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법에 따라 받아지녀라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13-1.
이 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이 경을 받들어 지녀야 하오리까?”
爾時, 須菩堤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운하봉지?”
13-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라. 이 이름으로써 그대는 이를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라.”
佛告須菩堤: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불고수보리: “시경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콘체는 『금강경』이 바로 여기서 끝난다고 보고 있다. 사실 콘체의 이와 같은 분석은 공부를 깊게 한 사람의 통찰력 있는 문헌 비평적 발언이다. 나 역시 그 말에 동감한다. 실제로 『금강경』의 주된 암송(the main recitation)이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짧고 아쉬우니까 그 후에 딴 암송자들이 앞의 내용을 부연하여 반복하면서 계속 늘여갔을 것이다. 사실 내용적으로 보면 이 이후의 금강경은 여기까지의 내용의 사족(蛇足)에 불과하다.
콘체는 이후의 텍스트가 심히 혼란되고 논리적인 정합성이 깨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착(無着)ㆍ세친(世親)ㆍ 까말라실라(Kamalaśīla, ?~797?)가 모두 이 배면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을 곤혹스럽게 생각한 측면이 많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콘체는 이 13분(分)에서 29분(分)까지의 자기 번역을 자평하여 ‘도움이 안되고, 결착이 나지 않으며, 지루하고, 영감이 결여되어 있으며, 아주 적극적으로 혼란스럽다(unhelpful, inconclusive, tedious, uninspiring and positively confusing)’고까지 혹평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잡스러운 암송가들의 잡스러운 비빔밥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겨우 30장부터 32장까지 참신한 새 기운이 솟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나는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이후의 부분이 잡스러운 비빔밥 재탕일 수는 있으나, 이 뒷부분이 없다면 『금강경』은 진실로 소품에 머물렀을 것이고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마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반복은 반복이 아닌 변주며, 그것은 아마도 『금강경』의 기자들에 의하여 세심하게 오케스트레이션된 의도적 구성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의도를 살리는 방향에서 살을 붙이고 문법적 구도를 부드럽게 가다듬고 음색을 자연스럽게 하여 새롭게 연출해낼려고 노력할 것이다. 제현들의 봉지(奉持)하심이 있기를 비오나이다.
13-3.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설한 법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느냐?”
“所以者何? 須菩堤! 佛說般若波羅蜜, 則非般若波羅蜜.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칙비반야바라밀.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소설법불?”
‘여당봉지(汝當奉持)’에서 멋있게 끝난 피날레를 억지로 논리를 붙여내어 끌어간 느낌이 역력하다. 그러나 퍽으나 자연스럽게 논지를 펼쳐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판본의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나라 시중에서 통용되고 있는 많은 『금강경』이 라집역본(羅什譯本)임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잘못된 의취(義趣)에 따라 제멋대로 가감(加減)한 비선본(非善本)을 저본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큰 오류들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라집역본(羅什譯本)의 정본(正本)으로서는 우리 해인사 『고려대장경』본 이상의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저본으로 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본이 가장 가깝게 오는 것이지만 우리가 보아 왔듯이 해인사본의 정밀성에는 미칠 수가 없다. 바로 우리나라가 『금강경』의 세계적 기준이 되는 제일 좋은 판본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사람이면서 우리 『고려대장경』본을 들쳐 보지 않는다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나라 불교가 『금강경』을 가장 중요한 소의(所依)경전으로 삼으면서도 우리나라가 자체로 소유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고려대장경』본을 텍스트로 한 『금강경』이 역사적으로 희유(稀有)하다는 이 사실을 도대체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여기 3절의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 즉비반야바라밀(則非般若波羅蜜)’이 우리나라에서 나온 거개의 『금강경』에는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 즉비반야바라밀(卽非般若波羅蜜),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로 되어 있다. ‘즉(則)’ 자(字)가 ‘즉(卽)’으로 되어 있고, 끝에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이 첨가되어 있다. 무비 스님본이 그렇게 되어있고, 또 여러 판본을 비교연구하신 석진오 스님본이 그렇게 되어 있고, 이기영본은 나카무라본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대정본(大正本)의 모습대로 되어 있으나, 그 우리말 해석에는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라는 구문을 첨가해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물론 그 첨가해놓은 상황에 대한 특별한 설명도 없다. 다시 말해서 해석할 때 자기 자신의 텍스트를 보지 않고 한국의 통용본을 따랐다는 얘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있지도 않은 것을 적어놓은 아주 단순한 허위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 해인사 『고려대장경』본에도 『대정(大正)」본에도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이라는 구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가해(五家解)』에 기초한 세조(世祖) 언해본에 나타나고, 현암신서(玄岩新書)의 김운학(金雲學) 역주(譯註), 『신역(新譯)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속에 영인되어 있는 일제시대판본으로 보이는 현토본에 나타날 뿐이다. 고익진 선생(高翊晉先生)이 책임교열한 동국대학교 『한국불교전서』 속에 들어가 있는 득통(得通) 기화(己和)의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본 속에도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가 사소한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학문의 기저가 왔다갔다할 수 있는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사태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불교학 논문들이 『금강경』의 논리를 논구할 때에 바로 이 구절을 대표적인 것으로 인용하여 선(禪)의 사구게적(四句偈的) 논리나, 중론(中論)의 논리(論理)와 대비시키고 있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판본의 무검토에서 생겨난 단순한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문의 국제적 신빙도를 추락시키는 아주 부끄러운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이러한 사례들이 우리나라 논문에는 비일비재한 것이다. 