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법과 질서의 존중
1. 법을 대할 체질에 따라 받는 느낌
질서의 존중과 경시
앞장의 설명으로 사상인의 성정(性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처음에는 직관, 감성, 감각, 사고가 각각 잘 발달된 사람이라는 내용에서 출발했고, 이어서 애노희락(哀怒喜樂)의 성(性)과 정(情)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했다. 이제 주관, 보편, 특수, 객관을 각각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설명 방법을 하나 더 얻었다. 이 각각은 서로 동떨어진 특성들이 아니라, 서로 다 연결되어 나오는 내용들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 중에서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용어를 사용하면 될 것이다.
융 | 이제마 | 주장을 내세울 때 |
직관 | 태양 | 주관, 자신 있게 주장 |
감성 | 소양 | 보편, 강하게 주장 |
감각 | 태음 | 특수, 끈질기게 주장 |
사고 | 소음 | 객관, 집요하게 주장 |
새로운 방법을 배운 기념으로 법과 질서의 존중이 체질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다뤄보기로 하자. 법이란 많은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동의하는 바를 정리해놓은 것이다. 따라서 법의 기본 틀을 만드는 것은 소양인이 능하고, 법을 중시하는 것도 소양인이 두드러진다. 반면 법을 세부적으로 정리하고 적용하는 능력은 소음인이 가장 뛰어나다. 보편이 확립되고 나면 그 적용에 필요한 능력은 객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관 중에는 소음인의 비율이 다른 직업보다 높게 나타난다. 또 소음인이 아니라도 법관 생활을 오래하면 어느 정도는 소음 기운을 띠게 된다.
그럼 법을 가장 우습게 아는 사람은? 역시 태음인이다. 법은 웬만해서는 각각의 특수한 상황을 다 반영시킬 수 없다는 점이 불만스러운 것이다. 결국 법이란 마지못해 지키는 귀찮은 규제일 뿐이다. 보편을 이데올로기로 취급하는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를 일주일씩 안 감고, 이를 사흘씩 안 닦기도 하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태음인이 아니면 보기 힘든 모습이다(물론 대부분의 태음인이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태양인은? 법이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천시(天時)가 인간 세상에 적용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법이니까. 그런데 실제의 법은 틀린 것 투성이라고 느낀다. 그런 인식이 도를 넘으면, 게다가 천시(天時)를 얼른 얼른 파악 못하는 다른 체질에 대한 경멸감을 가지게 되면, 무리한 방법으로 법을 세우려고 든다. 그런 심리 상태에서 권력을 가지게 되면 독재로 치닫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물론 독재로 치닫는 토대도 체질별로 각각 다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실제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비율로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각자의 체질별로 안전판이 있고, 위험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인이 법이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주로 이론적인 옳고 그름을 먼저 인식하고 그 영역에서 먼저 시작하니까, 이게 실제 행동에서 위법으로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걸리면 결국 이런저런 제약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소양인이 법과 질서를 존중한다지만, 대중의 일반정서와 법 감각이 다르게 나타날 때는 일반정서를 따라가기 쉽다. 태음인은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경험론적 접근이 기본자세니까, 걸리나 안 걸리나 봐가면서, 조금씩 확인해가면서 선을 넘어간다. 소음인은 자신이 법보다 우위로 인정하는 기준이 위법을 지향하면 그 길을 그냥 따라갈 수 있다. 종교적 이유의 확신범 같은 경우가 이런 경우다.
체질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부분
법과 질서를 대하는 태도에 체질별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법과 질서에 대한 심각한 위반은 아무래도 자라난 환경, 처한 환경, 경제적 여유, 사회적 신분 등등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물론 같은 상황에 처하면 체질에 따른 약간의 차이가 나지만, 그런 정도는 읽어내기가 어렵다. 보통은 사소한 부분에서 오히려 체질적인 차이가 잘 나타난다.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번지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체질에 따른 성격에 관한 이야기가 잘 맞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것이 좋고, 이것은 나쁘다’라고 사회적 통념이 있는 부분에서는 체질적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약속을 잘 지키는가?’ ‘남을 잘 배려하는가?’ 등의 질문은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자신은 약속을 잘 지키고, 남을 잘 배려한다고 생각한다.
