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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애노희락의 심리학 -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4장 보편 / 특수, 주관 / 객관 본문

책/철학(哲學)

애노희락의 심리학 -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4장 보편 / 특수, 주관 / 객관

건방진방랑자 2021. 12. 2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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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보편 / 특수, 주관 / 객관

 

 

체질에 대한 기본 설명에서는 벗어나지만 묶어서 하나의 주제로 다루는 편이 체질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는 주제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 보편 / 특수, 주관 / 객관의 문제를 먼저 다루도록 하자. 이 각각을 어느 정도 중시하는가의 문제가 각 체질에 따른 기본 특성에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다뤘던 직관, 감성, 감각, 사고만큼이나 기본 성정(性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치우침은 사심(邪心)이 강해졌을 때 더 강화되는 면도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여기서 한 번쯤 다루고 나면 뒤의 이야기가 여러 가지로 쉬워진다. 각 체질에 대해 분석할 기본 도구를 하나 더 가지는 셈이기도 하고, 뒤에서 설명할 사심(邪心)에 대한 예비 정보도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생활에서 체질의 차이 때문에 주로 부딪히는 문제들 중에는 이 부분과 관련되는 것이 가장 많다. 여러 가지로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 보편 / 특수

 

 

보편은 다수결의 결과일까

 

우리는 보편타당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런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보편부당한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이런 말은 반론의 여지가 있다. “보편이라는 말 자체가 여러 가지 상황에 잘 들어맞는 최대 공통성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보편은 타당이라는 뜻을 어차피 품고 있다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보편타당이라는 표현은 비슷한 의미의 두 단어가 중복된 강조 용법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 걸까?

 

철학에서 사용하는 보편이라는 용어는 타당의 뜻을 상당히 품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논리를 따지는 데에 있어서 기본 또는 출발점으로 사용하는 토대를 보편명제라고 부른다. 이는 수학에서 공리라고 부르는 것들과 비슷하다. 수학에서는 논리의 가장 기본이 되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것들, 그래서 그냥 합의에 의해 논리의 기본으로 삼는 것들을 공리라고 부른다. 보편명제나 공리는 타당을 품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다르다. ‘중세 유럽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보편적이었다.’ 이런 표현에서는 타당하다는 뜻이 상당히 약화된다. 그 사회에서 공리처럼 사용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가장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은 부분이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보편적이었다 하더라도 그 세계관에 입각한 십자군전쟁은 결코 타당하다고 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보통 쓰는 좀 보편적으로 생각해라라는 표현도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방식으로’ ‘적용 범위가 좀 넓은 방식으로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보편은 여러 사람이 동의하는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포함한다. 그런데 이 의미만이 강조되면 그때는 보편부당한 경우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결국 여러 사람이 동의하는 바는 대부분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편의 타당성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쉽게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르다. 심한 경우에 보편이라는 말은, 다수가 소수를 강제하려고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까지 나타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머리를 일주일씩 안 감고, 이를 사흘씩 안 닦는 사람이 있다. 노숙자나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한 사람의 경우가 아니다. 정상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 물론 혼자 살고, 집안에서 주로 작업을 하는 직업인 경우에 가능한 일이지만,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 머리 감는 것, 이 닦는 것은 세상이 정한 보편일 뿐 내 특수한 상황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매일 머리 감고, 이 닦아야 한다는 것은 샴푸 회사, 치약 회사에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주장할 때, 이를 반박하는 것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결국 보편이 보편으로 인정받으려면 단순히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여러 가지 특수한 상황에 적용해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동의만을 중시하는 사람은 다수결의 결과가 바로 보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것처럼 느껴져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런데 그 반발이 다수결의 지나친 맹신에 대한 견제 수준을 넘어서면 다수의 지지라는 것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수가 있다. 다수가 꼭 옳지는 않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은 옳을 가능성이 그만큼 더 높은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이라고 여기는 기준과 자신이 특수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낸 기준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보편이란 없다. 그런 건 다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며, 앞서 언급한 머리 안 감고 이 안 닦는 사람의 예인 것이다.

 

 

그림 출처: 한겨레 온

 

 

핑계

 

심하고 덜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 논리를 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고 쉽게 기본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특수한 경우를 검토해서 보편을 검증하려고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이 소양인과 태음인에게서 각각 두드러진다.

 

소양인과 태음인이 관심을 두는 것은 원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상황의 문제이다. 사회생활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소양인은 집단이 공통적으로 처한 상황에 관심을 두고, 태음인은 각 개인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둔다. 소양과 태음은 다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음()이다. 그 바닥의 음은 구체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원리가 아니라 상황 쪽으로 관심이 간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음/양으로 다르기에 방향이 달라진다.

 

앞서도 말했듯이 태음인은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즉 상황을 고정변수로 놓고 그 속에서 최선을 찾는다. 반면 소양인은 상황을 변경 가능한 변수로 본다. 따라서 각각의 개인이 처한 상황은 극복의 대상일 뿐이며, 그 집단 구성원의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처한 상황쯤이 되어야 상황에 맞춘 방법을 찾으려 한다. 음인(陰人)의 기본이 되는 희락(喜樂)은 긍정적인 면을 넓히고자 하는 접근방법이고, 양인(陽人)의 기본이 되는 애노(哀怒)는 부정적인 면을 줄이고자 하는 접근방법이라고 했다. 그 차이가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소양인에게 어설프게 상황논리를 펴면 대뜸 핑계 대지마라고 나온다. ‘왜 네가 처했다는 특수한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하는 것이다. 소양인이 핑계 대지 말라는 것은, 그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수준에 맞췄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태음인으로서는 그 특수한 상황을 왜 바꿔야 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때로는 알아도 바꿀 엄두를 못 내는 경우도 있다. 일단 상황을 인정하고 나서 방법을 찾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태음인은 상대의 상황이 확실히 파악되기 전에는 핑계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거꾸로 소양인 쪽이 핑계 댄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김건모의 <핑계라는 노래가 있다.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마라는 가사 바로 뒤에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라는 가사가 이어진다. 이건 내 특수성을 네가 고려해봤느냐고 묻는 것이다. 보편성을 핑계로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보편성 무시, 특수성 무시가 상대에게는 서로 핑계로 보이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자. 내게 핑계라고 보이는 것이 상대에게는 핑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상대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그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택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핑계로 몰아붙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고백에 불과하다물론 상대가 상습적 거짓말쟁이라면 다르겠지만.

