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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노희락의 심리학 -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3장 애노희락과 사상인의 성정 본문

책/철학(哲學)

애노희락의 심리학 -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3장 애노희락과 사상인의 성정

건방진방랑자 2021. 12. 2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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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애노희락과 사상인의 성정

 

 

직관, 감각, 감정, 사고라는 네 가지 단어만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이 정도에서 정리하기로 하자.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이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본 성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본 성정만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결국은 이 체질은 이렇다는 식의 단정론에 빠지게 될 뿐이다. 기본 성정들이 어떻게 변해가며, 장점을 어떻게 넓히고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이르기까지 할 이야기가 많다. 이제부터 동의수세보원에 나오는 용어들을 하나씩 익혀나가도록 하자.

 

동의수세보원은 애노희락의 성정(性情)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즉 애성(哀性), 애정(哀情), 노성(怒性), 노정(怒情), 희성(喜性), 희정(喜情), 락성(樂性), 락정(樂情)의 여덟 가지를 사상인의 기본 성정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먼저 애노희락의 정()에 관한 설명이다. 이건 아주 쉽다. “애정(哀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非他哀也.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정의다. 하지만 뜻이 좀 숨겨져 있다.

 

 

너희들이 보통 슬픔이라고 느끼는 것이 슬픔의 본질인 것 같지만, 너희들이 슬픔이라고 느끼는 것은 애정(哀情)일 뿐이다. 그 본질인 애성(哀性)은 따로 있느니라.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건 나머지 노(), (), ()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애노희락을 성정으로 나눈다는 것이, ‘내가 애노희락의 뿌리를 가르쳐주마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우리가 흔히 슬픔, 노여움, 기쁨, 즐거움이라고 느끼는 감정의 진짜 뿌리는 무엇인가. 동무의 설명을 보기 전에 먼저 각자가 한 번씩 생각해보고 나서 읽어보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1. 애성(哀性)과 천시(天時) / 태양인의 태양 기운

 

 

애성(哀性)은 천시(天時)를 듣는 것이다

 

애성(哀性)의 정의부터 알아보자. 애성(哀性)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애성(哀性)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哀性非他聽也.’ 조금 황당한가? 동무의 설명은 이렇게 된다. “(태양인의) 슬픈 마음이 널리 퍼지는 것은 귀로 천시(天時)를 들으니, 서로 속이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즉 천시를 들을 수 있으면 사람들이 서로 속이는 것을 당연히 알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슬픈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니, 듣는 것이 바로 슬픔의 원천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런 식의 설명 때문에 사상체질에 관한 설명이 어려워진다. 동무의 주장을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쓴 책이 드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동무는 태양인답게 직관적으로 느낀 것을 그냥 그 직관의 언어로 써놓았다. 서로 속인다는 것도 사실은 태양인의 눈에 보이기에 속이는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속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서, 다른 체질의 사람이라면 그걸 속인다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동무는 그걸 그냥 이놈들아 그건 사기 치는 거야하고 설명하니까 어려워진다.

 

천시(天時)를 안다는 것은 흐름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강하면 상황에 따른 변화를 잘 알게 된다. 따라서 어떤 주장이 특정한 어느 상황에만 맞는 것이지, 함부로 일반화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걸 빨리 알게 된다. 즉 천시(天時)를 모르는 사람들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태양인의 귀에는 사기 치는 것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사기(詐欺)란 무엇인가

 

딱딱한 이야기만 이어지면 재미없으니까, 이쯤에서 사기(詐欺)란 무엇인가를 좀 이야기하고 가자. 법적으로는 유무형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정을 가지고, 본인이 거짓임을 인지하고 있는 내용으로 상대를 기망(欺罔)하는 행위가 사기란다. 확실히 법률 책의 내용은 말이 어렵다. 쉽게 말해서 말하는 본인도 뻥인 줄 알면서 한 건 올리려고 남을 속이면 사기라는 것이다. 어쨌든 법적 정의가 그래서 법정에서 사기죄에 유죄판결 나는 경우가 일반인의 생각보다는 드물다. 말하는 본인이 거짓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필요하고, 사기의 결과로 실제적 이득이 있다는 것도 필요하고, 이런 것들이 사기꾼의 속을 뒤집어보지 않고서는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5,60년대의 보릿고개가 사라지기 전이라면 성장 우선 정책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 물론 성장의 결과가 특정 집단에만 집중된다는 이유로, 그 당시에 이미 사기의 냄새가 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70년대, 80년대에도 계속 성장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훨씬 사기에 가까워진다. 더군다나 21세기에도 성장을 위해 분배 정의를 늦추자고 말하면 그건 무조건 사기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 바뀐 것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심하게 억제당하던 언론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늘려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다. 이는 정당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언론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에서 언론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을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기 행각에 불과하다. 이런 것이 다 천시(天時)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외국의 경우를 보자. ‘악의 축에 대한 응징이라는 말은 십자군전쟁 때부터 억지였다. 그런데 21세기에 그 말을 다시 리바이벌하는 부시는 확실한 사기꾼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법적으로는 다 사기가 아니다. 본인 스스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고서 한 말이라고 부득부득 우기면 형법상 사기죄라는 걸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동무는 그게 다 사기라는 것이다. “너 귀 있지? 천시(天時)가 약간이라도 들리지? 네가 태양인이 아니라면 잘 들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약간은 들릴 것 아냐? 그럼 네 주장이 천시(天時)에 맞나 따져봐. 안 맞지? 그러니까 그건 사기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기란 우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사기 전과가 찬란한 사람들이 초보 사기꾼에게 가르치는 말이 그렇단다. “남을 속이려면 자기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자신이 자신의 주장을 반쯤은 믿을 정도가 되어야 남을 속일 수 있다라고, 우리가 보기에 황당한 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그런 정치인들을 가깝게 볼 기회가 있으면 더 황당해지는 수가 있다. “아니 저 사람은 저걸 진짜로 믿고 있네. 적당히 속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네.” 다음부터는 그런 것 보고 황당해하지 말기 바란다. 철새 정치인들, 파벌 싸움하는 정치인들, 중상 모략하는 정치인들, 자신들의 행위가 진짜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열심히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사기를 치려면 우선 자신의 시야를 좁혀야 한다. 시야가 충분히 좁아졌다고 느끼면 그때부터 자기 자신을 속여야 한다. 자신의 거짓말을 자신이 충분히 믿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나가서 남을 속이면 제법 속아준다. 결국 남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시야를 넓혀야 한다. 천시(天時)를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성(哀性)이 실생활에서 나타나는 모습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앞에서 살림의 문화’ ‘죽임의 문화라는 이야기들을 할 때, ()의 기운은 부정적인 것을 줄이는 방향에, ()의 기운은 긍정적인 것을 늘리는 방향에 각각 중점을 둔다고 했다. 결국 태양인의 애성(哀性)은 서로 사기 치는 것을 막아보려는 노력이다. 한자로도 애성(哀性)이지만 우리말의 애쓰다라는 말과 뭔가 연결되는 듯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일들에 끼어들어서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 그게 태양인의 애성이다.

 

태양인의 애성(哀性)이 실생활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우리가 사는 환경은 계속 바뀐다. 따라서 과거에는 어울리고 꼭 필요했던 관습이나 제도가 어울리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걸 제일 먼저 파악하는 것이 태양인이다. 천시(天時)가 바뀐 것을 아니까. 그런데 과거의 제도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제도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이기가 쉽다. 반대로 그 제도에서 손해를 입는 사람들이 세상을 뒤엎으려는 쪽에 서게 될 것이다. 그 상황에서 모순을 잘 파악하는 태양인이 세상이 바뀌어야 된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기득권 세력과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결국 태양 기운은 진보, 혁명의 이론 제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학술적인 방면으로 그 기질이 발휘되면 전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선구자가 된다. 동무가 기존의 한의학과는 상당히 다른 사상의학이라는 영역을 열었던 것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혁명가도 못 되고, 선구자도 못 되고, 죽도 밥도 안 되는 사람은? 어설픈 불평불만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 태양인 중에 어떤 이가 혁명가가 되고, 어떤 이가 선구자가 되며, 어떤 이는 불평분자로 주저앉는가? 즉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결국 사상체질을 공부하는 이유인데, 아직은 설명하기가 좀 이르다.

 

태양인 이야기를 하는 김에 진보에 대한 감각에 관해 조금만 더 이야기하기로 하자. 태양인만이 진보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은 태소음양(太少陰陽)의 기운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또 후천적으로 그런 기운을 얻을 수도 있고, 그런 기운으로 기존에 상식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 과거 특정 환경에서만 상식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되면 진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뒤에서 나올 이야기지만 태음의 기운이 진보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태음의 기운이 이것저것 잘 받아들이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이 있는지 일단 검토해보자는 마음이 진보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상인의 성정에 대한 설명이 다 끝나고 나면, 수구, 보수, 진보, 급진의 정의를 이야기할 예정이니, 여기서는 간단히 말하고 넘어가자. 자기의 생각을 터럭 한 올만큼도 안 바꾸려고 드는 게 결국은 수구다. 결국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으면 수구의 나락에 빠지는 것이다. ‘모든 상식은 때와 장소에 따라 생겨나고, 자라고,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면 원래 성정이 좀 굼뜨더라도 건전 보수 정도가 되지 수구로 타락할 위험은 없다.

 

 

 

 

2. 노성(怒性)과 세회(世會) / 소양인의 소양 기운

 

 

노성(怒性)은 세회(世會)를 보는 것이다

 

성정을 비교하려면 다음에는 애정(哀情), 우리가 슬픔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순서를 조금 바꿔보자. 애정(哀情)을 이야기하려면 소양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그러니 소양인의 기본 기운에 대해서 좀 친숙해지도록, 소양인의 소양 기운, 즉 노성(怒性)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자.

 

‘(소양인의) 화난 마음이 넓게 포용하는 것은, 소양인의 눈이 세회(世會)에 밝으니, 사람들이 서로 업신여김을 언짢게 여기는 것이다.’ 이게 동무 선생님의 설명이다. 따라서 노성(怒性)의 정의 역시 애성(哀性)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노성(怒性)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怒性非他視也.’ 이렇게 된다. 노정(怒情), ‘화내는 게 노야怒情非他怒也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의 경우와 같다.

