi-niyuta-śata-salhasrāṇi’. ‘kalpa’()’으로 음역되며, ‘무한히 긴 시간을 뜻한다. ‘koṭi’십만(十萬)’,‘()’으로 번역된다. ‘niyuta’‘nayuta’라고도 하는데, ‘()’, ‘나유타(那由他)’로 번역된다. ‘śata’()’이며, ‘sahasra’()’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의 천()의 십만(十萬)의 조()의 수많은 겁()’인데, 이는 () 곱하기, () 곱하기, 십만(十萬) 곱하기, () 곱하기의 그만큼의 겁()’이란 뜻이다. 이것은 즉 인간의 상상을 절()하는 무한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도인들의 과장법의 벽(), 아니, 그 공상의 스케일, 아니, 그런 엄청난 스케일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여유를 나타내는 말이다.

 

 

 

 

15-2.

수보리야! 요약하여 말하건대, 이 경은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가히 헤아릴 수도 없는가 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으니, 여래는 이를 큰 수레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설하고, 가장 좋은 수레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설하느니라.

須菩堤! 以要言之, 是經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 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수보리! 이요언지, 시경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변공덕. 여래위발대승자설, 위발최상승자설.

 

 

최상의 지혜는 최상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을 위하여 설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요, 깨달음의 지혜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하여 설하여질 수밖에 없다.

 

여기 대승(大乘)’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으나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mahāyāna’라는 표현은 없다. 즉 그런 식으로 개념화되고 있질 않다. ‘이것 위로는 아무것도 없는 도()를 향하는 사람들이란 표현만 있다. 그리고 소승(小乘)’과 짝지어 대비되고 있지도 않다.

 

여기 불가사의(不可思議)’란 말이 나오는데, 우리 일상언어에서 불가사의란 말은 이해가 되기 어려운 기묘한’ ‘신비로운의 상투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는 본시 한역불전의 매우 특이한 개념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개념이 격절되는 세계에 대한 형용이다. 따라서 불가사의경계(不可思議境界)’라든가, ‘불가사의공덕(不可思議功德)’이라든가 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 등의 표현이 성립한다. 황똥메이 교수가 그의 강의 대승불교시간에 그토록 즐겨 썼던 말이었다. 산스크리트어 ‘acintya’에 해당되는 불교전문 용어임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15-3.

여기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이를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나니,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고 가없는 불가사의 공덕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사람들은 여래가 깨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스스로 깨닫게 되리라.

若有人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則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

약유인능수지독송, 광위인설, 여래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불가사의공덕. 여시인등, 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

 

 

광위인설(廣爲人說)’()’ 자 같은 표현은 좀 후대의 전도주의적 성격(evangelistic tone)이 강화된 표현이다.

 

성서4복음서에도 이와 같은 전도주의적 입장은 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마가복음의 끝머리에 나타나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이야기도 원래 마가복음에 없던 텍스트로 후대에 구성되어 삽입된 것이다. 재미있게도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의 원형제일 먼저 쓰여짐, AD 65~75?으로 간주되는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부활이나 부활현현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보통 땅끝까지 전파하라" 운운하는 따위의 전도주의는 사도행전첫머리에 나온 말이다(1:8). 모두 종단조직의 이해와 관계되는 말이다.

 

이 절에서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개념화되어 있으므로 그 뜻을 풀어 번역하지 않았다. ‘불가사의공덕(不可思議功德)’은 물론 무슨 신비스러운 공덕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단절된 무아(無我)의 공덕을 이름이다.

 

끝 귀에 나오는 하담(荷擔)’걸머멘다는 의미인데, 해당되는 원문은 ‘samāṃśena bodhim dhārayiṣyanti’로 되어 있다. 우이 하쿠쥬(宇井伯壽, 1882~1963)타카쿠스(高楠順次郎)의 제자. 옥스포드대학에 유학. 동경제대 교수가 됨. 인도철학의 대가. 나카무라는 그의 제자는 한역(漢譯)에 의거하여 ‘samāṃśena’‘svāṃśena’의 오사(誤寫)로 보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자기의 어깨로써 보리를 걸머진다가 된다. 콘체의 번역은 ”All these beings, Subhuti, will carry along an equal share of enlightenment.“로 되어 있다.

 

티베트역문은 일체중생은 자기의 깨달음을 어깨에 멘다이다. 그 뜻을 종합해보면, ‘자기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어깨에 멘다는 관용구적 용법이 우리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으므로 나는 여래가 깨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스스로 깨닫는다로 의역하였다.

 

"어깨에 멘다는 것은 내 자신의 것으로 한다, 내 자산으로 만든다, 내 힘으로 삼는다의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 불교에는 자력(自力)과 타력(他力), 모든 가능성이 공존(共存)한다. 그러나 대승은 철저한 자력(自力)의 믿음 위에 서있다.

 

 

 

 

15-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작은 법에 만족하는 자들은 아견 인견 ㆍ중생견ㆍ수자견에 집착하게 되므로, 이 경을 들어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 읽고 외워 남을 위하여 해설하지도 못하게 되느니라.