 

 

 

 

감각/감성과의 관계

 

이번에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본 기능인 감각과 감성의 측면에서 한번 검토해보자. 태음인의 기본 기능은 감각이고, 소양인의 기본 기능은 감성이라고 했다. 감각이란 항상 특수한 것에서 얻어진다. 책상이라는 감각은 어떻게 얻어질까? 책상이라는 것을 처음 본 순간에? 아니다. 나무 책상 혹은 철제 책상, 힘들게 시험공부를 하던 내 책상, 외할아버지가 쓰다가 물려주신 손때 묻은 책상, 아이에게 처음 사주었던 날 아이가 부쩍 대견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던 책상 등등, 그런 것들이 책상에 대한 감각의 토대가 된다. 일반적인 책상이라는 감각은 그런 구체적인 것들이 엄청나게 모인 뒤에야 비로소 생긴다. 감각은 구체적인 것에서 생겨난다.

 

이제마 내용
직관 태양 일이 돌아가는 이치, 원리를 수용하는 것
감성 소양 벌어진 현상을 수용하는 것
감각 태음 좋은가/나쁜가를 판단하는 것
사고 소음 옳은가/그른가를 판단하는 것

 

 

감성은 어떨까? 무엇이 기쁘다는 것은 그 행위나 물건의 결과가 좋은 쪽으로 예측될 때이다. 슬프거나 화나는 것은 손해에 대한 인식이다. 결과의 좋고 나쁨에 대한 경험의 축적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추상화, 일반화되었을 때 감성화된다. ‘이런 건 대부분 안 좋더라’ ‘이런 건 대부분 결과가 좋더라라는 대부분에 대한 느낌, 즉 여러 가지 특수들이 일반화 처리된 다음에 감성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복권 당첨되면 당연히 기쁠 것이다. 하지만 돈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라면 어떨까?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원시사회에서 온 사람이라면? 역시 기쁠까? 그 돈에 의한 결과가 예측될 때 기쁨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 붙은 경우를 보자. 태음 기운이 극단적으로 강한 경우에는 기쁨을 거의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대학생활이 나에게 어떨지에 대해서 아직 판단이 서지 않은 것이다. 대학을 아직 겪어보지 않은 상태니까. 다만 수험생활이 끝난 것에 대한 안도감 정도가 있을 뿐이다. 감성은 대학 합격이라는 상황이 가지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는 뒷받침이 되어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개인적인 특수성이 더해져서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하고, 주저앉아 울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반응으로 갈라지겠지만, 보편을 극단적으로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감정이 없을 수도 있다. 대학 합격이 득인지 실인지, 고생 시작인지 고생 끝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기쁘고 슬프고 할 이유가 없다.

 

위의 예는 좀 극단적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태음인은 기쁨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수험생활이 끝났다는 안도감 정도만 드러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보고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고 쉽게 말하지는 말기 바란다.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잘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을 접하고는 눈물을 펑펑 흘리거나 마구 웃는 수가 있다. 만화를 보면서도 키득키득하거나, 눈물 닦을 휴지를 찾곤 한다. 영화, 소설, 만화가 잘 만들어졌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잘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보편을 잘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쉽게 감정을 일으킨다.

 

소양인, 태음인이 지향하는 바는 보편성, 특수성의 중시 그 자체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양인은 일반화, 추상화를 잘 시도하는데, 태음인은 구체화를 잘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화, 추상화가 보편성을 추구하는 토대가 되고, 특수한 사례를 검토하는 훈련이 구체화의 토대가 되기에, 보편적 상황과 특수한 상황에 각각 강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수양이 부족한 소양인/태음인

 

이론적인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으니, 좀 구체적이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수양이 쌓인 소양인인지 아닌지는, 남과 비교하는 버릇이 있나 없나를 보면 된다. 매사를 옆집 아내, 옆집 남편, 옆집 아이와 비교하면 그것은 수양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앞에서도 말했다. 거처(居處)에 필요한 바탕은 애노(哀怒)가 아니라 희락(喜樂)이라고. 집안일에 지나치게 보편적 원리를 중시하면 가족들이 불편하게 된다. 우리 가족이 가지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수양이 부족한 태음인의 예를 들어보자. 모든 회사에 꼭 그런 사람 한둘씩 있다. 기획안을 볼 때마다 아주 특이한 경우를 내세우며 이런 경우에 대한 대비책이 없지 않느냐며 트집을 잡는 사람, 모든 것을 다 대비하면서 동시에 기획이 나와야 될 시한까지 맞춘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그것이 사무(事務)교우(交遇)를 희락(喜樂)으로 할 수 없는 이유다. ‘효율을 고려한 양보’, 태음인이 꼭 배워야 할 덕목 중에 하나다.

 

 

 

 

도덕책임론과 역할책임론

 

이런 성향들이 사회적 문제에서는 어떻게 드러날까? 우리나라의 이라크 파병 문제를 놓고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 와중에 논객들이나 정치가 사이에서 도덕책임론역할책임론이라는 말이 몇 번 사용되었다. 사실 필자도 그때 처음 배운 말인데, 꽤 의미 있는 용어라는 느낌이 들어서 한번 다뤄보려고 한다. 풀어쓰자면 도덕책임론이란, 어떤 행동을 결정하려 할 때 도덕적으로 따지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를 중시하는 것이다. 반면 역할책임론은 사회에서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을 고려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를 중시하는 태도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이 두 가지 태도가 서로 부딪히는 경우가 꽤 많다.

 

역할책임은 역할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비로소 생겨난다. 예를 들어 남편 노릇도 다 제각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역량과 아내의 요구에 따라 자기 역할을 정한다. ‘경제적 안정을 주는 것’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주는 것’ ‘집안을 유지하는 동료가 되어주는 것등등, 수도 없이 많은 역할 가운데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하는 것이고, 아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무시한다가끔은 그것이 진짜 아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내는 원하고 있는데 남편 혼자 아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이라면, 또는 아내라면 적어도 이만큼은 해야 한다는 세상의 일반화된 기준을 중시하는 사람은 자기가 크게 바라지 않는 부분이나, 상대가 크게 원하지 않는 부분도 어느 정도는 맞춰주며, 상대도 맞춰주기를 원한다.

 

결국 소양인이 역할책임론을 중시하게 된다. 태음인은 강한 역할책임론에는 반발하게 된다. 하지만 꼭 도덕책임론 쪽은 아니다. 도덕책임론은 소음 기운이 강한 집단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주관/객관 문제까지 이야기된 뒤에 정리하도록 하자.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

 

, 그럼 질문이다. 태음인과 소양인 중에는 어느 쪽이 파병에 찬성하는 비율이 높을까? 일단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가 대세니까, 양쪽 모두 반전(反戰)의 입장을 전제하고 생각해보기 바란다.