법과 질서의 존중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체질이 자신은 법과 질서를 존중한다고 생각한다. 법은 쓸데없는 규제에 불과한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태음인도 겉으로는 자신이 법과 질서를 존중한다고 말한다. 다만 남들이 필요한 질서라고 생각하는 부분 중에 태음인이 불필요한 관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뿐이다. 태음인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관행을 귀찮아할 뿐이다. 또 귀찮다고 바로 어기는 것도 아니다. 지키기는 지키면서도 귀찮아할 뿐이다.
결국 여러 가지 다른 태도들이 같이 허용되는 영역에서 체질적 특성이 잘 드러나게 된다. 또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될수록 사람들의 체질적 특성 역시 잘 드러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찌개 끓는 동안에 청소하거나 다리미질하는 경우가 있는가?’라든지, ‘피서 여행지를 고를 때 새로운 곳 위주로 고르는가, 가 봤더니 좋았던 곳에 다시 가는 것을 우선 고려하는가?’라는 식의, 사회적으로 좋고 나쁘다는 통념이 없는 질문이 체질 감별에 도움이 된다.
법과 질서라는 문제는 아무래도 이야기가 너무 딱딱한 쪽으로만 가기 쉽다. 역시 예를 좀 가벼운 쪽에서 찾아보아야 체질적 특성이 잘 드러나게 된다. 어겨도 별 죄책감을 안 느끼는 법을 대상으로 해야 자연스럽게 체질의 특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저지르는 위법이 뭘까? 대사면이란 걸 하면 사면자 숫자를 몇 백 만 명 수준으로 늘리게 만드는 법, 바로 도로교통법이다. 도로교통법의 준수 문제, 교통질서 순응 문제 같은 것이 형법, 집시법, 반공법 같은 문제보다는 훨씬 체질 특성이 잘 드러나는 영역이다.
이 이야기도 제법 길어지니 단원을 나눠서 이야기하자. 한 가지, 단원을 끝내기 전에 위에서 잠깐 언급한 찌개 이야기나 피서지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가 있을지 모르니 간단히 언급하도록 하자. 찌개 문제는 소음인에게 유의성이 있는 질문이다. 소음인은 웬만해서는 찌개 끓는 동안 조리와 관련 없는 일은 안 한다. 피서지 문제는 음인(陰人)과 양인(陽人)의 차이다. 양인(陽人)이 아무래도 새로운 곳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다만 그것은 자신이 계획을 짜고 주도할 때의 이야기다. 음인(陰人)이라도 남을 따라가는 경우에는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 일단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니까.
2. 운전 습관의 문제
출발할 때
교통법 지키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운전 습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단순히 핸들을 잡은 뒤의 문제만이 아니라, 차를 가지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부터 한번 넓게 다뤄보도록 하자.
명절에 고향 가는 문제는 늘 골칫거리다. 또 명절 이외에도 성묘나 바캉스 시즌에는 길이 유난히 막힌다. 이런 상황에서 체질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이 차이가 난다. 먼저 태음인을 보자. 태음인은 차를 가지고 가기를 고집하는 비율이 좀 높다. 자기 차를 가지고 가야 가서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소양인은 예상치 않은 일이 생기면 그때그때 알아서 대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소음인은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기는 경우 자체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태음인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쪽을 택한다. 영화나 만화에 보면 노숙자 중에 그런 사람 나온다. 겉에서 보면 그냥 허름한 외투를 입고 있는데, 외투 안쪽을 보면 주머니가 잔뜩 있고, 주머니마다 이상한 도구가 가지가지 들어 있는 사람. 실, 바늘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노숙 생활에 한 번이라도 요긴하게 썼던 물건들은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는 것이다. 그런 방식이 태음적인 대처방식이다.
바캉스의 예로 다시 돌아가보자. 태음인은 목적지에 가봐서 여러 조건이 여의치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를 걱정한다. 그럴 때 차라도 있어야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쉽고, 바닷가에서 좀 떨어진 숙소를 잡을 수도 있고, 무슨 대책을 세울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차 자체가 노숙자 외투 속에 들어 있는 도구 중의 하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소양인이라면 가서 여의치 않으면 다시 대책을 세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계획은 여관이었더라도 호텔로 올릴 수도 있고, 민박으로 내릴 수도 있고, 그때 상황 봐서 대처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소음인이라면? 미리 다 예약하고, 확인하고, 그러고 나서야 간다. 확인이 안 된 상황에서는 아예 움직이질 않는다. 태양인은 소양인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태음인은 차를 많이 끌고 가는 대신에 각종 국도, 지방(地方)도, 산업도로 등등 샛길을 많이 알아둔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샛길을 알아두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차가 막힐 때도 차를 끌고 나가겠다는 엄두를 내는 것이다. 반면 소양인은 차를 가지고 갈 때는 고속도로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국도 정도지, 아주 잘 아는 경우가 아니면 지방도로나 농로로 차를 몰고 가는 경우는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길을 선호한다.
