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에서 만난 귀신
혼자 터덜터덜 발걸음을 재촉하여 천안 풍세면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한문표기로는 ‘豊歲’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릴 적부터 ‘풍새’로 발음). 갑자기 천둥벼락이 치고 억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광풍을 피하기 위해 어느 집 대문 앞 추녀 밑에 서있다가 아무래도 그칠 비가 아니라서 하룻밤 신세를 질 요량으로 그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두드려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가 한참 후에나 빼꼼 집 대문이 열렸어요.
“이보시오, 이보시오, 문 좀 열어주오.”
“아니, 도대체 누구간데 이 빗속에 대문을 두드리시오?”
“예, 저 지나가는 객승이온데 ……”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쾅 닫고 빗장을 지르면서 빨리 가버리라고만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황당했지만 뭔가 속사정이 있겠지 하고, 다음 집 대문을 두드렸으나 쌀쌀한 반응이 다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10여 가호를 방문했으나 도무지 하룻밤 신세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보였습니다. 세상인심이 이토록 각박할 수 있나하고 한탄해봤자, 도무지 비바람은 계속 휘몰아쳤고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느 집 대문을 부숴져라 세차게 두드렸는데 나이가 지긋한 분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어둠 속에 대체 뉘시오?”
“저어 지나는 객승이온데 하룻밤 비를 피해 유했으면 합니다.”
“허어~ 이 스님이 큰일 날 소리하시는구려. 살고 싶으면 냉큼 도망치시오.”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런 야박한 소리를 하시오?”
“이보시요 스님, 나는 지금 스님에게 야박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오. 이곳은 도무지 스님이 머물 곳이 아니란 말이요. 이 동네 전체가 호열자 귀신에게 씌워서 집집마다 시체가 즐비하고 시체를 거둘 사람도 없어요. 산 사람의 동네가 아니고 죽음의 동네란 말이오, 송장이 되고 싶지 않거들랑 빨리 이 동네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도망치시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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