 

앞에서도 이런 식의 질문을 한 번 던졌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또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정답은 그런 부분은 체질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이다. 다만 같이 파병에 반대하더라도 태음인과 소양인의 논리가 다르며, 찬성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내세우는 이유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소양인부터 보자. ‘평화와 안전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다. 따라서 침략 전쟁에 파병하는 것은 보편적 도덕을 위배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파병 반대 논리다. 찬성논리는 이렇다. ‘독일이나 프랑스도 다 자국 이익 때문에 반대할 뿐이다. 아직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둘 다 일반론을 중시하는데, ‘일반적이라는 표현보다는 보편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래야 좀더 타당해 보이니까. 그런데 파병 자체가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잘 안 따진다. ‘아마 국익에 도움이 될 걸?’ 이런 게 일반 정서니까 굳이 따지려 하지 않는다.

 

태음인은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먼저 파병 찬성 쪽이다. ‘북핵 위협이나 대미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특수 상황에서 도덕만을 따질 수는 없다.’ 특수라는 단어가 강조된다. 다음은 반대하는 쪽을 보자. ‘이런 XX, 폭탄에 팔다리 잘려나간 애들 사진 좀 봐라. 그런 사진을 보고도 파병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니?’ 개인적인 특수한 경험을 강조한다. 또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어본 우리나라가 침략 전쟁에 어떻게 나가냐?’ 역시 특수성을 강조하는 논리다.

 

소양인 보편성 태음인 특수성

 

 

좀 길기는 하지만, 경험론적 접근이 아주 강조되는 태음적인 논리의 전형을 하나만 더 보자.

 

미국은 인디언의 학살을 통해 자기들은 별로 피를 흘리지 않고 대국을 건설했으며, 자국의 영토가 외국의 침공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인류 역사상 그 정도의 대국을 이뤘던 나라들은 그 건설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렸기에 어느 정도는 전쟁에 대한 염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것이 없다. 게다가 다른 나라의 보복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국제적 신의의 배신의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이다. 따라서 파병으로 미국의 호의를 사서 대북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받는 것은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르는 악성 어음에 불과하다. 오히려 미국이 국제 여론을 무시한 전쟁의 대가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편이 북한 침공 위협을 줄이는 유일한 길이다.’

 

역사상 다른 제국들과 미국의 차이점의 강조. 계속 특수한 상황이라는 쪽에 초점을 맞춰간다. 아무래도 태음인의 논리가 다양하기도 하고 길어지는 경향도 있다. 개인적 경험들을 근거로 내세우니까 각자 자기가 느낀 바에 따라 제각각이 되는 것이다. 또 상대가 보편론을 들고 나올 때는 이야기가 더 길어진다. 특수한 경우를 내세워 사람들이 보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보편이 아님을 증명하려 하니까,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야 할 부분이 많아진다. 구체적 상황도 다 설명해야 하고, 결국 논리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일반론 중시의 위험성

 

보편/특수, 일반화/구체화에 관한 이야기는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은 될 만한 분량이라 계속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삶의 지혜가 될 만한 것만 몇 가지 더 추려보자. 일반론의 중시는 인기 영합, 좀 어려운 말로는 대중 추수주의(大衆 追隨主義)’에 빠질 위험이 있다. 또 그 대중 정서가 바뀌는 때에는 큰 망신을 당하는 수도 있다. “공산당에 부역하고 인민재판에 참여한 자를 장인으로 둔 사람이 국가의 대통령에 적합한가?”라는 공격이 보편 정서라고 보고 자신 있게 내세웠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단 말입니까?라는 반격 한 마디에 인신공격이나 하는 치사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일반론을 중시하려면 끊임없이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며,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느껴야 한다. 늘 현장 속에 있어야 하며, 자신과 가까운 사람,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에 둘러싸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보편이 아닌 것을 보편으로 착각하고 무리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그 일반론이 과연 도덕적으로 논리적으로 타당한 보편인가를 늘 검토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소양 기운에 머물지 말고 태음, 소음 기운을 함께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수성 중시의 위험성

 

특수한 경우를 중요시하려면 그 특수한 경험이 적용되는 범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 범위를 넘어가는 곳에 특수한 경험을 적용하려 할 때 고집불통이란 소리를 듣게 된다. 또 보편이라고 잘못 인식된 내용을 특수한 사례를 내세워 뒤집으려 할 때는 사람들이 그 특수한 상황을 느낄 수 있게 유도하고, 직접 경험이 안 되면 간접 경험이라도 가능하도록 상황을 제시하는 선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고 바뀔 때를 기다려야 한다. 서두르면 역시 함정에 빠진다.

 

노무현(盧武鉉, 1946~2009)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가 되고 얼마 안 되어 김영삼 전대통령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 만남에서 당시 노 후보는 김 전대통령에게 지나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이른바 YS 시계 사건이다.

 

노무현 후보가 개인적으로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해서 느낀 감정은 각별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군사독재에 대해 싸운 선배이자 동료로서 한때는 가장 앞장서서 이끌던 사람이다. 또 서로 갈라진 뒤에도 정치권이라는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에서 본 김 전대통령의 모습에는 나름대로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노 후보의 구상대로 양김이 손을 잡고 민주화 세력이 대동단결할 수 있으면 아주 바람직한 구도가 그려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들이 경험한 김영삼 대통령은 일관성이 없고 변덕이 심하며, 국정 능력이 부족해서 IMF를 초래한 대통령이다. 가신들과 자식마저 제대로 관리 못해 부정부패 사건이 일어나게 만든 사람이다. 혹시 노 후보 눈에 비친 특수한 김영삼의 모습이 국민들의 눈에 비친 일반적인김영삼의 모습보다 더 실재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할지라도, 그때 노 후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김 전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선까지가 한계다.

 

내가 더 가까운 곳에서 보았으니 나를 믿어라라는 것 가지고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정히 아쉬우면 그저 원로의 하나로 대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로 충분하다. 그런 정도에서 국민들의 시각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 선을 넘어서 김 전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평가를 직접 바꿔보려는 것은 좀 무모한 시도였다. 누구나 자신이 이해 못할 행동에 대해서는 나쁜 동기에 의한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국민들의 눈에 지역 맹주에게 고개 숙이는 비겁한 표 구걸꾼으로 비춰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유의점

 

사회적, 정치적인 경우만이 아니다. 일반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나 조직에 대해 특수성을 존중하라고 지나치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전형적 태음 논리라고 길게 쓴 파병 반대 논리에서 보듯이, 특수를 일반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따라서 각각이 느끼는 모든 특수를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요구한다. 결국 사회는 일반론을 어느 정도는 보편으로 인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시간, 자원 등의 한계 때문이다.