 

세회(世會)라는 처음 나오는 단어부터 설명하도록 하자. 세회(世會)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모임에도 연고에 의해서 알음알음으로 모이는 것이 있다. 이런 모임은 당여(黨與)라고 하여 나중에 태음인을 이야기할 때 다시 나온다. 반면 세회(世會)는 낯선 사람들끼리 그냥 모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는 과정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낯선 사람끼리 모일 때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모이게 된다. 따라서 좋다/싫다의 판단 기능(감성 기능)이 발달한 소양인이 세회(世會)에 밝게 된다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세회(世會)는 사람이 모이는 이치이고, 당여(黨與)는 구체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행위이다

 

좋아하는 것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을 단순히 이익만을 쫓는 것으로 보면 착각이다. 세상이 이익을 중시하게 되면 소양인의 감성 기능이 이익 쪽으로 발달한다. 그러나 세상이 명예를 중시하게 되면 명예 쪽으로 발달하게 된다. 재미를 중시하는 세상에서는 재미 쪽으로 발달할 수도 있다. 재미라는 것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맞춰주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연예인을 보면 일반인보다 소양인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좋다/싫다이롭다/해롭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이롭다/해롭다가 될 수도 있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양의 기운은 나쁜 것을 줄이는 쪽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따라서 세상의 예법, 관행 등에 가장 민감한 사람이 소양인이고, 예법에 어긋나면 바로 지적하는 것도 소양인이다. ‘좋다/싫다라는 기준에서 싫은 것을 줄이는 쪽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입바른 소리를 잘한다는 평을 듣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의 예절이라는 것은 소양 기운에 해당되는 세회(世會)’와 태음 기운에 해당되는 인륜(人倫)’에 걸쳐져 있는 것이고, 서양의 에티켓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세회(世會) 쪽으로만 많이 치우쳐 있는 것 같다. 좀 실속이 없다고나 할까? 어쨌든 소양인 중에는 이른바 에티켓이라는 문제에 민감한 사람이 많다.

 

물론 좋아한다에 대해서도 다른 체질보다는 소양인이 좀더 민감하다. 소양인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가장 원하는 것은 위로. ‘나는 당신에 공감한다.’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것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이런 것들이 소양인에게는 큰 힘이 된다. 특히 소양인 여자의 경우 이런 경향이 아주 두드러진다. 또 소양인들이 상대에 대해 그런 위로나 격려를 잘하기도 한다다만 자기 기분이 내켜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남에게 도움을 줄 때도 마찬가지다. 소양인의 그런 특성이 세회(世會)감각이다. 이른바 좋아한다를 중시하는 것 역시 소양 기운의 기본적인 특성 중의 하나이다.

 

 

 

 

모욕(侮辱)이란 무엇인가

 

태양인이 사기(詐欺)를 듣듯이, 소양인은 모욕을 본다. 서로가 업신여기는 것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모욕이란 무엇인지를 좀 이야기해보자. 모욕죄, 이른바 명예훼손죄도 법적으로는 제법 복잡하다. 허위 사실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고, 사실이라도 얼마나 알려져 있는 사실이냐에 따라 또 다르고, 어떤 경우는 이미 대중에게 다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명예훼손이 되기도 하고, 대중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폭로의 경우는 면책이 되기도 하고, 무지하게 복잡하다.

 

어쨌든 문제가 되는 것이, 본인이 느끼는 수치감, 모욕감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점이다. 일단 체질에 따라 모욕감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 다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소양인 아내와 태음인 남편이 같이 외출하는 경우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나가서 사람 만날 일이 있을 때, 남자가 그냥 편한 옷을 입고 나가는 것에 대해 소양인 아내는 모욕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아내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면 태음인 남편은 옷 입는 것조차 간섭하는 것이 자율성을 무시하는 모욕이라고 느낀다.

 

이게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상대는 분명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자신은 못 느끼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일반적인 해결책은 이렇다. 서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상대의 특성을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위의 사례에 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뒤에 보편/특수에 대한 설명에서 나올 것이다.

 

체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체질 문제만 말했지만, 이 외에도 성별, 나이, 학력, 직업, 기타 여러 가지 생활환경에 따라 모욕감을 느끼는 포인트는 다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본인은 분명히 모욕감을 느껴서 고소했는데 판사가 그걸 무시해버리면 정말 짜증날 것이다. 또 사회 통념상 별로 모욕이라 할 수 없는 부분인데,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만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잔머리 굴리는 데 능통한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상대를 모욕하고도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다. 법정에서는 통념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진짜 모욕을 목적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저는 모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까짓 것이 무슨 모욕이 됩니까?’라고 부득부득 우길 때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검사나 판사가 피해자와 체질이 비슷해서 모욕감을 느끼는 포인트가 비슷하면 유죄를 선고할 것이고, 반대의 경우 가해자의 변명이 먹힐 수도 있을 것이다.

 

명예훼손 같은 문제를 바르게 판결하려면 법전 뒤져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법은 사람끼리의 다른 점을 충분히 반영할 수 없다. 이걸 다 반영할 수 있는 법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법으로 명시하기에 부족한 부분은 사람이 그때그때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결론은 고시 패스했다고 판검사를 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변호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 겪어보고, 이런저런 사람들 만나보고, 사람 사는 일에 대해서 눈도 좀 뜨였을 때 판검사를 해야지, 골방에 틀어박혀 법만 공부한 사람을 대뜸 판검사를 시키면 감정과 관련된 죄들에서 바른 판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좀 엉뚱한 쪽으로 이야기가 번지기는 했지만 뭐 쓸데없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양해해주기 바란다.

 

 

 

 

감정 문제 다루기

 

감정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개인의 감정을 중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객관화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의료를 예로 들어보자. GOT, 혈중 콜레스트롤 농도 같은 것은 숫자로 나온다. 하지만 자각 증상은 다르다. 상처 깊이가 0.5cm, 길이가 2cm라고 적을 수는 있어도, 통증은 그냥 애매하게 심한 통증, 가벼운 통증, 찌르는 듯한 통증, 묵직한 통증, 이런 식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속이 더부룩함, 메슥메슥함, 가슴에 무언가 막힌 듯한 느낌, 찌뿌둥함, 뭐 이런 것들은 정리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느끼는 정도와 표현하는 정도가 환자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다. 작은 불편을 크게 이야기하는 사람, 큰 고통을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 등등, 이런 개인적 특성을 빨리 파악하지 않으면 정확한 진단이 나오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특성에 너무 매달리면 이번에는 진단이 너무 늦게 나오게 된다. 진단이 끝나고 나니 환자는 이미 치료시기를 넘겼더라, 이렇게 되면 이것도 곤란하다.

 

슬픔, 기쁨, 모욕감, 수치심, 황홀감,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상황에서도 개인마다 느끼는 것이 다 다르고, 또 느낀 정도에 따라 얼마만큼 강하게 표현하는가도 다 다르다. 결국 감정의 문제를 다루는 기준은 두 가지가 나올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싫어하는 것들을 확실한 기준을 세워서 강하게 제지하는 것이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에서 남을 충분히 배려하여 상대가 좋아하고 싶어하는 것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소양인의 눈이 세회(世會)에 밝다는 것은 전자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소양인은 감정에 민감하지만, 반면 개별적 특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후자 쪽의 감정에 대한 배려는 오히려 태음인의 태도에 가깝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태음인의 인륜(人倫)이 이와 관련되는 감각이다.

 

결국 앞에서 말한, ‘판검사는 변호사 경험을 충분히 갖춘 사람을 임명하라는 것은 태음인 감각이다. 소양인 감각은 법을 제대로 만들고 잘 지켜라쪽이다. 소양인은 사람들 감정의 파악에 능하니까, 사람들이 보통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잘 안다. 그러니 법에서는 이 정도로 규정하면 되겠다는 감각도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개별적 상황은 그때그때 빨리 느껴서 대처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법에 대한 신뢰가 있다.

 

 

 

 

3. 애정(哀情)과 사무(事務) / 소양인의 태양 기운

 

 

()과 정(), 천기(天機)와 인사(人事)

 

태양인과 소양인의 기본이 되는 애성(哀性)과 노성(怒性)을 설명했으니, 이제 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출발점은 이렇다. 태양인은 천시(天時)를 들으며 직관에만 의존해서 애성(哀性)만 느끼면서 살아간다? 소양인은 세회(世會), 감성, 노성(怒性)으로만?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부족한 기운을 채우려고 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은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기운을 다 얻으려고 들게 된다.

 

그럼 어떤 기운부터 노력하게 될까? 가장 만만한 것부터 하게 마련이다. 음이든 양이든, 겉에 드러난 기운이 우선 느껴진다. 그러니 태양인이 보기에는 소양의 기운이, 소양인이 보기에는 태양의 기운이 가장 근접해 보인다. 겉에 드러난 것이 같은 양()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그쪽부터 시도하게 된다. 이럴 때 정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태양인이 소양 기운을 배우려 하면 노성(怒性)이 아니라 노정(怒情)을 기르게 된다. 성은 원래 타고 태어난 기운이라 다른 체질이 배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소양인은 태양 기운인 애정(哀情)을 키우게 된다.

 

그런 노력에 의해서 행하는 부분, 정에 의해서 행해지는 부분을 동무는 인사(人事)라고 표현한다. 자연히 느끼는 것을 천기(天機: 세상이 돌아가는 틀), 노력해서 일하는 것을 인사(人事), 그렇게 분류한다. 위에서 태양인, 소양인을 설명할 때 나왔던 천시(天時), 세회(世會)가 각각 태양, 소양 기운과 관련된 천기(天機)이다. 태양, 소양 기운과 각각 관련된 인사(人事)로는 사무(事務), 교우(交遇)를 제시한다. 그러니까 태양인은 소양 기운인 교우(交遇), 소양인은 태양 기운인 사무(事務)를 노력해서 한다는 것이고, 또 각각 교우(交遇), 사무(事務)를 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무(事務)에 관한 간단한 설명

 

사무(事務), 요즘 쓰는 표현으로는 일이다. 일은 일인데 좀 공적인 일, 여러 사람이 관련되는 일이다. 동무 시절에는 사무(事務)라는 단어를 송사(訟事)라는 뜻으로 썼다고 한다. 판결이란 여러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일에 대한 직관적인 판단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판결에서 옳다/그르다를 칼같이 나누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좋다/나쁘다또는 옳다/그르다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경우는 둘 중 한쪽이 확실한 거 짓일 때나 나올 수 있는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 판결은 이 정도가 적절하다 하는 선을 긋는 일이다. 결국 판결이란 관계의 고찰을 토대로 한다. 상황에 대한 빠른 인식이 중요하며, 직관의 영역에 속하는 행위인 것이다.