何以故? 須菩堤! 若樂小法者, 著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則於此經不能聽受讀誦爲人解說.

하이고? 수보리! 약낙소법자, 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즉어차경불능청수독송위인해설.

 

 

낙소법자(樂小法者)’는 소승을 간접적으로 지칭한 말이다. 즉 당대의 아라한을 추구하는 부파불교의 비구들을 가리킨 말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소법(小法)의 법()에 해당되는 말이 없다. 한역의 낙소법자(樂小法者)’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로 직역되지만, ‘작은 법에 만족하는 자들로 표현을 달리하였다.

 

아상(我相)’아견(我見)’으로 바뀌어 있다. ‘아견(我見)’내가 실체로서 있다고 하는 견해의 뜻이다.

 

아견(我見)에 집착하게 되면 이 경()을 들어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청수聽受) 남을 위하여 해설할 수도 없다는 것은 만고의 명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학문학문의 원형은 문학(問學)’이다. 묻고 배움을 하는 기본자세에 관한 것이다. 우선 내가 없어야 남의 말이 들린다. 이것은 내 줏대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우선 남의 말을 들으려면 내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 도올이 지식이 많다고 말하는데, 나는 지식이 없다. 단지 내 서재에 책이 많아 그 책에 있는 정보들을 활용할 뿐이다. 단지 내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담을 수 있고, 남의 말들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주워담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점 금강경을 읽는 젊은이들이 명심하여 학문하는 방법의 가장 근원적인 자세로 삼아 주었으면 한다.

 

젊었을 때, 교회도 가고 절에도 가고, 설교도 들어보고 설법도 들어보고, 하나의 신앙체계에 고착되는 것보다는 아상ㆍ인상을 없애는 허기심(虛其心)’(노자(老子)3)의 공부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15-5.

수보리야! 어느 곳에든지 이 경이 있게 되면 바로 그곳이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기꺼이 공양하는 곳이라. 마땅히 알지니라! 이곳이 곧 탑이라는 것을!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드리고 주위를 돌면서 온갖 꽃의 향기로써 그곳에 흩으리라.”

須菩堤! 在在處處若有此經, 一切世間天人阿修羅所應供養. 當知此處則爲是塔, 皆應恭敬作禮圍繞以諸華香而散其處.”

수보리! 재재처처약유차경, 일체세간천인아수라소응공양. 당지차처즉위시탑, 개응공경작례위요이제화향이산기처.”

 

 

앞서 말했듯이, 이 마지막 절의 멧세지는 교회론의 궁극적 해결이다. 교회라는 조직에 집착하는 자들은, 교회는 지상에 이미 도래한 천국(天國)이며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AD 354~430, 초기 호교론자) 류의 교회론의 도그마에 빠져있는 자들은, 그리고 현실적으로 교회라는 조직을 관리해야만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 속에 들어가 있는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이러한 금강경의 말씀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조선의 청년들이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라! 무엇이 참 진리인 것인가를! 사도바울 선생은 평생을 천막지기’(tent-maker: 어릴 때 교회에서 쓰던 말. ‘짓다라는 동사에서 온 듯), 신도로부터 금전 한 푼 취함이 없이 홀로 사시지 않으셨던가? 금강경의 이 말씀, 그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성경구절 한 구절이 있는 바로 그 곳이 탑이요 십자가요 절이요 교회다! 어디 교회가 따로 있을 수 있을손가? 이것은 양천년(兩千年) 두 밀레니엄 동안을 내려온 엄연한 지혜의 전통이다. 바로 진리의 말씀이 있는 바로 그 곳이 탑이요 십자가요, 모든 사람과 신과 천사가 그 주위를 경배하고 아름다운 꽃의 향기로써 성화(聖化)하리라!

 

야곱이 돌베개를 쌓은 곳이 어디 씨멘트 건물 속이었던가? 예수가 사탄의 시험을 받은 고난의 간증처가 바로 허허 벌판 광야가 아니었던가? 세례 요한이 대승의 구원을 외친 곳이 그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요단강이 아니었던가? 사막의 이사야 선지자는 그 미세한 주님의 음성을 어디서 들었는가? 드높은 고딕성당의 파이프오르간 울림통에서라도 들었단 말인가? 어찌하여 대형교회로만 가는가? 어찌하여 허리띠 졸라매어 연보돈만 내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는가? 조선의 순결한 심령들이여! 그대들의 푸른 화단에 그대들의 성경한 구절을 심으라! 그 곳이 곧 드높은 교회당보다 더 드높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회당이 되리니.

 

공양(供養)’이란 말은 ‘pūjā’의 역어인데, 그 원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대접한다는 뜻이다. 종교적으로 위대한 경지에 간 사람들에게 공경스럽게 자구(資具) 등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 교단에서는 음식(飮食), 의복(衣服), 와구(臥具), 탕약(湯藥)의 사사공양(四事供養)이 설()하여졌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공양의 개념이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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