 

가정 내의 문제에서는 반대다. 사망률 1%인 병에 걸리면 사람이 99%의 기능은 돌아가고, 1%의 기능은 정지된 채로 있게 될까? 아니다. 살아나는 사람은 완전히 다 살아나는 것이고, 재수 없이 1%에 속한 사람은 완전히 다 죽는 것이다. 1%밖에 안 죽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대책을 세우는 사람의 태도이지, 환자의 가족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이것이 거처(居處)에 속하는 일에 지나치게 보편적 논리를 들이대면 안 되는 이유다. 1%의 사망률은, 모든 환자와 보호자가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 병이라 여겨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환자나 보호자도 1%의 환상을 믿는 순간, 사망률은 5%, 10%로 올라갈 것이다.

 

아이들이 가장 상처를 입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 아이가 아픈데 부모가 부모의 입장이 아니라 의료인의 입장 비슷하게 대할 때, 몸은 빨리 나을지 몰라도 마음의 상처는 오래간다. 상당히 오래간다. 아이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데, 부모가 부모 노릇보다는 선생님 노릇을 하려 할 때, 아이는 좌절에 빠진다. 심한 외로움을 경험한다.

 

일반화에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내가 일반적이라 느끼는 것은 내가 속한 소집단에서만 일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일반론은 여자의 일반론이 아니며, 비장애인의 일반론은 장애인의 일반론이 아니다. 중산층의 일반론은 부자나 빈곤층에는 절대 일반론일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급격한 변동을 겪은 나라는 세대간 문제가 주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부모가 살아온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부모의 일반론은 절대 아이들 세대의 일반론이 아니다. 부모의 일반론을 아이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이라고 주장할 때, 아이는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맞춰서 키워지지 않고 과거에 맞춰서 키워지게 된다.

 

 

 

 

2. 주관 / 객관

 

 

이성의 한계

 

이제 주관과 객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이 이야기는 사전 설명을 충분히 하고 시작해야 할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명이 상당히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비밀을 밝혔다고 생각하고, 철학, 사회학, 경제학은 개인이나 사회가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에 대해 대부분 밝혀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성의 힘과 사고 능력, 그리고 거기에서 유도되는 합리적 태도는 물론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그런 능력들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알고자 하는 모든 것에 도달하기에는 여전히 터무니없이 부족한 능력이다.

 

의사들은 사람의 생리, 병리에 대해서 일반인보다는 훨씬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밝혀진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아직도 원인과 정확한 치료법을 모르는 병이 아는 병보다 훨씬 더 많다. 그저 이렇게 하면 호전되는 경향이 높다는 정도를 알고 있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남들은 다 좋아지는데, 내 가족만 안 좋아지면 의료인의 실수나 업무 태만이라고 단정하고 가서 따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따져야 소용이 없다. 의료인도 왜 그 사람만 치료가 안 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과학이니 의학이니 하는 것들이 대단히 발달한 것처럼 떠들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그나마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환자가 의사의 주장을 따라와주고, 대중이 과학자의 견해를 따라와줄 때,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진다. 그런데 확실하면 따라가고 아니면 말겠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상대의 불안감을 줄여주려고 거의 확실한 것처럼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또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면 솔직하다고 평가해주지 않고 실력이 없다고 평가를 한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의 최대 병폐의 하나인 지나친 광고가 모든 사람을 과장에 익숙하게 만들어놓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면, 듣는 사람은 그 내용보다도 한두 수쯤 낮춰서 평가한다. 그런 경향에 맞춰주려다 보니 모든 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모르는 것이 없는 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처럼 가장을 하게 된다.

 

세 번째는 추가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 받으려면 거의 다 알고 있고, 이것만 해결되면 다 될 것처럼 말해야 하니까 또 그런 부분이 부추겨진다. 자본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세한 과학적 내용을 설명하고 가치를 이해시키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요즘은 그 투자자본이 대중을 상대로 주식 공모를 해서 만든 자금인 경우도 많다. 인간 유전자 지도만 만들어지면 인간의 모든 질병이 순식간에 정복될 것처럼 과장이 되었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를 임상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로 바꾸는 데는 아직도 수십 년을 기다려야 될 것이다. 게놈 프로젝트가 엄청난 수준의 돈 먹는 하마였고 수십 년 후에나 이윤이 나온다는 사실을 미리 밝히고서는 필요한 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었기에 과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논리에 대한 환상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다. 논리란 중요한 가치이고 중요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신의 영역을 넘볼 만한 것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에서 논리의 한계를 언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보편과 특수가 일반화, 구체화와 관련되어 있듯이, 주관과 객관의 이야기는 직관과 논리에 관한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런데 논리에 대한 그런 선입견이 해결되지 않으면 주관과 객관에 대한 편한 접근이 어려워진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아무래도 여러분의 머리를 좀 흔들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해오던 이야기는 접어두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교양의 폭을 넓힌다는 기분으로 읽어주었으면 한다.

 

 

 

 

공리는 직관의 소산이다

 

수학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수학이란 말이 나오면 머리가 아파지는 사람이 많은데, 긴장할 필요 없다. 뭐 여기서 수학 문제를 풀어보자는 것은 아니니까.

 

수학은 가장 논리적인 학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학의 가장 바닥에 있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직관이다. 기하학의 가장 바닥에 가면 공리라는 것이 나온다. 보기에는 뻔한 것들인데, 이걸 증명해보라고 하면 말이 막힌다. ‘, 그 뻔한 걸 뭘 증명해?’ 보통은 그렇게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게 뻔한 걸까?

 

리이만(Riemann) 기하학이라는 것이 있다. 공간이 휘어 있다고 보고 풀어나가는 기하학이다. 공 위에 세 점을 잡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구에 비유하자면 북극점과, 적도상에 경도로 90도쯤 떨어져 있는 두 점에 해당되는 위치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 점을 연결하면 모든 각이 90도인 삼각형이 만들어진다. 초등학교 때 배우기를 삼각형의 세 각을 합하면 180도가 된다고 배웠는데, 원 위에 만든 이 삼각형은 270도가 된다.

 

사기라고? 물론 그렇다. 공 위에 공을 따라 그은 선은 직선이 아니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삼각형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 위에 선을 그어도, 삐뚤빼뚤하게 그을 수도 있고 똑바로 그을 수도 있다. 그 똑바로 그은 것을 직선이라고 정의하면, 즉 원래의 정의를 바꾸면 전혀 새로운 기하학이 나온다.