 

뭐 꼭 송사라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요즘 생각하는 사무(事務)라는 개념으로 봐도 역시 중요한 것은 상황의 정확하고 빠른 인식이다. 둘 중 어느 쪽이 정확한 것이냐고? 송사라는 개념이든 우리가 쓰는 사무라는 개념이든 그것이 내용 이해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아하 사무를 제대로 하려면 송사를 하듯 해야 되겠구나라고 이해하고 가면 되지 않을까?

 

어떤 개념을 정의하고 사용하는 데에 까다로운가 관대한가 하는 문제도 한 번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주제인데, 여기서 다루면 이야기가 뒤섞여서 곤란할 것 같고, 소음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좀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애정(哀情)이 발현되는 모습

 

태양인의 애성(哀性)이 단지 듣는 것이다의 원문은 이렇게 된다. ‘(태양인의) 애성(哀性)이 멀리 퍼지는 것은 태양인의 귀가 천시(天時)에 밝아서 뭇 사람들이 서로 속이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니, 애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哀性遠散者太陽之耳察於天時而哀衆人之相欺也哀性非他聽也.”

 

이번에는 애정(哀情)을 보자. 애정(哀情)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소양인의) 애정(哀情)이 촉급한 것은 소양인의 폐가 사무(事務)를 행하는데 다른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니, 애정(哀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哀情促急者少陽之肺行於事務而哀別人之欺己也哀情非他哀也.

 

둘의 차이를 정리해보자. 천기(天機)와 관련된 것과 인사(人事)와 관련된 것, 세상과 관련된 것과 자기 자신과 관련된 것, 원만한 것과 촉급한 것. 이 세 가지가 차이다. 더불어 귀와 폐가 담당한다는 차이가 있다.

 

세상과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것은 월급쟁이가 월급을 받아서 생활을 꾸려가는 것과 같다. 늘 조금씩 들어오고, 늘 조금씩 쓴다. 자기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적금을 타거나 집을 팔아서 목돈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해외여행을 가거나 차를 바꾸거나 하면 주변에서, ‘음 저 사람 돈 좀 썼군하며 알아본다. 그런 식으로 몰아서 급하게 나타나는 것이 정()이다. 우리가 애노희락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주로 그런 식으로 강하고 급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천기(天機)에 해당되는 일을 하는 것, 즉 천시(天時)를 느끼는 것은 무리하게 힘을 모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귀에 들리는 것이 태양인의 직관으로 자연스레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양인이 인사(人事)에 해당되는 사무(事務)를 하게 되면 조금 달라진다. 한의학에서는 폐비간신(肺脾肝腎)을 장()이라 부른다. ()에는 장(: 감추다, 저장하다) 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즉 얻은 기운을 모으고 갈무리한다는 뜻이다. 소양인의 태양 기운이 필요한 일을 할 때는 폐에 기운을 모아서 한다는 것이다. 모였던 기운이 터져 나오는데, 게다가 그 일의 공과(功過) 역시 명확하며, 그 공과가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촉급해진다.

 

태양인은 사무(事務)를 할 때 남에게 속을 일이 없다. 그러나 소양인은 태양인만큼 천시(天時)에 밝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 속는 경우를 신경 쓴다. 그때 애정(哀情)이 발동한다. 태양인도 사무를 잘하지만 별로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설렁설렁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소양인이 사무(事務)를 하면 노력해서 하는 것이고 기운을 모아서 하는 것이니까, 마치 적금을 깨서 차를 바꾸듯이 잘하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예를 들어보자. 공공 기관에서 잘못한 일이 있어서 사람들이 모여서 따지러 간다고 해보자. 공공기관이 한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제일 먼저 파악하는 사람은 태양인일 것이다. 하지만 태양인이 나가서 따지고 정책을 바꾸게 하는 일까지 관철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이 모여서 따지러 가게 되면 그 모임에서 잘못하는 것이 또 눈에 뜨이고, 따지러 가서도 엉뚱한 사람에게 따지는 것이 눈에 보이고, 상대가 옳은 부분도 못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일이 하나 생겨서 사람이 모이고, 대표 뽑고, 가서 따지고, 관철시키고, 일이라는 게 처음에는 간단해 보여도 막상 해보면 첩첩산중이다. 또 일을 추진하는 중간에도 상황은 계속 바뀌게 마련이다. 상황이 바뀌어도 대중은 관성에 따라 그냥 밀고 가는 경향이 있다. 태양인은 그때마다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니까, 계속 밀어붙이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양인은 기세로 몰아서 관철시킨다. 사람들이 지금 원하는 것에 대한 느낌이 강하니까, 사람들을 통솔하고, 한 기운으로 몰고 가고, 따져서 관철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으로 밀고 나가면 자신을 챙기고 깊이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일이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무언가 자신이 허수아비였던 것 같은 기분도 좀 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에 미쳐 있는 동안 개인적인 불이익을 입기도 한다. 애인과 헤어지거나, 아이가 엉뚱한 사고를 저지르거나. 결국 자기는 남들을 배려해주는데, 남들은 자신을 배려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 순간 남들이 자기를 이용해 먹었다는 생각,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슬픔이 터져 나온다. 이것이 애정(哀情)이다.

 

 

 

 

왜 인사(人事)는 정으로 이뤄지는가

 

대충 애성(哀性)과 애정(哀情)이 비교가 되었는데, 성과 정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은 다른 감정, 즉 노(), (), ()을 이야기하면서 계속 조금씩 나올 것이다. 하지만 성()과 정()을 처음으로 비교하는 것이니까, 왜 인사(人事)가 성이 아니라 정으로 행해지는가에 대한 생각을 조금 적어보기로 하자.

 

조선시대에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절대 속이지 못할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다. 워낙 똑똑하고 직관이 강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차마 속이지 못할 사람이라고 했다 한다. 워낙 사람이 어질고 바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덕형보다 이원익을 더 높이 평가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천기(天機)를 느끼는 것은 그 부분이 어두운 다른 체질로는 따라가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천기(天機)를 느끼고 그대로 전해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쉽게 그걸 따라가지는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집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을 가지고 노력해서 하는 모습을 보면 차마 미안해서 어느 정도씩은 따라주게 마련이다. 인간 사이의 일은 그래서 정에 의해서, 노력에 의해서 하는 것이 더 잘 이뤄지는 것이다.

 

애성(哀性)과 애정(哀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할 때, 태양인이 천시(天時)를 다 읽고 말해준다고 해도 사람들이 이를 다 따라가지는 못한다. 어떤 식으로 일을 해도 못 따라가는 사람들이 나오고, 반대로 가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이며, 결과가 나온 뒤에는 불만이 있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이 태양인의 애성(哀性)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절대불만을 안 가지게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소양인의 애정(哀情)으로는 감당이 된다. ‘저렇게 열심히 일한 사람을 봐서 불만이 있어도 좀 참자.’ 이렇게 되는 것이다. 소양인의 애정(哀情)이 폭발하면 차마 보기가 너무 애처로우니까 (눈물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무기다). 조금 덧붙이자면, 애정(哀情)을 꼭 폭발시켜야 일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언뜻언뜻 비치는 애정(哀情)만으로도 사람들이 끌려가게 된다는 의미다.

 

 

 

 

4. 노정(怒情)과 교우(交遇) / 태양인의 소양 기운

 

 

남을 배려(配慮)한다는 것

 

이번에는 노성(怒性)과 노정(怒情)을 비교해보자. 뭐 비슷하다. 노성(怒性)은 세회(世會)라는 천기(天機)에 해당되는 것을 느낄 때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고, 노정(怒情)은 기운을 모아서 교우(交遇)라는 인사(人事)에 해당되는 일을 할 때 터져 나오는 것이다. 원문의 구조는 완전히 같으니까, 원문은 생략하자.

 

노성(怒性)은 사람들끼리 서로 업신여기는 것원문에는 모욕한다는 ()’자를 사용했다이 세회(世會)에 밝은 소양인의 눈에 자연스레 비쳐서 생겨난다. 노정(怒情)은 태양인이 교우(交遇)를 행할 때, 타인이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 터져 나온다. 애정(哀情)과 마찬가지로 기운을 모았다가 급격히 쓰는 것이다. 애정(哀情)은 폐()에 기운을 모았다가 쓴다고 했는데, 노정(怒情)은 비()에 모인다고 한다.

 

()과 정()을 서로 비교하며 이해하는 것이 쉬울 듯하여, 앞에서는 노성(怒性)에 대한 설명을 좀 간략히 했다. 노정(怒情)과 비교하기 전에, 노성(怒性)에 대해서 약간 보충 설명을 하고 넘어가자. 지난번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사건을 보면 피해자가 아니라도 자연스레 노성(怒性)이 생겨난다. 여러 근무자 중 누구 하나만 제대로 대처했어도 희생을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10여 명이 넘는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 하나 남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입장만 따졌을 뿐이다. 더 나가면 10여 명이 아니라 수십 명, 수백 명, 아니 우리 국민 전체로 책임의 범위가 넓어진다. 지하철의 제작 시 내장재를 불연재로 하지 않은 것부터 시작해서, 장애인 한 명이 사회에 대한 복수심을 품도록 만든 약자에 대한 무시, 경쟁만능의 사회 등등.

 

대구 지하철 참사 정도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노성(怒性)이다. 그 정도가 되면 체질과 무관하게 누구나 어느 정도는 노성을 느낀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 소양인은 더 민감하게 느낀다. 즉 그보다 훨씬 덜한 정도의 상황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물론 상황에 따라 강도는 다르겠지만), 즉 소양인의 노성(怒性)이란 남에 대한 배려 부족에 대해서 노여움을 느끼는 것이다.

 

배려를 중시한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소양인이 희생심 강하고 남에게 잘 퍼주는 그런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건 소음인과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소음인은 좀 자기중심적인 면이 강하다. 영어로 말하자면 ‘egocentric’하다. 그러나 그것이 ‘egoistic(이기적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기가 자기중심적이듯 남 역시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중에 남의 자기중심적인 부분에 대한 인정이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부분에 대한 인정보다 적으면 이기적이 되는 것이고, 그 반대면 이타적이 된다. 소양인도 정반대 입장에서 마찬가지다. 남을 배려하지만, 그만큼 남도 자신을 배려해주기를 바란다. 자기가 남을 배려해주는 것보다 남이 자신을 더 배려해주기를 원하면 이기주의적이 되는 것이고, 자기가 남을 배려하는 부분이 더 크면 이타적이 되는 것이다.