그럼 그런 길이 심하게 막힐 것이라고 예상될 때는? 비행기를 타거나 기차를 탄다. 그런다고 해서 미리 표를 준비하고 확인하는 철저함을 보이지는 않지만, ‘무조건 역에 가보면 최소한 입석표라도 있을 거야’라든지, ‘안 되면 식당칸에 앉아서 가지 뭐’라는 식으로 순발력으로 해결하려 든다. 정 안 되면 표를 구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해결하기도 한다.
소음인은 표를 미리 예약한다. 평소에도 예약을 쉽게 하기 위해서 철도회원으로 미리 등록한다든지, 뭐 이런 식의 시스템적인 대처를 한다. 그때그때 순발력을 발휘할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경우가 많다. 태양인은 사람이 길로 쏟아져 나오는 때에 같이 움직일 일이 없도록 하는 쪽으로 대처하는 태도가 관찰된다.
태음인의 과정 즐기기
어쨌든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간다면 차를 끌고 나올 것이냐 말 것이냐,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표를 구할 것이냐 등등이 체질에 따라 각각 차이가 난다. 그런데 그것은 운전 과정 자체를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태음인의 구체성 중시라는 것이 과정 중시라는 면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소양인의 일반성 중시는 결과 중시와 관련되고, 소음인의 객관성 중시는 효율 중시와, 태양인의 주관 중시는 독창성 중시와 각각 관련된다. 이런 것들이 운전에 대한 자세에도 여러 가지 차이를 만들어낸다.
태음인은 운전을 즐길 수 있는 방식을 선호한다. 즉 이왕이면 경치 좋은 길, 좀 돌아가고 시간이 더 걸려도 안 막혀서 시원스레 달릴 수 있는 길을 선호한다. 위에서 말한 ‘과정 중시’라는 것이 이런 의미다. 태음인 중에 꼭 드라이브 자체가 취미인 사람이 많다는 뜻은 아니다. 태음인 중에도 드라이브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 있고, 다른 체질의 사람이라도 드라이브 자체를 취미로 삼게 되면 좋은 길을 선호한다. 차이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가는 경우, 즉 고향에 제사 지내러 가거나 업무로 출장을 갈 때도, 태음인은 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을 상대적으로 중시한다는 것이다. 태음인이 이상한 샛길로 가는 걸 즐긴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것 역시 빠른 샛길을 찾아내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마치 퍼즐을 푸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앞에서 락정(樂情)에 지나치게 치우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도박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도박의 최종 목적은 돈을 따는 것이다. 그런데 ‘돈은 잃었지만 많이 배웠다’는 말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태음인 중에 가장 많다.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에서도 무언가를 열심히 챙기려 든다는 것이다. 시중의 책에는 ‘태음인은 꾸준하고 성실하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것이 좀 묘한 구석이 있다. 태음인은 늘 꾸준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다. 하지만 목적과 관련 없는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이런 것들이 거처(居處)나, 당여(黨與)에는 그럭저럭 통한다. 목적과 좀 떨어진 일이라도,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그로써 가치 있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소집단 내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쓸모가 있게 되니까. 하지만 교우(交遇)나 사무(事務)를 락정(樂情)으로 하게 되면 엉뚱한 갈림길에 빠져들어서 집단 자체가 목적으로 하는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사무(事務)나 교우(交遇)를 하려면 태음인 본성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자기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자기 개발에 관한 이야기가 이 책 제2부의 주제이다.
물론 모든 태음인이 위에서 설명한 대로는 아니다. 태음인은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 때문에 경험이 부족할 때는 함부로 무리하지 않는다. 태음인의 운전 습관에 관한 위의 이야기는 운전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태음인의 이야기다. 또 태음인 중에도 성격이 약간 급한 편인 사람들이 더 샛길을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초보운전 시절에 태음인은 정도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경우가 오히려 많다. 하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슬슬 태음 본색을 드러낸다.