 

이게 말장난 같은데, 그렇지가 않는다. 조금만 더 따라와주기 바란다. 리이만 기하학의 개념은 3차원, 4차원으로 넓혀갈 수 있다. 즉 일반 평평한 평면과 비교하여, 공의 표면을 휘어 있는 2차원 평면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개념으로 휘어 있는 3차원 공간을 상정하는 거다. 공간이 휘어 있다는 것이 뭐냐고? 필자도 모른다. 머릿속에 휘어 있는 공간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릿속에 쉽게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가지고 논하는 이야기라서, ‘그래 너희들끼리 그런 이야기하며 많이 놀아라. 수학자란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이러고 말았는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상대성이론이 나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상대성이론에서 중력이 공간을 휘게 한다는 이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언뜻 듣기에 황당한 이론이라서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빛의 경로가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관찰되면서 그 이론은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빛은 질량이 없으니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된다. 무언가 무게가 있어야 끌어당기고 말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빛도 중력의 영향을 받더란 것이다. 즉 중력이 질량이 없는 빛을 끌어당길 수는 없으니까, 빛이 휘어진 것처럼 관찰되는 이유는 공간이 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중력이 공간 자체를 휘게 했기 때문에 그 흰 공간을 똑바로 진행하는 빛이 휘어진 것처럼 관찰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실험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으니, 물리학자들은 바로 이를 이해했을까? 물리학자라고 뭐 타고 태어나기를 우리와는 전혀 다른 두뇌구조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아니다. 머릿속에 휘어 있는 공간의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것은 우리들과 똑같다. 그래서 휘어 있는 공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로 고민하고 있는데, 수학자들이 나선다. 휘어진 공간에서의 문제를 계산은 다 할 수 있다고. 리이만 기하학이라고 이미 계산 방법이 다 연구되어 있다고 내미는 것이다.

 

어떤가? 우리가 배운 기하학의 기본 공리들이 뻔한 것이었는가? 엄밀히 말하면 그 공리들은 틀린 것이다. 다만 지구 주변의 공간의 휘어짐이 크지 않아서 근사적으로 쓸 수 있는 공리였을 뿐이다. 공간이 바로 있는지 휘어 있는지를 수학이 증명할 수 있는가? 수학의 논리라는 것은 공리가 제시된 뒤에 그 공리의 적용 방법론에 있어서의 논리이다. 공리 자체는 직관으로 그냥 튀어나오는 것이지, 결코 논리의 산물이 아니다. 가장 논리적이라는 수학 역시 가장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직관이다.

 

공리와 정리라는 개념은 아무래도 너무 딱딱할까? 더 쉬운 쪽으로 짧은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0이라는 개념은 어떨까? 또 그 01을 결합시켜 열을 ‘10’으로 나타낼 생각을 한 것은 어떤가? 우리는 0이나 10을 쓰면서 익숙해진 것이지, 논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처음 수학에 0을 도입한 것은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직관이다. 그러나 0이란 개념 없이 지금과 같은 수준의 수학이 가능했을까? 결국 논리란 직관 없이는 혼자 설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기본 단위는 무엇일까

 

수학은 아무래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으니, 다른 학문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이번에는 생물학이다. 독립적인 생명체의 단위는 무엇일까? 나는 하나의 생명체일까? 내가 하나의 생명 단위가 맞을까? 확실할까? 내 몸속에는 상당히 많은 대장균이 있다. 대장균들은 나와 공생하고 있다. 내 장 속의 대장균을 다 쓸어내버리면 소화 기능이 현저히 약화된다. 내 몸의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는 여러 종류의 물질들이 대장균에 의해 소화 가능한 물질로 분해된다. 그 대장균들은 세포나, 소화액을 내는 내 몸속의 기관처럼 내 몸의 일부일까? 아니면 나와는 독립된 생물일까?

 

위의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장균이 자신과 독립된 생명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더 까다로운 예를 들어보자. 우리 몸의 모든 세포에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는 작은 소기관이 들어 있다. 모든 세포마다 들어 있는 놈이다. 무얼 하는 놈인지를 이야기해서 골치 아프게 만들 생각은 없다. 그저 세포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 중의 하나라고 알면 된다. 그런데 이 놈은 별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내 세포 내에 있는 놈이 내 세포의 핵에 있는 유전자와는 별도로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개념으로는 독립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독립된 생명이라는 의미다. 즉 독립된 생물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른 생물의 세포 속으로 기어들어가 공생을 시작했을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포 내로 기어들어가면서 독립적 기능들이 거의 퇴화해서 결국은 세포 내의 소기관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을지언정, 애초에는 독립된 생명체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세포를 떠나면 파괴된다. 세포도 미토콘드리아가 없으면 죽는다. 그렇다면 나와 내 세포 내의 미토콘드리아들은 서로 독립된 생명일까, 아닐까?

 

이번에는 반대로 우리가 독립된 생물이라 부르는 것이 과연 독립적인가를 생각해보자. 보통의 독립된 생물은 자체적으로 생식능력이 있다. 그러나 개미는 여왕개미와 일부 수개미 이외에는 생식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개미는 우리가 쉽게 하등생물이라고 취급하기에는 너무 고도로 분화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개미끼리의 정보의 공유도는 매우 높다. 페로몬이라는 독특한 화학물질로 이뤄지는 정보의 교환은 아주 독특하다. 인간들끼리 적당히 서로 감추고 숨기고 하는 모습보다는, 인간내의 각각의 세포, 조직들끼리 여러 내분비, 외분비 물질로 정확하고 신속하게 신호를 전달하는 모습에 더 가깝다.

 

개미집 하나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면 어떨까? 이상할까? 개미집을 구성하는 모든 개미들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마치 한 인간의 모든 세포가 같은 유전자를 가지는 것과 같다. 하나의 생명체가 하나의 생식기관을 가지듯, 개미집은 여왕개미라는 하나의 생식기관을 갖는다. 우리 몸에는 스스로 죽는 세포들이 있다. 백혈구들은 해로운 균을 잡아먹으며 스스로 죽는다. 손톱이나 머리카락처럼 신경이 차단되어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어서 몸을 보호하는 조직들이 있다. 개미집이 공격을 받으면 개미들은 그런 식으로 반응한다. 좁은 구멍을 틀어막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적의 침입을 막는다.

 

생물학은 생명체를 다룬다. 주변의 무생물과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는 무언가를 인식하고 이를 생명체라 이름 붙이는 것이 생물학의 시작이다. 그런데 그 기본 단위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대답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의 인간, 하나의 개미, 하나의 나무를 기본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세포 하나하나를 생명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생명체를 이런 기본 생명체의 집합체로서 인식하자는 것이다. 독립된 생명이라는 아메바와 인간의 세포의 하나인 백혈구의 움직임은 매우 유사하다. 반대로 위에서 제시한 대로 개미집을 하나의 생명체로 볼 수도 있다. 생태학을 공부하려면 이런 확대된 생명체 개념의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유기체론 역시 이런 개념과 관련이 있다. 국가를 하나의 단위로 보는 국가 중심적 사고,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Gaia hypothesis) 같은 것들은 이런 개념이 확대된 것이다.