 

(체질을 좀 아는 사람들, 특히 태음인이나 소음인들 중에는 소양인이 남에 대한 배려가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런 느낌은 각 체질이 느끼는 배려라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앞에서 말한 알았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의 예와 같은 것이다. 뒤에서 배려에 관한 이야기가 몇 번 더 나오니, 다 읽고 나면 이 부분에서 사용한 배려의 의미가 이해될 것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하고 시작했지만, 체질에 대한 책들을 보면 체질에 따라 이런저런 잘못된 말들이 많다. 어떤 체질은 이기적이다. 어떤 체질은 고집이 세다, 어떤 체질은 변덕스럽다 등등, 그런 말들이 다 자기 체질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 눈으로 다른 체질을 보고 자기 눈에 비친 것을 적은 말들일 뿐이다. 이기적이냐 아니냐는 한 가지에서 갈라진다. 역지사지(易之事之), 입장 바꿔 생각하기에 익숙한 사람은 이타적이 되고 그 훈련이 안 되면 이기적이 될 따름이지, 체질에 따른 면은 없다. 다만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 이기성이나 이타성이 드러나는 상황이나 모습이 체질에 따라 각각 다를 뿐이다.

 

 

 

 

노정(怒情)과 교우(交遇)

 

이제 노정(怒情)을 살펴보자. 먼저 교우(交遇)라는 단어를 설명해야겠다. 교우(交遇)는 벗을 사귄다는 뜻의 교우(交友)’가 아니라, ‘교우(交遇)’. ‘()’는 우연(偶然)이라고 할 때의 ()’와 통하기도 하고, 뜻이 합쳐진다는 의미도 있다. 낯선 사람끼리 뜻을 같이 해서 모이고 교류하는 것이 교우(交遇). 천시(天時)를 사람 사는 일에 적용하는 것이 사무(事務)이듯이, 세회(世會)를 사람 사는 일에 적용하는 것이 교우(交遇).

 

사무(事務)가 애성(哀性)만으로는 잘 안 되듯이 교우(交遇) 역시 노성(怒性)만으로는 잘 안 된다.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느끼고 살펴도 때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져야 할 일이 생긴다. 소양인의 노성(怒性)은 남을 업신여기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이 업신여겨지는 것도 싫어한다. 사람과 만나야 할 때, 자신이 업신여겨짐을 느껴 피하기도 하고, 남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소리를 하기 싫어서 피하기도 한다. 소양인이 세회(世會)에 능하다고 하지만 싫은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유독 못 견뎌하는 것도 소양인이다. 그 자리가 끝날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어울리지만, 그 싫은 감정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과 마주치는 자리에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빠지려 한다. 다만 감정이 잘 바뀌니까, 그런 싫은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뿐이다.

 

교우(交遇)의 기본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몰아가고, 결론을 유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양인이 능하고, 소양 기운에 속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때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짚어주어야 하는데, 그 부분을 태양인이 소양인보다 더 잘한다. “그건 옳지 않다라는 말을 가장 쉽게 하는 사람이 태양인이다. 그러나 태양인이 오류를 지적하는 부분은 그 상황 하나에 국한해서 지적을 하지, 임의로 확대하거나 한두 상황으로 그 사람을 다 폄하하지는 않으니까, 또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서는 다시 평가를 바꾸어주니까,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면이 있다. 소양인은 너 옳지 않다너 나쁘다처럼 들리게 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감정을 실어서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좋은 말, 칭찬하는 말은 감정을 실어서 하는 편이 훨씬 듣기 좋다. 하지만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태양인이 소양인보다 교우(交遇)에 더 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어느 정도 편을 가르게 마련이다. 편 가르기란 필요악의 측면이 있다. 살다보면 평소에 정보의 교류가 있었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되는 사람 쪽에 신뢰를 더 두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상황 변화에 민첩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편을 신뢰하고, 사람을 자기편인가 아닌가로 나누는 경향이 강하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태양인이 별로 신뢰가 안 간다는 것이다.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우리 편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때, “저놈 못 믿을 놈이야라면서 사람을 몰아치게 된다.

 

소양인은 적에게 그런 경우를 당할지언정, 자기편에게는 잘 안 당한다. 소양인과 태양인이 겉은 같은 양이지만, 소양인은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음이라서 구체적 사실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소양인이 오류를 지적할 때는 구체적인 오류가 드러난 상황에서 이를 지적하며 나무라니까, 상대가 거꾸로 모욕하기가 힘들다. 반면 태양인은 구체성이 드러나기 전에 그건 오류야라고 지적하니까, 상대에게 배신감을 줄 수 있다. 태양인의 옳은 지적에 같은 편이 배신자’ ‘몽상가라는 식으로 모욕하고 나올 때, “네가 감히 나를 모욕해?”라며 터져 나오는 태양인의 반응을 가리켜 노정(怒情)이라 부른 것이다.

 

노정(怒情)이 교우(交遇)의 토대가 되는 것도 애정(哀情)이 사무(事務)의 토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태양인이 모욕당했다고 느낄 때의 노정(怒情)은 아주 격하고, 그 분노를 정면에서 받는 사람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강하다. 또 그런 분노의 상황에서도 직관이 받쳐주니까 억지 쓰다가 발목 잡히는 경우가 없다. 그런 부분들이 소양의 기운에 속하는 교우(交遇)를 소양인보다 태양인이 더 능하게 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다만 문제는 소양인이 사무(事務)에만 너무 치중을 한다거나, 태양인이 교우(交遇)에만 너무 치중하면 결국은 지치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한의학적으로 말하자면 허증(虛症)의 병증이 생겨난다. ()으로 하는 일은 성()으로 하는 일과는 달리 기운 쓰는 것이 격하고, 모아서 한 번에 쓰는 일이라, 지나치면 몸과 마음이 허해진다. 허증은 위험한 험증(險症)이나 시급한 급증(急症)은 아니지만, 만성적인 병이 되어 다른 병들을 부를 위험이 있다. 이 책의 목적이 마음 쓰는 방법을 밝히는 것에 있는 만큼 임상적인 이야기는 피하고 있는데, ()의 발현은 격해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언급했다.

 

노정(怒情)에 대한 이야기의 마무리다. ‘사람이 편하게 어울리려면 한판 싸워봐야 된다.’ 이해가 되는가? 이해가 된다면 노정(怒情)과 교우(交遇)의 관계를 이해한 것이다.

 

 

 

 

왜 태어난 대로 살지 않을까

 

다음은 태음인, 소음인의 희락(喜樂)의 성정(性情)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인데, 너무 진도만 쫓아가면 계속 나오는 새로운 단어와 개념을 익히기에 머리가 피곤하니까, 다른 이야기를 좀 하고 가자. 희락(喜樂)의 성정(性情)을 이야기하고 나면 다음에는 양인들이 음()의 기운을 익히는 과정, 음인(陰人)들이 양()의 기운을 익히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할까? 그냥 태어난 대로 태양인은 애성(哀性)과 직관만으로, 소양인은 노성(怒性)과 감성만으로, 태음인은 희성(喜性)감각만으로, 소음인은 락성(樂性)과 사고만으로 살지 않고 왜 다른 기운을 배우려 할까?

 

심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한다. “사람은 세 가지의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실제 자신의 모습, 또 하나는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 세 번째는 남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이 세 가지 자기 모습이 일치되는 범위가 넓을수록 사람은 행복하게 느낀다.” 세 가지씩이나 되는 자아상을 가지고, 이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이라……. 만일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짐승이라면, 타고난 천성대로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이런 식으로 잘 풀어쓴다. ‘사람은 한 동작에서 노동과 학습과 유희가 동시에 이뤄질 때 행복하다라고, 남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은 내가 해주었으면 하는 일에 대한 기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노동이다. 구체적인 성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서 바라는 모습을 만족시키는 것이 학습이다. 내가 점점 내가 바라는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 다음으로 현재의 내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유희다.

 

톰 소여의 모험을 읽어보았는지? 톰이 잘못을 해서 폴리 아주머니에게 담장을 페인트로 칠하라는 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칠을 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다가온다. 당연히, 너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묻겠지. 벌받고 있다고 하면 창피하니까, 꾀를 낸다.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마치 놀이라도 하듯이 칠을 한다. 한 번 칠하고 나면 자신이 칠한 것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지긋이 바라보고 씩 한 번 웃기도 하고, 가끔씩 휘파람도 불면서, 친구들이 지켜보니까, 재미있어 보인다. “, . 나도 한번 칠해보자.” 당연히 거절한다. “야 이 재미있는 걸 왜 너한테 양보하냐?” (물론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지만.) 결국 친구들이 말려든다. “, 내가 새 낚싯바늘 하나 줄게 한 번 칠해보자.” “나는 예쁜 구슬을 줄게.” 톰은 못 이기는 척 양보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정말 재미있게 칠하는 모습을 보다가, “이제 그만 나머지는 나 혼자 칠할 거야라고 외친다.

 

최초의 톰의 노동에는 학습성과 유희성이 배제되었기에 괴로웠다. 그런데 노동과 학습과 유희가 하나가 되면서 즐거운 일이 된다.

 

모든 사회적 활동이 그렇다. 특히 최근에 시민단체에 좀 관여하면서 그런 면을 강하게 느꼈다. 시민단체 활동이라는 것이 그렇다. 어찌 보면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어찌 보면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일 때, 활동의 성공 요인이 무엇인지는 오히려 명확해진다.

 

시민참여 운동이 성공적으로 호응을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점은 그 운동이 과연 노동과 학습과 유희의 삼위일체화(三位一體化)에 얼마나 성공했는가 여부에 따라 갈라진다. 물론 주제가 무엇인지, 시대적 요청에 맞는지가 가장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참여자가 얼마나 주체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가이다. 그리고 그 주체의식은 참여 행위가 노동성과 학습성과 유희성을 동시에 제공할 때 가장 높아진다.

 

아이들 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습에 적절한 노동성을 포함해야 한다. 즉 그때그때 구체적 산출물이 적절히 보일 수 있게 학습 과정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학습의 과정에 적당한 정도의 유희적 성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학습이 노동이나 유희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그런 식의 강제 학습은 아이를 학습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마찬가지로 노동은 학습과 유희로부터 소외되지 않아야 하고, 유희는 노동과 학습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노동의 문제는 굳이 예를 들 것도 없고, 유희의 문제로 예를 들자면, 도박중독 같은 것은 노동과 학습으로부터 소외된 유희인 셈이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갔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결국 천기(天機)를 느끼고 성()을 따라 행하는 것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별 부담도 없는 일이다. ()으로 하는 일은 남들이 내게서 바라는 모습에 가까운 일이다. 앞으로 이야기될, 음인이 양의 기운을, 양인이 음의 기운을 습득하는 일은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결국 사상의 기운을 원만하게 갖출 때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남들과의 갈등이 줄어든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기 때문이다.