나는 동경대학교(東京大學校) 중국철학과(中國哲學科)에서 학창생활을 거치면서 일본 학자들이 너무도 뼈저리고 가혹하게 이런 문제에 관한 비판의식을 축적해가면서 학문여정의 일보 일보를 쌓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관해 너무도 무지하고 무감각한 것이다.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하나쯤 삽입한다고 『금강경』」의 대의가 변화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금강경』의 의취가 더 일관되고 풍부해지는데 뭐가 그렇게 야단법석이냐?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그것이 오히려 들어가 있는 형태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다면 그것쯤 첨가된다고 『금강경』이 잘못될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말해야하는 것은 라집한역본(羅什漢譯本)의 사실이다. 학문에 있어서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첨가할 때는 그 첨가하는 정확한 이유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고려시대에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누가 했는가? 필부필녀가 했을 것이요, 선남선녀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목판이다. 한 글씨 한 글씨 써서 파넣은 것이다. 그런데 한 글자도 쉽사리 어긋남이 없는 선본(善本)이다. 우리에게 처절하게 반성되어야 할 문제는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석학들의 수준이 고려말기 대장경 판각을 관장했던 학인이나 공인들의 수준에 못미치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과연 우리의 학계가 이토록 기본을 무시하는 학통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기르고 있다면 이런 민족의 손끝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전자산업이나 여타 정밀산업이 나올리 만무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학문의 토대가 쌓여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본을 따라 잡느니 어쩌니 말하기 전에, 도서관에 가서 『고려대장경』의 판본을 정밀하게 검색해보는 기초적 학문의 자세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후학들에게 다시 한번 반성을 촉구한다. 고전이나 여타 문헌을 다룰 때 반드시 ‘판본’의 문제를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판본의 선택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타 판본들을 비교검토할 것이다. 논문을 쓸 때에, 우리나라에 ‘통용(通用)’되고 있는 어떠한 책도 함부로 반성없이 베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매우 단순하다. 조그만큼의 성의와 육체노동이면 족한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성실하게 조사해보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13-4.
수보리는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須菩堤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13-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천대천 세계의 모든 티끌이 많다 하겠느뇨?”
“須菩堤!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 是爲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 시위다불?”
13-6.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言: “甚多. 世尊!”
수보리언: “심다. 세존!”
13-7.
“수보리야! 그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비로소 세계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堤! 諸微塵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 제미진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비세계, 시명세계.”
우리나라의 여타 번역이 바로 이 ‘시명(是名)’의 해석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대로다. 반야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언어’의 세계를 부정한다. 그러나 비록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언어라는 방편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잘 뜯어보면 모순덩어리에 불과하다. 언어 그 자체가 파라독스 덩어리인 것이다. 아무 낙서도 없는 깨끗한 벽에 ‘낙서금지’라는 불필요한 팻말을 걸어놓는 것과도 같은 근본무명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은 언어를 ‘묘유적(妙有的)’으로 긍정한다. 우리는 티끌을 티끌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를 세계라 이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13-8.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뇨?”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견여래불?”
13-9.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삼십 이상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니이다.”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설삼십이상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13-10.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다 바쳐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또한 다시 여기 한 사람이 있어 이 경 중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지녀 딴 사람에게 설하였다 한다면 이 사람의 복이 더 많으리라.”
“須菩堤!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於此經中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수보리! 약유선남자선녀인, 이항하사등신명보시, 약복유인어차경중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심다.”
32상(三十二相, dvātriṃśan mahā-puruṣa-lakṣaṇāni)은 제5분에서 이미 상설(辭說)하였다.
이제 아름다운 반복의 선율이 펼쳐지고 있다. 다음의 분에서는 여태까지의 우리의 논리적 논의를 매우 감성적인 텃치로 바꾸어 우리를 감동시키면서 포괄적으로 총술(總述)하고 있다. 다음 분은 참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감동적이다. 콘체가 이를 혹평한 것은 콘체 자신의 감성의 메마름 때문일 것이다.
인용
'고전 > 불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강해 - 제15분 경을 외우는 공덕 (0) | 2021.07.12 |
---|---|
금강경 강해 - 제14분 상을 떠나 영원으로 (0) | 2021.07.12 |
금강경 강해 - 제12분 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0) | 2021.07.12 |
금강경 강해 - 제11분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0) | 2021.07.12 |
금강경 강해 - 제10분 깨끗한 땅을 장엄케 하라 (0) | 2021.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