 

결국 생물학의 기본은 인식이다. 주관적 인식이며, 직관이다. 무엇이 생명인가는 논리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주관적 인식, 직관적 인식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부분을 추려내어 이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물리학, 화학도 다 마찬가지다. 분자나 원자를 존재하는 객관적 물질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것 역시 합의된 개념일 뿐이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 자체로 또 책 한 권이라서 더 이상은 생략하겠지만, 분자, 원자, 이온, 소립자 등등, 모두 이런 단위로 정리하여 우리 학문의 기본으로 삼자는 합의된 개념일 뿐이다.

 

논리의 전개를 위한 확실한 기반은 늘 존재한다는 믿음을 부수려는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독자들의 머릿속이 좀 혼란스러워졌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인데, 논리에 대해서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이제 객관에 관해서 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어쨌든 논리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을 막고 싶은 것일 뿐, 논리를 완전히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논리 중시에 대한 공격을 끝내도록 하자.

 

 

 

 

객관이란 무엇인가

 

객관이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객(), 즉 손님의 시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손님이라는 말은 다루어야 할 문제와 이해관계가 없는 위치를 의미한다. 그런 위치에 선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 당사자는 자기 이익에 합치되는 쪽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며, 이해관계를 떠나야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객관의 목적은 합리성의 추구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합리적이라는 것,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 곧바로 올바른 결론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모든 논리는 기본적으로 어떤 보편, 엄밀히 말하면 보편이라고 인정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보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내용일 뿐 사실은 틀린 가정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건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이 안 된다. 결국 객관이 추구하는 합리가 별것 아니라면 이를 목표로 하는 객관도 별것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과학 이야기에 지친 분들을 위해서 이번에는 조금 부드러운 이야기로 시작하자.

 

길 가던 나그네가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호랑이는 은혜를 모르고 거꾸로 나그네를 잡아먹으려 한다. 함정을 판 것도 사람이니 어차피 구해준 것에 대해서는 은혜를 갚을 이유가 없다고 우기는 것이다. 결국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보자는 데까지 호랑이가 양보해서 나무와 소에게 물어보는데, 둘 다 나그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다. 사람이란 못돼먹었으니 잡아먹어도 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토끼가 나타난다. 토끼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정확한 상황을 알아봐야 하니 일단 처음 상황으로 되돌려보자라고 하면서 호랑이에게 다시 함정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러고는 서로 의견이 다르니, 아예 처음 상황으로 되돌리면 되겠네요라며 나그네에게 그냥 가라고 말한다.

 

구체적인 사실에서 엄격한 객관이란 불가능하다. 위 이야기의 소나 나무처럼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주관적인 호오(好惡)감정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토끼는? 물론 나그네를 구하려는 의도를 숨기고는 있었지만, 토끼는 인간에 대한 직접적 평가를 유보한다. 단지 갈등 해결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객관의 가치가 나온다. 결국 객관이 지향하는 바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법론이다.

 

객관화란 구체적인 상황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해결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상황에 대한 평가 및 각각의 해결책이 제시하는 결과들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 평가를 위해 상황에서 한 발 떨어지는 것이 객관의 의미다. 한 발 떨어져서 우선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은 평가 자체가 아니라 평가 방법론이다. 평가 방법론을 찾아내고 이를 정확히 적용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객관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다.

 

 

 

 

양비론과 양시론

 

객관적 태도의 한계나 객관성의 잘못된 적용 역시 보편과 일반화의 경우와 비슷하다. 보통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는 객관적이지만 비논리적인주장의 문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몇몇 특수한 경우에 도입해보면 바로 문제점이 드러나는 일반적이지만 보편적이 아닌경우가 있다고 했듯이, 마찬가지로 객의 입장을 취하지만 논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의 대표적인 부분이 이른바 양비론(兩非論)과 양시론(兩是論)이다. 사회적인 문제가 불거졌을 때 글 꽤나 쓴다는 많은 사람들이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주장한다. 그런 태도가 객관적(인 태도로 보)이고, 그래야 합리적이라고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괄호 밖이 요즘 언론인의 생각인지, 괄호 안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어쨌든 객은 중도적인 입장에 서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한쪽을 지지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싸움에 말려들게 되는 위험이 있으니까, 남의 싸움에 말려들어서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도적 입장이라는 것이 문제다. 어느 한쪽이 도덕적이고, 다른 한쪽이 심하게 비도덕적일 때는 그 중도 역시 비도덕으로 치우친 경우가 되니까.

 

가상적인 예를 들어보자. 개혁적이고 양심적이라는 집단에 속하는 어느 젊은 정치인이 친구들이 열심히 활동하라고 격려조로 준 몇 백만원을 신고하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켰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정당에서 늘 잡음을 일으키던 원로 정치인이 로비 자금으로 의심되는 몇 억의 돈을 받은 일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각각의 정치인이 속한 정당끼리는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엄격한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대표적 언론이라고 주장하는 신문의 사설에 이런 글이 실린다. ‘몇 백은 적은 돈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이 문제다. 자신들만이 양심세력이라고 생각하는 독단적 사고가 그런 사고의 원인이 된 것이다.’ 같은 날 두 가지를 동시에 다루기는 좀 계면쩍으니까 다음날쯤 이런 사설이 실린다. ‘정치에는 어느 정도 돈이 들 수밖에 없다. 몇 억을 받았다고는 하나, 자기의 주머니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정치자금으로 썼다면, 이를 무조건 단죄하기는 힘들다. 그 돈이 로비의 대가인가가 확실히 밝혀지기 전에 여론재판으로 몰고 가는 것은 곤란하다.’

 

사흘째쯤에 이런 사설이 실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당의 의원들이 모두 돈 문제와 연관되어 추문이 나온다는 것은 크게 유감이다. 더욱이 유감인 것은 양당이 각각 관련되었는데도, 서로 상대방만을 비난하며 끝없는 정쟁으로 몰고 가, 민생 정치를 실종시키고 있는 점이다. 수사는 검찰에 맡겨두고 민생의 문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어떤가? 객관적인가? 합리적인가?

 

객관적이라는 말이 이해 당사자의 입장을 떠난이라는 의미로 축소해석된다면 위 언론의 태도는 객관적이다. 그러나 그런 좁은 의미의 객관은 별로 중요시할 만한 태도가 아니다. 객관이 중요시되려면, 객관이 합리적이라는 의미를 포함해야 하고, 이때 객관은 방법론의 정확한 적용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서로 다른 사건에 대해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객관이지,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절대 객관일 수 없다는 뜻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나 옳지 않은 경우

 

사실 위의 경우는 보편/특수, 객관/주관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이는 객관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때문에 나타나는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다. 그러나 초보적 논리성 부족으로나 빚어질 수 있는 그런 황당한 사고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언론이라고 주장하는 신문의 사설에 너무 자주 등장하기에 좀 길게 다뤄봤을 뿐이다. 우리가 마음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문제,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옳지 않은 경우의 문제다.