 

사상의학에서 말하는 인간상은 철저하게 사회에서 남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인간을 기준으로 한다. 물론 산속에서 혼자 도 닦고 있는 도인도 체질을 분류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체질에 따라 도 닦기에 적합한 방법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입산 이전에 사회적 동물 출신이었기에 말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산속에서 혼자 살았다면 체질을 논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왜 사람이 자신에게 부족한 기운을 채우려 하는가?’라는 처음 질문의 답은 이렇게 내려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한의사들이 가장 진료하기 쉬운 사람은 사회성이 아주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다른 기운을 익히려 하지 않고 자기의 성()에만 집착하고 살면 체질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또 오기 쉬운 병증도 뻔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회성이 없으면 또 그렇게 편한 환자는 아닐 것 같다. 접수 때부터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고, 의료인과 환자 사이에 신뢰 구축도, 의견 교환도 쉽지 않을 테니까. ,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다.

 

 

 

 

5. 희성(喜性)과 인륜(人倫) / 태음인의 태음 기운

 

 

()란 받아들이는 것이다

 

태양인, 소양인의 경우를 검토하면서 성정(性情)의 배치에 대해 한 번 익혀 보았으니, 이제는 좀 쉬울 것이다. 음인(陰人)과 관련된 성정(性情)은 희락(喜樂)이다. 애노(哀怒)는 부정적인 것을 줄이려는 것이고, 희락(喜樂)은 긍정적인 것을 늘리려는 것이다. 태음인의 희성(喜性)은 사람들이 서로 돕는[] 것을 기뻐함에서 발달하게 되고, 소음인의 락성(樂性)은 사람들이 서로 보호하는[] 것을 즐거워하기에 발달하게 된다.

 

양인(陽人) 애노(哀怒) 부정적인 것을 줄이려는 것
음인(陰人) 희락(喜樂) 긍정적인 것을 늘리려는 것

 

 

태양, 소양인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태음인은 희성(喜性)과 락정(樂情)이 발달되고, 소음인은 락성(樂性)과 희정(喜情)이 발달되는 식으로 맞바뀌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락정(樂情)이 되고, 사람들이 자신을 돕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희정(喜情)이 된다. 즉 남들, 사회에 대한 것은 성()과 연결되고, 자신과 관련되는 것은 정()과 연결된다는 점은 양인(陽人)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또 정()의 발현은 촉급(促急)하게 나타난다는 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 ‘기뻐하다즐거워하다가 비슷해 보여서 구분 짓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필자 역시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상당히 헷갈렸던 기억이 있다. 앞에서 융의 심리학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 경희대 한방정신과 교실의 연구 내용에 이 부분을 잘 정리한 내용이 있다이 부분은 특히 한의사 통신에 올라와 있던 김도순님의 강의록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자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는 받아들이는 것, ‘()’은 몰두하는 것과 각각 관련된다. 태음인이 들으면 일단 끄덕끄덕하는 모습이 희성(喜性)의 표현이고, 소음인이 곰곰이 어떤 문제를 생각하는 모습이 락성(樂性)의 표현이다. 사상심학의 공부는 도처에 삶의 지혜가 숨어 있다. 또 하나의 지혜가 나왔다. 기쁘게 살고 싶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즐겁게 살고 싶으면 매사에 몰두해야 된다.

 

 

 

 

 

웃음

 

()은 소음인을 이야기할 때 자세히 하기로 하고 희()를 검토해보자. ()를 나타내는 표현이 웃음이다. 사람들이 어떤 때 웃는가? 좋을 때도 웃지만, 우스울 때 웃는다. 여기서 이 우습다는 것이 뭐냐는 것이다. TV에서 개그맨이 개그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뻔한 말에서는 절대 웃지 않는다. 똑같은 개그를 두 번 하면, “에이 저거 저번에 본 거잖아라며 식상해 한다. 엉뚱하지만 그럴듯한 말이 튀어나올 때 사람들은 웃는다. 일단 뭔가 상례(常例)에서 벗어난 것이 우스운 것이고, 우리의 예측을 넘어섰을 때 우스운 것이다.

 

그런데 상례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럼 언제 웃고, 언제 화를 내는가? 상례에서 벗어났지만 그 결과를 그럴듯하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사람은 화를 내거나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화를 내는 경우는 인정할 수 없는 결과를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 이른바 황당한 경우다. 무덤덤한 경우는 결과를 내가 인정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경우다. 즉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와 같은 경우다. 웃는 경우는 내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낄 경우다. 전체로서가 아니라도, 일부 그럴듯한 면이 있다거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면이 있다고 느낄 때다. ‘그래 저것 낯설지만 받아들이기로 하자라고 생각했을 때,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긴장을 푸는 행위가 바로 웃음이라는 것이다.

 

아니, 사람이 웃음 한 번 웃는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결심해서 웃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물론 그렇게 결정하고 웃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의 말이, 그런 결정은 0.001초 사이에 본능적으로 감각적으로 처리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속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본인은 못 느끼고 넘어가는 것이고심리학이라는 게 주로 본인이 못 느끼는 것을 잡아내는 재주로 먹고사는 학문이다.

 

여기서 일단 한 가지 배워둘 것.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는 일단 한 번 씩 웃고 나서 생각하면 좋다. (또 삶의 지혜가 하나 나왔다.)’ 그건 그렇고, 태음인의 희성(喜性)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퀴즈를 하나 풀어보자. 뭐 곰곰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니 편하게 생각해보기 바란다.

 

희성(喜性)이 발달된 태음인이 가장 잘 웃는다.

 

맞을까? 틀릴까? 영화배우 중에 태음적인 캐릭터를 아주 잘 묘사하는 사람 중 한 명이 최민수 씨다. 뭐 최민수 씨가 태음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직접 대면한 적이 없어서), 최민수 씨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었던 역할들은 태음인에 어울리는 모습들이 많다. 결정을 서두르지 않고 미루는 경향이 있지만, 한 번 결정하면 잘 안 바꾼다. 때론 단호한 역으로, 때론 감정이 무딘 역으로도 나오지만, 항상 은근히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주위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최민수씨가 폭소를 터뜨리는 연기를 하는 적이 거의 없다. 반면 미소 연기는 아주 일품이다. 그 미소가 바로 태음인의 희성(喜性)이다. 위 문제의 답은 좀 애매한데, 태음인은 미소는 잘 짓지만 소리 내는 웃음에는 서툰 경우가 많다.

 

즉 좋게 말하면 일단 받아들이는 기능’, 나쁘게 말하면 판단을 미루는 버릇이 발달되어 있기에 억지로 폭소를 터뜨리면서까지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리 내어 웃을 일이 없고, 당연히 큰 웃음에 익숙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 별것 아닌 일에도 씨익 미소 짓는 모습은 잘 보여준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씩 웃기도 하고,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그 모습을 다른 체질이 오해한다는 점이다. ‘, 저 사람 나에게 동의해구나라고. 천만에, 당신의 의견을 접수했을 뿐이고, 판단은 뒤로 미뤄둔 상태일 뿐이다.

 

 

 

 

받아들이다돕다

 

받아들이는 기능을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가 희성(喜性)이라고 표현했기에 웃음과의 관련을 한참 설명했지만, 태음의 기본 기능이 받아들임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적이 있다. 안팎이 다 음()인 태음이라는 괘를 동양학에서는 주로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땅이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받아들이듯이, 그런 기능이 태음 기능이다. 이를 심리학적으로는 감각 기능으로 본다고 했다. 개별적인 감각이 모여서 서로 연결될 때까지 그냥 받아들인다. 받아들여 쌓아둔다는 것이다.

 

희성(喜性)이라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동무(東武)는 왜 그것을 서로 돕는 모습을 기뻐하는 것에서 깊어진다고 표현했을까? 여기에서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의 요체가 나온다. 돕는다는 것은 그 기본이 상대를 받아들이고,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깨지면 도움이 아니라 간섭이 된다. 내가 남을 도왔는데 상대가 화를 낼 때 가장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이것이다. 내가 상대를 주체로서 인정했는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태음인의 희성(喜性)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게 배울 점이 이것이다.

 

 

 

 

도움에 대한 체질별 차이

 

도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체질과 도움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자. 앞에서 소양인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 위로나 공감 같은 것을 가장 원하고, 또 남에게도 그런 것을 잘한다고 했다. 다른 체질은 각각 어떨까? 태음인은 해결 방안 제시’, 소음인은 상황의 정리쪽의 도움을 각각 바라는 경향이 있다. 태양인의 경우는 관찰한 정도가 적어서 자신은 없지만, 아무래도 동참쪽을 바라는 것 같다. 방향은 이미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방향 잡는 일에 도움 되는 것보다는 동참을 바라는 듯하다. 각 체질별로 남이 문제에 부딪힌 것을 보고 도 우려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라면 바랄 만한 방식으로 도움을 주려 한다.

 

태양인 동참
소양인 위로나 공감
태음인 해결 방안 제시
소음인 상황의 정리

 

 

그래서 종종 문제가 된다. 내가 주는 도움과 상대가 받으려는 도움이 서로 틀리기 때문이다. 일껏 신경 써주는 상대에게,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느냐고 쏘아붙이는 경우가 주로 여기서 생겨난다. 특히 성별도 틀리고 체질도 틀린 경우에는 오해를 낳기가 아주 쉽다. 내가 아무리 잘 해준다고 해도, 그게 상대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면 상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 상황 인식, 해결 방법이라는 것들이 둥지 안 방식과 둥지 밖 방식이 또 틀려서, 체질 문제와 함께 엉키면 아주 복잡해진다.

 

그런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필자의 딸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하나 던지고 어떻게 할까를 물어보면 딸이 잘 쓰는 표현이 있다. “열심히, , 최선을 다해서.” 그게 정답인 듯하다. 즉 평소에 상대가 어떠한 방식의 도움을 가장 좋아하는지를 잘 관찰하고 기억해야 한다. 또 서로 대화를 많이 해서, 무엇을 해주었을 때 가장 기쁜지를 서로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 상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이 상대 나름으로는 나를 위하는 노력이라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 도움에 관한 이야기의 결론이다. ‘노력 없이 사랑 없다.’

 

 

 

 

배려란 무엇인가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소양인이 서로 배려 없음을 노여워한다고 했다. 그건 주로 예절 없음의 문제이며, 모욕과 관련된다. 태음인이 서로 도움 주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실질적 도움에 더 가깝다. 구체적 문제 해결 방법의 제시라든가, 일의 한 부분을 대신 맡아준다든가 하는 따위의 좀더 실질적인 것이다. 태음인은 그런 부분에 무관심하면 배려가 없다고 느낀다. 둘 다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음이라서 구체적 상황에의 대처에 관심이 있는 것은 같지만, 겉이 음/양으로 달라지기에 나타나는 차이.