소양인의 목적 지향성
소양인은 어떨까? 소양인은 과정이란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다른 체질보다 강한 편이다. 태음인과 비교하기 쉽도록 바캉스 가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태음인은 돌아가고, 샛길로 가고 하는 식으로 과정을 즐김으로써, 목적지로 가는 어려움이 주는 고통을 줄인다. 반면 소양인은 목적지로 가는 게 아주 어려우면 아예 목적지 자체를 바꾼다. 목적은 바캉스지, 경포대나 만리포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경포대나 만리포는 바캉스라는 목적을 위한 과정, 도구에 불과하기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가다가 중간에라도 틀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굳이 샛길로 갈 이유가 없다. 샛길이나 산길로 차를 좀 빨리 몰다보면 운전 기술은 매우 빨리 는다. 그런 게 태음인은 재미있다. 그런데 소양인은 내가 전문 드라이버로 나설 일도 없는데 그런 기술 배워서 뭐 하냐고 생각한다. 소양인은 고속도로로 가면 막히는 듯해도 신호가 없어서 전체 시간은 오히려 짧다는 것을 중시한다. 가는 길 조금씩 즐기는 자잘한 데 관심 두지 말고 좋은 곳에 빨리 가서 제대로 즐기자는 입장이다.
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소양인은 조리 과정을 즐기는 경우가 좀 드물다. 그래서 튀김 요리 같은 걸 좋아하고 잘하는 경우가 많다. 조리 과정이 쉽고 짧으니까. 아무래도 찌개 요리는 서툰 경우가 많다. 뭉근하게 오래 끓이는 조리 방식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으니까. ‘목적은 먹는 것이고, 조리는 과정일 뿐이다.’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강한 목적 지향성이, 소양인이 사무(事務)에 능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음인(陰人) 십여 명이 끙끙대던 일을 소양인이 하나 끼어서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처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목적을 명확히 인식하고 몰고 가니까. 그런데 목적 지향이 지나치면 집안일에는 문제를 일으킨다. 목적 지향이란 긴장을 의미하기에, 긴장 완화라는 가정의 고유 목적과 충돌하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소양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아니다. 충분히 극복 가능하며, 그런 한계들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 역시 이 책 제2부에서 나올 이야기다.
소음인의 효율성
소음인은 운전 자체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교통으로 가면, 가면서 생각도 하고 쉬기도 하고 일도 할 수 있는데, 자기 차로 가면 그걸 못한다. 그 점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면허 딴 지는 10년쯤 되는데 핸들 잡아 본 건 손으로 꼽을 정도인 사람은 소음인 중에 많다(물론 차 몰 형편이 되는 경우의 이야기다). 소음인이 차를 몰고 다니는 경우는 확실히 그쪽이 이득을 주는 경우이다. 즉 같이 의논할 일이 있는 사람끼리 한 차를 타고 가면 남의 방해를 안 받고 의논할 수 있다든지, 중간에 들를 곳이 많아서 차를 가지고 가는 편이 확실히 시간 절약이 된다든지, 짐이 많다든지, 뭔가 뚜렷하게 유리할 경우에만 차를 몰고 가고,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소음인은 늘 다니던 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출발 전에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미리 다 정해놓고 가는 경우도 다른 체질보다는 많다. 교통방송 등으로 미리 확인하고 출발하는 등의 준비도 잘하는 편이다. 소음인은 전반적으로 아주 효율적으로 산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건 겉에서만 관찰한 이야기다. 그 효율을 맞추기 위해서 미리 상당한 준비를 하고, 정리를 하는 것이다.