 

객관이란 방법론이다라는 말을 예를 좀 들어서 다시 설명해보자. 객관이란, “‘A=B’이고 ‘B=C’이면 ‘A=C’라는 식의 기본적인 논리들에 익숙하고 이를 정확히 적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A=B’인지 아닌지를 인식하는 것은 주관이다. 똑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기계로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든 두 개의 책상은 같은 책상이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책상이 하나는 내 책상이 되고, 다른 하나는 이웃집 책상이 된 뒤에는 어떨까? 그 둘은 같은 책상일까, 다른 책상일까? ‘같다/다르다라는 두 가지 대답이 동시에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서로 다른 두 개체의 특성이 어느 정도까지 겹칠 때 비로소 같다고 할 것인가이다. 어떻게 결정할까? 그건 논리가 아니다. 직관이다.

 

이제 사상체질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객관은 근본적으로 소음 기운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즉 객관이란 어느 정도 구획이 정리되어야 적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영역에서는 이런 정도를 같다라고 부르자는 합의가 있어야 객관의 적용이 가능해진다. 고가도로의 교각을 세웠는데 교각의 두께가 설계도와 0.5cm 차이가 나면 완벽할 정도로 시공한 것이다. 그러나 정밀기계를 올려놓을 받침대를 만드는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결국 영역마다 적용될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영역을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기준을 확립하는 소음 기운 없이는 객관이란 불가능해진다. 기준이 서야 비로소 방법론이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한 영역에서 객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법론을 다른 영역에 무리하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생명은 소중하다는 말은 항상 옳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기준에 선행될 수는 없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와 사회의 개혁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니 좀더 신중해지기를 바란다는 정도의 주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을 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죽음의 굿판을 거둬치워라라고 그 상황을 비난한다면, 개인 윤리의 영역과 사회 윤리의 영역에서의 기준 차이를 무시한 주장이 되고 만다.

 

2002년 봄에는 연평도 근해에서의 꽃게잡이 문제가 남북간의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당시 북한은 외화 고갈로 석유 수입이 곤란해지면서, 국가 전체가 에너지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서해에서의 꽃게잡이가 국가의 활로와 관련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NLL이라는 선은 연합군 측이 일방적으로 그은, 국제법에 어긋나는 선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먼저 발포한 사실 자체는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또 그 교전으로 인해 우리의 젊은 병사들이 죽었는데 이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생명을 경시하는 나쁜 태도이다. 죽은 병사들의 애국심은 충분히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협상에 앞서, 북한의 선제 발포에 대한 책임을 우선적으로 물어야 한다거나, ‘순국한 병사들의 죽음 앞에서 NLL의 부당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거나,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논의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면 이는 잘못된 일이다. 도덕적 책임을 따지는 일만큼이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안을 찾는 일 역시 소중하기 때문이다. 원칙과 명분을 따지고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비슷한 사태가 재발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북한을 협상 당사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주장에서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측의 문제는 무엇이며, 북의 주장 가운데서 인정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가 의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한 영역에서는 객관적이라고 인정받는 부분이라도, 다른 영역에 무리하게 적용하면 더 이상 객관이 아니다. 한 개인의 주관은 아니지만, 그것은 한 소집단의 주관일 뿐이다. 객관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더군다나 잘못된 주관이다. 이런 잘못된 주관을 논리 전개의 합리성만을 내세워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 소음 기운에 치우쳤을 때 범하기 쉬운 잘못이다.

 

 

 

 

보편 상식에 대한 집착

 

논리에 강한 사람들은 보편을 중요시한다. 보편이 없는 영역에서는 아무런 기준이 없어지며, 자신들의 강점인 논리를 펼칠 토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보편을 찾아내는 데 능한 사람들, 즉 보편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일반화에 강한 사람들은 오히려 덜하다. 보편을 중시하지만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처럼 악착같이 지키려 하지는 않는다. 필요하면 그때 다시 찾아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보편 상식이란 필요하다. 진짜로 보편적인 것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또는 이른바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는 것이 맞아서 보편 상식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즉 엄격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보편 상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사회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서는 보편 상식으로 여기기로 합의된 내용은 필요하다. 그러나 보편 상식의 지나친 강조, ‘이건 보편 상식이야라고 못 박아 놓고 이를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는 태도, 그게 보편인지 아닌지 자체를 논의하자고 하면 쓸데없는 주관을 내세우지 말라고 하며 상대를 안 하려는 태도 등은, 자신의 보편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보편에는 일반화와 논리적 검증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 중 일반화만을 중시하여 단순한 다수 지지를 보편이라 우기는 것이 소양인이 범하기 쉬운 잘못이라고 했다. 즉 보편을 너무 남발하는 것이다. 반대로 보편 상식에 매달리는 것은 보편을 너무 좁게 잡는 것이다. 좁게 잡을 뿐 아니라 그 좁게 잡은 보편을 다른 영역에도 무리하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기준 위에 쌓은 논리를 논리의 정확성만을 내세우며 옳다고 우기는 것이다.

 

 

 

 

직관과 주관

 

특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다수 의견의 지나친 강조에 대한 반발로 보편이라는 것을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취급해버리듯이, 보편 상식의 교조적 강조에 대한 반발심리를 가지는 사람은 객관성을 맹목적 답습 정도로 여긴다. 직관력이 강한 사람이 주로 그렇다. 기존의 합의된 기준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존의 기준을 토대로 쌓아 올린 객관성의 가치를 인정할 이유가 없다. 직관이 강한 사람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기준, 새로운 가치관을 객관을 내세워 검증하려 들면

게 기존의 상식으로 검증이 되느냐며 비웃을 뿐이다.

 

태양 기운은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일에 강하다. 사상의학의 원본은 상당히 어렵다. 아무런 설명 없이 대뜸 천기(天機)에는 넷이 있으니 천시(天時), 세회(世會), 인륜(人倫), 지방(地方)이다라고 시작된다. 계속 그런 식이다. “사람에는 넷이 있으니 이러이러하다. 이 넷을 각각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으로 부른다.” 그냥 그걸로 끝이다. 보통의 한의학 책이라면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나오고, 태극이 동해서 음양이 나오며 음양이 변하여 사상으로 갈라지고..”하는 설명이 구구절절이 나온다.

 

맞는지 틀리는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를지라도, 어쨌든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한다. 그런데 태양인인 동무(東武)의 글은 그런 것이 없다. “그냥 넷이야. 넷이 되는 이치를 설명한다고 되냐?” 이런 식이다(물론 원문에 그런 말은 없다).