 

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너 그 옷 입고 나가면 남이 흉본다고 말하는 것은 소양인 입장에서는 배려다. 아이가 모욕받지 않도록 신경 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게 친절하게 말하기보다는 이렇게 말하고 만다. “어디서 그런 옷을 입고 나가니!”라고. 좀 심하면 그런 옷그따위 옷으로 바뀐다. 그 정도까지 해도 소양인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다. 부모가 그런 부분을 배려해주는 것이 부모의 당연한 의무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이가 그런 부분을 무시하려 들면 부모는 모욕감을 느낀다. 당연히 부모의 언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런데 음인 입장에서는 그런 말들이 다 간섭이다. 태음인 입장에서는 다양성을 무시하는 일이고, 아이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일이다. 소음인의 입장에서는 논리적 근거의 제시 없는 강요는 언어적 폭력이고, 간섭이다.

 

 

 

 

세회(世會) 인륜(人倫)의 차이

 

희락(喜樂)을 비교하면서 받아들이다몰두하다에 초점을 맞추느라 생략하고 넘어갔는데, 태음인의 희성(喜性) 역시 천기(天機)를 느끼는 것에서 비롯된다. 태음 기운에 해당되는 천기(天機)를 인륜(人倫)이라고 한다. 원문에는, 태음인은 인륜을 냄새 맡는다로 되어 있다. 그것이 도움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희성(喜性)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소양인이 보는 세회(世會)와 태음인이 냄새 맡는 인륜(人倫)이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해보자.

 

세회(世會)와 인륜(人倫)차이는 목적 집단과 인연을 매개로 한 집단과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세회(世會)의 느낌은 적은 수의 룰을 정확히 지키는 일에 예민하게 만든다. 그 룰을 지키지 않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 된다. 서로 낯설게 만났기에 서로의 감정을 배려하는 일이 중요하다. 반면 각자의 일이 정해져 있기에 구체적 도움을 주고받을 일은 적다. 자기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상황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한다.

 

인륜(人倫)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관계가 맺어진 사람들 사이의 도리다. 가족을 생각하면 가장 쉽다. 공유하는 부분이 넓으므로, 같이 해결해야 할 일의 종류가 복잡하다. 칼같이 몇 개의 규칙으로 정리될 성질이 아니다. 또 약속된 규칙이나 룰을 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할 경우, 상황을 서로 이해시키기도 쉽고 해명할 기회도 많다. 서로 상대의 상황을 인정하고 서로 도우려고 하는 마음이 도리의 기본이 된다. 또 평소에 협조가 잘 된다면, 가끔 나쁜 감정이 생기더라도 다른 좋은 감정의 중화작용으로 그럭저럭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극단론으로 흐르면 또 문제가 된다. 사회나 기업, 단체 등은 세회(世會)감각을 기본으로 하지만, 인륜(人倫)의 감각이 가미되지 않으면 결속력이 없어져 내부에서 무너진다. 가정이나 친척, 친구는 인륜(人倫)의 감각을 기본으로 하지만, 세회(世會)의 감각이 가미되지 않으면 질서가 없어져 외부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매사에 중용지도(中庸之道)가 필요하기에 서로 부족한 다른 감각을 배워야 한다. 다만 각각의 집단에서 그 기본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이해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태음 기운에 해당되는 인사(人事)를 당여(黨與)라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희정(喜情)을 설명할 때 다시 나올 것이니, 간략히 설명하자. 당여(黨與)란 인연으로 집단을 맺는 것이다. 세회(世會)의 기운으로 사람을 엮어가는 행위를 교우(交遇)라 한다면, 당여(黨與)란 인륜(人倫)을 토대로 인연을 계속 맺어가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보면 가끔씩 개인적인 관계에서나 적합할 만한 용어를 공적인 자리에서 써서 화젯거리가 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용어의 사용에 거부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런 용어의 사용에 친근감을 느낀다. 당여(黨與)에 적합할 용어를 교우(交遇)에 사용하는 것이다. 세회(世會) 기능으로 해야 할 일을 인륜(人倫) 기능으로, 노성(怒性)으로 풀어야 할 일을 희성(喜性)으로 풀기 때문이다.

 

대선 과정에서는 그런 방법이 성공적이었다. 탈권위적 지도자를 바라는 지지자 계층의 요구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취임 후에는 취임 전보다 훨씬 줄었지만, 아직도 가끔씩 그런 어법을 구사한다. 특히 공무원들이나 청와대 참모진과의 관계에서 대통령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효과가 상당한 듯하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끼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이제까지의 대통령들의 어법과는 일단 거리가 있으니까. 일반 국민에 대해서도 성공적이 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부분들이, 세회(世會)에도 적절한 인륜(人倫)의 기운이 가미되어야 하고 인륜(人倫)에도 적절한 세회(世會)의 기운이 더해져야 한다는 말의 적절한 예이다. 그 적절한 수준을 잘 지키면 성공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를 보면 가끔씩 그 적절한 수준을 넘어서는 바람에 곤경을 치르는 경우도 보인다. 여러 기운을 구사하면서 적절한 수준을 지킨다는 것은 확실히 어렵다.

 

 

 

 

6. 지방(地方)과 락성(樂性) / 소음인의 소음 기운

 

 

지방(地方), 나누고 분류하기

 

소음 기운에 해당되는 천기(天機)를 지방(地方)이라고 한다. 지방(地方)의 방()이란 원래 원()과 대비되는 말이다. ()이 진 것이라는 뜻이다. 각이 진 것이라는 말은 방향을 잡는다는 것과 통하게 되고, 결국은 나누고 구분 짓는다는 의미와 통하게 된다. 결국 지방(地方)이란 이어진 것을 나누는 기능을 의미한다. 세상일을 뭉뚱그려 통째로 다루는 것은 너무 힘드니까, 다루기에 적절한 범위로 자르는 것이다. 기운이 모이는 핵심을 잡아내고, 그 기운이 뻗치는 범위를 정하고, 범위 안과 밖을 나누는 기능, 그것이 지방(地方)이다. 쉽게 생각하자면 학문을 세분해서 전공으로 분류하는 일 같은 것이 지방(地方)의 기능이다.

 

앞에서 과학자들이 하는 실험이라는 방법이 소음적인 접근이라고 한 바 있다. 중요 변수를 결정하고, 중요 변수끼리의 관계를 찾아내기 위한 실험 계획을 세운다. 부차적인 변수들은 실험에 적합하도록 고정시킨다. 언제 어디서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조치다. 이런 과정 과정들이 다 지방(地方)의 능력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실험이라는 것이 실험자가 적극 개입해서 결과를 얻어내는 방식이니까, 소음 기운만으로는 안 되고, 양의 기운, 특히 태양 기운이 어느 정도는 받쳐줄 때 더 잘 수행된다.

 

아마 동무(東武)가 요즘같이 실험적인 방법들이 왕성한 세상에 살았다면, 지방(地方)이라는 단어 대신에 다른 단어를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유교적 인문학이 위주가 되던 시절에, 그런 분류하고 특수성을 반영하는 기운이 가장 잘 보이는 단어를 찾은 것이 지방(地方)이었나 보다. 즉 충청도와 전라도는 기후, 산물, 지세가 다르니 충청감사는 충청감사대로, 전라감사는 전라감사대로 각각의 지역에 맞는 제도, 풍습 등을 정비하는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같은 전라도라도 구례현감과 곡성현감이 할 일이 서로 달랐을 것이고, 그런 부분을 소음인의 입이 지방(地方)을 맛본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락성(樂性), 몰두(沒頭), 보호(保護)

 

그런데, 동무(東武)의 표현을 따르면 소음인의 락성(樂性)은 사람들이 서로 보호함을 즐거워함에서 깊어진다고 한다. 구분하고,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서 적합한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인 지방(地方)과 보호함이라는 것이 어떻게 락성(樂性)이라는 고리로 연결되느냐가 까다로우면서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락성(樂性)은 집중하고 몰두하는 기능이라는 고리를 찾기 전에는, 이 부분에서 많이 어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무협지에서 적절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스토리가 삼분의 이쯤 전개되면 꼭 주인공이 기연(奇緣)을 만나 절세신공을 연마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수련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마지막 운공(運功)을 할 때, 주변에서 동료들이 호위를 해준다. 내공(內功)을 한 곳에 몰아서 몸 안의 기의 흐름을 바꾸려 할 때는, 몸이 무척 취약해진다고 한다. 무협지의 표현대로라면, 그 상황에서는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의 일격에도 기혈(氣血)이 역류하여 주화입마(走火入魔)되니 칠공(七空), , , 귀를 구성하는 구멍들에서 피를 토하게 된다고 한다.

 

무협지에만 나오는 전문용어를 좀 썼지만, 무협지를 안 읽는 독자들도 대충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 것이다. 결국 보호의 요체는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세상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법이다. 굳이 소음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락성(樂性)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열심히 몰두하는 사람을 보면 이 락성(樂性)이 발동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몰두, 집중이라는 것이, 대상을 어느 정도 집중이 가능한 범위로 좁히고, 핵심이 뭔지를 알아서 부차적인 것은 일단 고정시키는 등의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소음인은 집중력이 강한 만큼, 다른 사람이 집중하는 것도 역시 존중해준다. 또 그 집중에서 즐거움이 나온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그런 집중을 위해서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따라서 분업에 대한 감각도 좋은 편이다. 내가 내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이 처리해주는 것을 원하고, 남에 대해서도 그런 배려를 해줄 줄 안다. 이런 부분이 락성(樂性)과 보호와 집중이 서로 연결되어 소음 기운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예의(禮義)

 

이 정도면 기본적인 것은 대략 정리되었지만,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소음인의 분류 기능, 즉 지방(地方)의 기능이 사회생활에서 가지는 의미를 한번 따져보자. 분류의 기능이 강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이다. 또 내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부분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도 여러 가지로 갈린다.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순순히 인정하는 수준 있는 태도부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무시하는 태도까지. 소음인이라고 다 같은 소음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쨌든 아무리 000없는 소음인도 최소한 인정은 한다. 이런 것들이 소음인이 가지는 민주사회에 어울리는 중요한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민주시민인 소음인을 보고 소양인들은 흔히 예의가 없다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또 반대로 소음인은 소양인이 예의가 없다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꽤 있다. 재미있는 일이다. 민주사회에서 중요한 두 가지 가치관이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다.