운전도 자기 역량에 딱 맞춰서 한다. 잘 아는 길이고 운전 실력에 비해 과하지 않으면 산길이나 샛길로도 가는 것이고, 운전 실력, 기상 상태, 운전자의 몸 상태, 차의 상태 중에 어느 하나라도 무리가 있을 것 같으면 막혀도 큰길로 간다. 속도도 자신의 운전 역량이나 피로도에 맞춰서 적절한 수준으로 간다. 그 적절함에 대한 것도 그 순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할 때 미리 계산해서 정하고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런 효율성의 이면에는 거꾸로 비효율이 숨어 있다. 그때그때 상황 봐서 순발력을 발휘하는 소양인이나, 예비 계획을 여러 개 준비해서 대처하는 태음인이 보기에는 답답하기만 하다. 최선인 단 하나의 계획을 찾기 위해 지나치게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 효율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막상 가족이 볼 때는 무지하게 비효율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데, 소음인인 경우가 많다. 대충 넘어가도 되는 걸 일일이 따지고 있는 모습이 가까이 있을수록 잘 보이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비효율적으로 사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 효율성이 작은 집단에서는 중요하다. 기본적인 동의가 되어 있는 집단 내에서의 일, 즉 당여(黨與)에 강한 이유이다. 하지만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되면 기본부터 다 맞춰가야 비로소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일에 들어갈 수 있는 소음 경향이 좀 갑갑할 수 있다. 역시 극복하는 방법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태양인의 경우
태양인의 운전은 어떨까? 운전을 썩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차를 살 형편이 돼도 차를 안 사는 경우도 자주 보이고, 막히는 길 차 몰고 나가서 더 막히게 할 필요 있느냐는 생각도 있는 것 같고, 교통 통제에 따라야 된다는 것에서 구속감을 느끼는 것도 같고, 사실 우리나라 교통시스템이 불합리하게 된 곳이 많다. 그나마 점점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도저히 교통법을 지키면서 운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 많았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열 받는 것이 싫어서 아예 운전 자체를 꺼리는 경향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태양인에 대해서 관찰한 것은 그런 정도다. 태양인의 독창성이나 풍부한 상상력이 이런 부분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는 부분이 있을 듯한데, 아직 찾지 못했다.
운전 습관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각각의 체질이 어떻게 운전을 하느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운전 방식의 내면에 숨어있는 심정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가족끼리의 즐거운 나들이 길에서 차를 가지고 가자 말자, 이 길로 가자 저 길로 가자 등의 문제를 놓고 부부끼리 싸우고, 아이들은 부모 눈치 보느라 기분 망치는 그런 일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교통법의 준수
법과 질서의 존중 이야기로 시작한 것이니, 교통법 이야기도 좀 해보자. 아무래도 소음인이 교통법을 어기는 경우가 가장 적다. 계획 자체를 교통법을 어길 일이 없도록 잡으니까. 태음인은 교통법도 쓸데없는 규제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길을 닦아 놓고 제한속도 60km가 뭐냐? 당연히 80km로 올려야지. 벌금 받아먹으려고 별 짓 다하는 구나.’ 뭐 이런 식이다. 비보호로 하면 훨씬 잘 통할 곳에 괜히 신호등 세워서 막힌다고 투덜대고.
그래도 교통법을 평소에는 잘 지킨다. 벌금 쪽지가 날아오면 억울한 기분을 가장 오래 가지는 것이 태음인이니까. 하지만 피곤해서 주의가 흐트러지거나 상황이 급하면 위반을 하게 된다. 위반을 하면 주로 과속 같은 걸 많이 한다. 상대적으로 갓길 운행이나, 무리한 끼어들기 등은 덜 한다. 과속은 자율로 맡겨도 될 일을 부당하게 규제하는 관청과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무리한 끼어들기 등은 줄 서서 기다리는 다른 운전자와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교적 지키려 한다.
소양인은 남들도 보통 많이 하는 위반은 하고, 남들이 잘 안 하는 위반은 안 한다는 식이다. 또 위반하는 정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단속을 당하는 경우도 적다. ‘보통 어떤 곳에서 단속하더라’하는 식의 감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단속 패턴을 바꾸면 바로 걸리는 경우가 많다. 초보운전끼리 비교하면 확실히 소양인이 태음인보다 위반을 많이 한다. 운전도 조금 난폭하게 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데 운전이 익숙한 사람끼리 비교하면 태음인이 더 위반을 한다. 소양인은 운전이 익숙해져도 운전 태도가 더 거칠어지지는 않는다.
태양인은 각종 교통 규제에 불합리한 면이 많이 보여도 그런 게 정 싫으면 차라리 운전을 안 하지, 할 때는 잘 지킨다. 하지만 정말 불합리하게 단속되었다고 생각하면 절대 승복하지 않는다.
3. 역할 책임론 / 도덕 책임론
앞에서 역할책임론/도덕책임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역할책임론의 경우 소양인이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설명을 했는데, 도덕책임론의 경우 소음인이 가장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만 하고 설명은 없이 넘어갔다. 이 문제도 법과 질서의 존중 방식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니 이어서 다뤄보도록 하자.