 

굳이 기존의 보편에서 출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내가 제시하는 곳에서 시작하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 주관을 제시했다. 이를 어떻게 증명할까? 새로운 제시이므로 객관으로는 검증이 안 된다. 논리를 따질 기준 자체가 아직 없는 것이다. 증명이 불가능할 때 사례들에 적용해보아서 제시된 내용이 맞을 가능성을 확인한다. 즉 객관이 주관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수화, 구체화가 주관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직관과 감각은 인식 기능이고, 감성과 사고는 판단 기능이라고 했다. 직관의 결과인 주관은 감각의 대상인 특수로 보완이 되어서 인식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주관이 많은 사례로써 검증이 되면, 비로소 사람들의 지지가 생겨난다. 사람의 지지를 넓게 반복적으로 얻은 내용은 비로소 감성화된다. 많은 사람에게서 감성화된 주관이 보편인 것이다. 그렇게 보편화된 기준이 있어야 비로소 객관이 적용될 곳이 생겨난다. 감성이 지향하는 보편과 사고가 지향하는 객관이 어울려 비로소 판단이 완성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사회진화론이 아주 논리적일까? 그것은 직관의 소산일 뿐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엥겔스의 태음적인 노력이 뒷받침되면서 사람들이 그럴듯하다고 인식할 만한 수준으로 올라간다. 그 인식하에 비로소 사회주의 철학, 공산주의 철학이 생겨나고, 사회주의적 감성, 공산주의적 감성이 생겨난다이 이야기는 공산주의 철학과 사상의학을 같이 공부한 사람이 정리해준 내용이다. 사실은 인용부호 안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인데, 정리해준 사람이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아서 그냥 본문으로 처리했다. 그 외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어떻고, 트로츠키는 어떻고, 레닌은 어떻고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공부가 짧아서 다 이해가 안 되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생략했다.

 

주관의 예로서 동무(東武) 선생님이나 마르크스 등을 언급하니, 태양인의 직관은 거의 천재의 수준이고 바로 핵심을 찍어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으로 보인다. 태양인 독자가 읽으면 아주 기분이 좋겠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주관이 객관에 비해 낮은 가치라고 여기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로, 태양인 중에서도 천재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예로 들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주관은 객관보다 왜곡된 주장인 경우가 많기는 하다. 태양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태양인의 주관은 옳을 확률이 다른 체질보다는 확실히 높다. 왜 그럴까?

 

태양인의 귀가 천시(天時)에 밝아서 세상 사람이 서로 사기 치는 것을 잘 듣는다고 했다. 바로 그런 이유다. 수학 문제 같은 것을 보면 정답이 딱 정해져 있다. 정답은 하나다. 하지만 틀린 답은 무지하게 많다. 답을 숫자로 쓰게 되어 있는 수학시험을 채점해보면 별의별 희한한 답이 다 나온다. 도대체 어떻게 계산을 해서 그런 답이 나왔을지 궁금해질 정도다. 보면 뻔히 틀린 답을 태연히 적어 내는 아이들도 제법 많다. 꼭 수학 선생님이 아니라도, 상식이 있는 어른이 보면 그건 틀린 답이라는 것은 바로 보인다. 비록 정답이 무엇인지 계산할 수 없는 경우라도 틀렸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치다. 직관으로 정답을 딱 찍는다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틀린 답을 보고 틀렸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훨씬 쉽다.

 

태양인의 직관은 옳은 부분을 찾아내는 능력보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는 쪽에 더 강하다. 천시(天時)에 맞느냐 안 맞느냐, 사기냐 아니냐, 이걸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태양인의 주관이란 사실은 아주 작은 부분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틀린 부분을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꾸준히 그런 식으로 틀린 부분을 제거해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틀리지 않은 핵심이 남게 된다. 거기까지 도달하면 위에서 예로 든 동무(東武)마르크스처럼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제거하고 남은 부분은 아주 앙상하다. 그러니 그냥 말 몇 마디, 선문답 같은 이치 몇 개로 툭 던져진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태음인이 구체성을 중시한다는 것은 맞는 사례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나가는 것이고, 태양인이 주관을 중시한다는 것은. 틀린 적용을 하나씩 하나씩 뛰어넘는 것이다. 태음인이 덜 쌓인 것을 다 쌓였다고 주장하면 이상한 길로 빠진다. 태양인이 뛰어넘기에 빠져서 옳은 것들을 뭉터기로 툭툭 버려나가기 시작하면 그릇된 길로 접어든다. 각각의 체질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른 것이 조금 끼어 있다고 옳은 것도 함께 버린다면, 남은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일 수밖에 없다.

 

한동안 머리 아픈 딱딱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태양, 소음 기운이 지향하는 바가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원리에 관한 부분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태양 기운, 소음 기운에 대한 이야기가 아무래도 소양, 태음에 관한 이야기보다 좀 딱딱해진다. 글을 봐도 그렇다. 태양인이나 소음인의 글은 좀 딱딱하다. 물론 대중을 향한 글은 좀 다르다. 나름대로 감성에 호소하는 화려함도 좀 섞고, 사례도 약간씩 넣어 그럭저럭 읽을 만하게 쓰려고 노력들을 한다. 하지만 논쟁이 붙으면 전혀 달라진다. 논쟁의 상황이 되면 서로 자기가 능하고 유리한 곳에 서서 싸우려 하기 때문에 직관의 영역,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상대를 그리로 끌어들여서 싸우려고 애쓴다.

 

소음인끼리, 태양인끼리, 또는 소음인과 태양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정말 머리 아픈 경우가 많다. 굳이 읽어보고 이해하려 들면 정말 머리에서 쥐가 난다. 요즘은 인터넷 게시판 문화가 발달해서 그런 논쟁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골치 아픈 논쟁을 보면 무조건 눈 돌릴 것이 아니라, 어떤 기운들이 어떻게 부딪히는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공부가 많이 될 것이다. 어느 게시판에 가서 아이디 누구와 누가 어떤 주제로 싸웠던 논쟁을 보면 그런 기운들의 부딪힘이 기가 막히게 잘 나타나고 있다고 적절한 사례들을 제법 여러 개 제시할 수 있는데, 개인의 사생활 보호상 여기에 못 적는 것이 유감이다.

 

보편/특수, 주관/객관이라는 주제로 한 이야기를 정리할 겸, 마지막으로 각 체질이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모습을 각각 한 단어로 정리해보자.

 

태양인은 자신 있게 주장한다. 소양인은 강하게 주장한다. 태음인은 끈질기게 주장하는데, 소음인은 집요하게 주장한다. 각각의 단어의 느낌이 느껴지는가? 주관을 내세우는 모습, 보편이라고 주장하는 모습,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이미는 모습, 객관적이라며 고집하는 모습이 잘 묘사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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