 

집중력이 강한 사람이 세상일에 서툰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달걀인 줄 알고 시계를 삶았다는 뉴턴, 별 보며 가다가 웅덩이에 빠졌다는 탈레스 등, 뭐 사람 이름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위인전 뒤지면 그런 이야기가 많다. 집중력이 강할수록 자기 집중 범위 밖의 일은 어두우니까. 당연한 세상의 규칙을 본의 아니게 무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들이 세회(世會)에 밝은 소양인이 보면 아주 예의를 모르는 짓이다. 공공에 피해를 주는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거꾸로 소음인이 소양인을 보면 개인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획일화된 기준을 강요하는 것으로 느낀다. 아무리 세상의 통례가 그렇더라도 내가 불편하면 불편한 것이다. 불편해하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정해진 규칙의 준수와 개인적 특성의 고려라는 두 가지는 늘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제이다. 서로 자기가 못 가진 기운을 배우려 하고, 타인이 중시하는 부분을 같이 배려해주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을 예의 없다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물론 교양에 따라, 훈련 정도에 따라 전체적인 예의의 수준이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예의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비난하는 사람의 오해인 경우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비난의 대상이 된 사람이 비난을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예의를 지키는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비난을 하는 사람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거나 모르는 영역인 경우가 많다.

 

 

 

 

기준 세우기

 

락성(樂性)과 지방(地方), 보호에 대한 이야기도 기본적인 것은 대충 된 듯한데, 예를 조금 들어보기로 하자.

 

소음인은 기준을 잡는 일을 중시한다. 공부할 때도, 그 과목의 개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공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가 잘 아는 소음인 친구 하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꽤 들어서 전공을 바꾸어 다시 대학에 간 적이 있다. 나이 들어서 머리가 씽씽 돌아가는 고등학생과 겨룬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수능시험으로 과목이나 적으면 좀 나은데, 그 당시는 학력고사 시절이라 전 과목을 다시 공부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공부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 정리, 요약하기였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정치경제라는 과목이 있다. 예를 들자면 그 과목을 이렇게 정리한다.

정치는 공정한 배분의 학문이고 경제는 효율적인 배분의 학문이다. 사회는 공정하고 효율적이면 잘 돌아가므로 정치와 경제 공부가 그 두 축이다.’

 

위의 정리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너무 따지지 말기 바란다. 그저 예로 들어본 것이니까. 어쨌든 이런 식으로 물리면 물리, 화학이면 화학을 각각 한두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 다음에는 좀 더 세분하여 각 장()의 내용을 또 이런 식으로 한두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 작업을 끝내고 나서 공부를 했더니 훨씬 쉽더라고 한다.

 

필자도 나이 들어 공부할 일이 있어서 그런 방법들을 좀 써보았더니 확실히 효율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가끔 소음인 아이들을 보면 그런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각 과목에 대해서 필자가 요약했던 내용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런데 소음인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효과는 필자가 느낀 좀 효율적이더라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 말 한두 마디로 가장 어려워했던 과목이 가장 쉬운 과목으로 바뀌더라라는 정도의 엄청난 효과를 보이는 경우도 꽤 보았다. 이런 부분이 소음인이 기준을 세우는 일에 집착하는 이유이다.

 

 

 

 

사고 기능의 지나친 중시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의 기준을 세우는 일은 사고(思考)를 주 기능으로 할 때, 사상의학 용어로는 지방(地方)의 기능이 가장 잘 발달한 사람에게만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학식이 높은 소음인들 중에 이 부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사람과 토론할 때, 상대방에게 기준을 제시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것을 못하면 기본도 안 돼 있으면서라며 상대를 무시한다. 그러면 상대는 그 소음인을 기본이 확실히 선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할까? 천만에. ‘저런 꽁생원하며 무시하고 넘어간다.

 

소음인에게는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주 기능인 사고가 다른 사람에게는 보조 기능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고는 직관, 감성, 감각을 보조하는 기능에 불과하기에, 사고 기능이 좀 약하더라도 얼마든지 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고 기능을 단련시키는 학문으로 대표적인 것이 철학이다. 그러나 철학자도 모두 소음인은 아니다. 서양철학을 공부한 뒤에 사상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칸트 같은 경우는 확실히 소음 기운이 가장 우세하다고 한다. 그러나 헤겔은 태음 기운이, 마르크스는 태양 기운이 가장 두드러져 보인다고 말한다물론 직접 본 적이야 없는 것이고 주로 저작들을 분석해서 내린 결론이다. 사상의학을 처음 창시한 동무(東武)만 해도 단순한 의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 사상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동무(東武)도 태양인이다.

 

구체적인 일을 해결할 때는 소양 기운인 세회(世會)에 대한 감각과 태음 기운인 인륜(人倫)에 대한 감각이 서로 보완작용을 하며, 이치를 따질 때는 태양적인 천시(天時)의 기능과 소음적인 지방(地方)의 기운이 서로 보완작용을 한다. 총괄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과정에서는 이 네 가지 기능이 서로 보완작용을 한다. 사람에 따라 각각 자기가 능한 것을 주 기능으로 삼고 약한 것을 보조 기능으로 삼아, 세상을 헤쳐 나가고 남과 교류하고 그렇게 어울리는 것이다.

 

앞에서 사무(事務)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요즘 쓰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으냐 동무(東武) 시대에 쓰던 대로 송사라는 개념으로 국한해서 쓰는 것이 옳으냐는 이야기가 잠깐 나온 적이 있다. 그런 부분도 사고를 주기능으로 할 때는 민감한 문제가 된다. 각각의 용어는 정확하게 한 뜻만을 정의하고 있어야 사고의 전개가 가능하다. 그래서 태양 기운을 설명하면서 사무(事務)라는 용어를 그냥 요즘의 사무라는 용어 개념으로 설명하면, ‘짜아~, 그 당시에는 사무라는 용어가 송사(訟事)라는 뜻으로 사용됐다는 것도 모르면서 뭘 설명한다고 설치기는하며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고를 보조 기능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단어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또 한 단어가 여러 뜻으로 쓰이는 경우에는 그 여러 용법에서 공통되는 부분에 관심을 두지, 그 중의 어느 용법이 가장 옳으냐 하는 것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이런 부분들이 소음인이 용어의 정의를 지나치게 따지면 다른 체질이 질색하는 이유이다. 동무(東武) 시절에 송사라고 썼던 단어를 요즘의 사무(事務)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동무(東武)가 설명하려고 했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기 때문이다.

 

소음인을 너무 흉보는 것으로 보이는가? 이해하기 바란다. 사고 기능이 특히 중시되는 것이 학자들 사이인데, 요즘 우리 사회가 지나친 학벌 사회가 되다보니 그럴 필요가 없는 영역에서조차 사고 기능이 지나치게 강조된다. 그래서 균형을 잡자는 의미로 트집을 좀 잡아봤다.

 

 

 

 

 

7. 희정(喜情)과 당여(黨與) / 소음인의 태음 기운

 

 

동지 관계의 형성

 

이제 희성(喜性)과 희정(喜情)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희정(喜情)으로 하는 당여(黨與)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자.

 

태음 기운에 해당되는 인사(人事)는 당여(黨與)라고 했다. 글자 그대로 하자면 당()을 만드는 것인데, 요즘은 당이라고 하면 정당만을 생각하지만 정당은 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당이다. 즉 당의 특수한 한 예일 뿐이다. 그 외에 학문 탐구를 위한 모임이나, 사회개혁을 위한 모임도 동무(東武) 시절의 용어로 쓰자면 다 당()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정당이나 각종 사회단체부터 시작해서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의 모임까지를 다 망라하는 표현이 당()이다. 그렇게 넓혀서 생각하자면 당여(黨與)의 기본은 동지(同志)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소양 기운에 해당되는 교우(交遇)로는, 동료는 만들 수 있지만 동지는 만들기 어렵다. 동료는 무언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공유한다. 이익일 수도 있고, 명예, 직위일 수도 있고, 재미일 수도 있다. 단기간에 이뤄지는 것이고, 이뤄지고 나면 헤어져도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이다. 동지는 지()를 같이 하는 사람이다. ‘을 뜻하는 말로 지()와 의()가 있다. 지는 의가 오래 되어 익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같은 이라도 더 깊은 이다. 그래서 동지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동지가 아닌 사람들, ()를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당을 만든다. 이 당 저 당 쉽게 옮겨 다니기도 한다. 그런 건 당이 아니다. 지조가 없는 사람은 애당초 당을 만들 일도, 당에 가입할 일도 없는 법이다. 지조 없는 사람을 끌어모아 만든 건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다. 그런 건 패거리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 본격적으로 하면 할 말도 많아지고 욕할 사람도 너무 많아지니, 이 정도에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동지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희성(喜性)이 그 토대가 되는 태음 기운으로 하는 인사(人事)일 수밖에 없다. 뜻을 같이 한다 해도, 서로 다른 사람끼리 만나면 같은 부분 못지않게 다른 부분이 많다. 서로 다른 부분을 강조하면 동지가 될 수가 없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운인 희성(喜性)이 당여(黨與)의 토대가 되는 이유이다. 다른 부분은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같은 부분을 강화시키고 넓혀가다 보면, 동지가 되는 것이다.

 

 

 

 

소음인이 태음인보다 당여(黨與)에 능한 이유

 

그런데 희성(喜性)이 잘 발달된 태음인보다 희정(喜情)으로 당여(黨與)를 하는 소음인이 당여(黨與)에 더 능한 이유가 있다. 희성(喜性)은 사람들이 서로 돕는 것을 기뻐하는 것에서 발달한다고 했다. 희정(喜情)은 남이 나를 돕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다. 희성(喜性)에 의해 서로 받아들이고 돕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나를 돕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을 돕는 것이다. 그래서 동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아닌 자체를 돕는 것을 따지자면 동지보다 훨씬 더한 사람이 있다. 부모나 스승이다. 부모나 스승처럼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기쁠 것이다. 그 기쁨이 희정(喜情)의 발현 모습이다. 당여(黨與)도 누군가 부모 노릇, 스승 노릇을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훨씬 잘 이뤄지게 마련이다.