정해진 법이 있는 영역에서는 그 법을 넘어가는 것이 비도덕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비난의 대상이 된다. 소음인은 그런 상황에서 보통 보편 상식에 어긋났다는 식으로 비난한다. 그런데 그것이, 소음인이 보편 상식에 강해서 나오는 태도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강한 영역에서는 오히려 관대할 수 있다. 자신이 약한 부분에 민감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소음인은 보편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객관을 적용할 수 있게 되기에 정해진 보편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즉 보편을 찾아내는 일에 약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 법 혹은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기준이 없으면 아주 불안해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도덕과 비도덕을 나눈다.
하지만 모든 영역에 보편이 정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서 문제가 된다. 특히 첨예한 논쟁은 보편이 정립되지 않은 영역에서 벌어진다. 그럴 때 도덕책임론의 지나친 강조는 독선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막상 보편을 내세우는 소양인은 일반화의 결과를 준보편 정도로 취급한다. 따라서 하나의 보편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없다. ‘보편이란 일일이 검증을 거쳐가며 어렵고 까다롭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약한 편이기 때문이다. 소양인은 ‘보편이 정립되지 않은 영역에서는 각자 방향을 나눠서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편하게 생각한다. 즉 집단별로 많은 이의 동의를 얻는 바를 각각의 집단에서 보편처럼 사용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역할책임론을 지지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원래 이 이야기는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예를 좀 들어보자. 정동영 의원 같은 경우 평소에 소양 기운이 강하다고 느꼈었는데, 역시 강한 역할책임론 쪽을 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당 의원은 대통령과 국정을 동반 책임지는 위치이므로 역할도 같이 나눠서 할 수밖에 없다며 최초의 파병 반대 주장을 철회하고 찬성으로 돌아선다.
소음 성향이 강한 김근태(金槿泰, 1947~2011) 의원의 경우, 전체적으로는 도덕책임론 쪽으로 치우친다. 하지만 개혁세력 간의 충돌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한 고려인지, 역할책임론과 어느 정도 타협적인 입장을 취한다. 자신은 끝내 파병을 반대하며 국회에서는 파병 동의안을 부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대통령의 파병 찬성은 맡은 역할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부분적으로는 역할책임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송영길(宋永吉, 1963~) 의원 같은 경우는 소음 기운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는데, 역시 직접 이라크까지 방문하는 등, 가장 강한 도덕책임론의 입장을 고수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여러 의원들 중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려면 국회의원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도 논의되어야 하고, 또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역할책임론 쪽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판단의 기준은 ‘그 행동이 위배하게 되는 도덕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그 행동을 도덕, 비도덕으로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으로 인정받고 있는가’에 있다. 이를 전부 따져보지 않고는 간단히 말하기가 힘들다. 그 외에 역할책임론에서 출발한 파병 반대론도, 도덕책임론에 바탕을 둔 파병 찬성론도 다 검토해 보아야 하고, 여러 가지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옳고 그름은 물론 아니며, 또 체질적 치우침에 따라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가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결론에 어떤 과정을 통해 도달하고, 그 결론을 어떤 논리로 전개하는가에서 나타나는 체질의 차이에 대한 예를 제시하고자 할 뿐이다.
태음인, 태양인은 어떨까? 도덕책임론이나 역할책임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판단 기능이 강조될 때 필요한 태도이다. 각각의 책임론이 판단을 위한 방법론의 하나라는 것이다. 소양인, 소음인의 주 기능인 감성, 사고는 판단 기능이다. 즉 바른 판단이 바른 인식을 유도한다고 본다. 따라서 판단의 기준을 중시하며, 소양인은 역할책임론을, 소음인은 도덕책임론을 각각 강하게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태양인, 태음인의 주 기능은 직관, 감각이라는 인식 기능이다. 즉 태양인, 태음인은 바른 인식이 있으면 당연히 바른 판단이 나온다고 보는 입장인 것이다. 충분한 인식이 생긴 뒤에 비로소 판단의 기준을 구한다. 따라서 둘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에 뚜렷한 경향성은 없다. 다만 음인(陰人)끼리, 양인(陽人)끼리 더 이해하기 쉬운 면이 있기에 태음인은 도덕책임론 쪽이, 태양인은 역할책임론 쪽이 약간은 더 우세하게 나온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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