 

동무(東武)의 제자가 쓴 책에, ‘소음인은 승상접하(承上接下)에 능하다라고 설명한 구절이 있다. 쉬운 말로 윗사람을 잘 섬기고, 아랫사람을 잘 보살핀다는 뜻이다. 자기 윗사람, 아랫사람을 따지는 것은 사실은 우리 집단을 다른 집단과 갈라내는 기운이다. 가족은 우리 가족, 남의 가족이 있다. 스승, 제자간도 마찬가지다. 뜻만 같으면 뭉칠 수 있는 동지의 관계에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희성(喜性)만으로 당여(黨與)를 하려 들면 편과 편 아닌 사람이 갈라지지 않는 것이 또 문제가 된다. 태음인은 여러 당파, 여러 계급, 여러 직업에 걸쳐 다양한 친교를 맺는 경향이 있다. 뜻을 같이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친교가 맺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의 외곽이 선명하지 않게 된다. 태음인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모으는 것은 잘하는데, 태음 기운만으로는 그 외각을 형성하지 못하니 결국은 당의 모양이 좀 애매해진다.

 

요즘 수평적 리더십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당여(黨與)의 기본을 정확히 찍어낸 아주 중요한 말이다. 희성(喜性)을 토대로 동지를 만들어가는 능력이 수평적 리더십이고, 그것이 있는 사람이 리드를 했을 때 패거리가 아닌 건전한 의미의 당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수평적 리더십만으로 만들어지는 당은, 만들기도 어렵고 유지되기도 너무 어렵다. 여기에 보스적 리더십이 약간만 가미되면 아주 쉬워진다. 양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재료보다 양념이 더 많이 들어가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된다. 그것이 가부장적 리더십을 토대로 했던 우리나라의 정당이 제대로 된 정당이 될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렇다고 양념을 전혀 안 넣고 음식을 만들 수는 없다. 이 원리가 동지 개념의 희성(喜性)이 아니라 가족 개념이 가미된 희정(喜情)에 의해서 당여(黨與)가 이뤄지는 이치이다.

 

 

 

 

DJ의 당여(黨與)

 

필자가 정치인들 중에 당여(黨與)에 가장 강하다고 꼽는 사람은 김대중(金大中, 1924~2009) 전 대통령이다. 그런데 DJ는 소음인은 아닌 듯하다. 정치 스타일을 보면 태음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다만 태음인치고는 소음 기운도 아주 강하다. 태음인의 폭과 소음인의 깊이를 같이 갖춰서 정리도 잘하고, 토론에도 능하고, 남을 설득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즉 동지적 관계를 구성하는 바탕이 단단하면서도 가족적 관계를 동시에 도입할 능력이 있으니 당여(黨與)에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점점 DJ의 당이 진정한 당으로서의 모습을 잃어간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음인의 희정(喜情)은 스승이나 부모가 돕듯이 돕는 것이라서 많은 사람을 다 그렇게 챙기기는 어렵다. 따라서 받을 사람 안 받을 사람에 대한 원칙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태음인의 희성(喜性)은 뜻이 맞는 부분이 있으면 이를 중시하고, 서로 다른 부분은 접어두는 쪽으로 발동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받지 말아야 할 사람도 당에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DJ의 정치 역정이 워낙 심한 박해 속에 이뤄져서, 돕겠다고 오는 사람을 쉽게 거절할 입장도 아니었다. 나이와 체력이 뒷받침될 때는 뜻을 같이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통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체력이 달리면서 통제 기능을 잃게 되자, 결국은 받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당의 정체성을 흐려나가기 시작한다.

 

태음인이 정당을 이끌려면 적어도 당기 위원장이나 당 윤리 위원장은 소음인을 시키는 편이 안전하다. 소음인 중에서도 원칙론자로 잘 알려진 사람들이 민주당 내에도 몇 사람 있다. 이런 사람들을 당에서 좀 더 중시했으면 민주당이 훨씬 잘나갔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독자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당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려다보니 당에 관한 이야기가 정당 위주로 이야기가 되었지만, 위의 이야기는 모든 당에 적용되는 이야기다. 결국 시민단체나 학술단체나 정당이나 같은 운영 원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당이 국가 중요 기관의 하나가 되는 것이 오히려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즉 한 정당이 지배하는 독재보다는 낫지만, 두 정당이 정권을 주고받는 양당제도 그리 훌륭한 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가 아주 단순해서 사람들이 뜻을 중심으로 모여도 잘 돼야 두 개의 정당밖에 안 되는 사회라면 모를까. 다양한 정당들이 있어서 정당의 수준과 시민단체의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유럽식 다당제의 상황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를 위한 동지의 모임에 당이란 말이 들어간 정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취지에 더 가까워 보인다.

 

 

 

 

8. 락정(樂情)과 거처(居處) / 태음인의 소음 기운

 

 

가정(家庭)이란 무엇인가

 

소음 기운에 해당되는 인사(人事)를 거처(居處)라 부른다. 거처(居處)란 집안을 다스리는 일이다. 또는 집안을 다듬는 일이라 할 수도 있고, 집안을 정리하는 일이라고, 또는 집안을 꾸미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 이렇게 여러 가지 표현을 계속 나열하느냐고? 앞에서도 몇 번 강조했듯이 집안일이라고 할 때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그런데 꾸민다. 다스린다 등등의 표현 중 어느 하나에만 얽매인다면,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에 불과하다. 집안일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어야 가족들 간에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의 필요성은 긴장을 완화하고 쉬는 것에 있다. 집을 나서서 부딪치는 모든 일은 긴장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겪은 지나친 긴장을 풀 수 있는 공간, 이것이 집이 가지는 기본 의미이다. 정리하고, 꾸미고, 다스리고, 다듬고 하는 행위는 다 긴장의 완화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소음 기운이 거처(居處)의 기본이 된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긴장 완화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집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보호하는 곳이다.

 

요즘 공교육이 문제가 되면서 가정이 교육의 주체가 되는 집이 많다. 물론 가정에서의 교육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남과 더불어 살기를 가장 먼저 배우는 곳이 가정이니까. 하지만 가정교육을 넘는 부분, 즉 학교에서 배워야 할 부분을 가정에서 주로 배우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 가정이 긴장을 완화하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하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다. 굳이 집에서 아이를 가르치려면, 일정한 곳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것이 좋다. 나머지 시간, 나머지 공간은 긴장이 필요 없는 시간,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아이와 부모의 대화가 교육에 관한 것이 전부가 되면 아이에게는 집이 긴장을 완화해주는 곳이라는 느낌이 깨진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긴장의 해소가 안 되니까. 단순한 일과적 불안정이 아니라 정서적 성장이 멈추고, 회복되기 힘든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특히 긴장에 대한 대처능력이 눈에 띄게 약화된다. 빨리 공교육이 회복돼서 집이 집다운 집이 되는 날이 오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상당히 어둡다. 건전한 사회의 기본은 사회 구성원들의 높은 지식 수준이 아니다. 정서적 안정, 즉 사회 구성원들이 모듬살이에 적절한 수준의 정서를 가지는 것이 기본이다.

 

이 책에서 쓰고 있는 용어로 설명하자면, ‘거처(居處)를 사무(事務)나 교우(交遇)를 하듯이 풀어갔을 때는 여러 가지 폐해가 생기게 마련이며, 사무(事務)나 교우(交遇)에 해당되는 일은 공적인 부분이 제대로 담당해서 이를 가정에 맡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라고 설명될 것이다.

 

긴장 완화의 기본은 보호지만,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보호는 불가능하다. 부모 쪽도 감당이 안 되고, 아이도 반발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소음 기운이 거처(居處)의 기본이 되는 이치가 나온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는 긴장하지 않는다. 긴장은 변화하고 계속 예측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다. 그런데 소음 기운이 변화를 막아주는 방파제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기본이 되는 것을 잘 추려내서 늘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이게 소음 기운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음인의 집은 가구의 배치도 쉽게 바뀌는 일이 없고, 새로운 물건을 사들이거나 있는 물건을 내버리는 일도 드물다. 딱 필요한 만큼을 사서 유용하게 쓴다. 집안 식구끼리 집안일을 나눠서 하는 것도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소음인의 집에 들어가면 손님도 무언지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 정도 준비해 놓으면 비로소 부모나 아이나 별 부담 없이 보호가 가능해진다.

 

 

 

 

락성(樂性)이 아닌 락정(樂情)으로 가정이 운영되는 이유

 

하지만 집이라고 변화가 전혀 없을 수 있을까? 안정감을 위해서도 약간의 긴장은 필요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별로 유쾌한 예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는 적절한 예라서 드는 것이니 이해하기 바란다. 사람을 고문하는 방법 가운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면서 강력한 효과를 내는 고문 중 하나가,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즉 빛도, 소리도, 냄새도 완전히 차단된 곳에 가둬두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몇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환각, 환청이 시작되며 발작을 일으킨다고 한다.

 

결국 집안이 휴식에 최적인 적절한 공간이 되려면 큰 긴장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완만한 변화가 필요하다. 하늘은 변화무쌍하다.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기도 하고, 하지만 땅의 변화는 완만하다. 그래도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새 꽃이 피고, 어느새 낙엽이 지고. 그 정도의 완만한 변화, 세세한 부분은 원칙을 정하지 않고 자율에 맡겨서 작은 긴장을 유지하는 것, 그런 태음적인 감각이 가미될 때 소음 기운이 기본이 되는 거처(居處)가 더 원활히 돌아가게 된다.

 

희성(喜性), 희정(喜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락성(樂性)은 세상 사람들이 서로 보호하는 것, 락정(樂情)남이 나를 보호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이다. 그 즐거움을 헤아려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남이 나를 보호할 때 오는 즐거움이란, 그 보호 아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결국 락정(樂情)에 의한 보호는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보호이고 상대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보호이다. 따라서 때로는 보호가 부족할 수도 있다. 보호 대상이 즐거움을 위해 보호의 벽을 넘어서는 것도 어느 정도는 용납하니까.

 

태음인은 절대로 소음인처럼 완벽하게 보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정도가 거처(居處)에 적절한 보호이다. 지나친 원칙은, 완벽한 보호는 가능할망정 거처(居處)가 활력을 가지기는 어렵다. 이러한 이치들이 소음 기운으로 하는 거처(居處)에 소음인보다 태음인이 더 능한 이유이고, 거처(居處)희정(喜情)에 의해서 이뤄지는 이유이다.

 

결국 당여(黨與)거처(居處)는 동지 관계와 가족 관계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동지 관계와 가족 관계는 상당 부분이 겹치며, 서로 관계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즉 동지를 가족같이 느낄 때 동지 관계는 더 강해지며, 거꾸로 사이좋은 부부가 되려면 서로를 가까운 친구처럼 느끼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광고 문구를 써서 이야기하자면, 소음 기운과 태음 기운은 서로 부족한 2%를 채워주는 관계라고나 할까.

 

 

 

 

희락(喜樂)에 대한 보충 설명

 

사상인의 기본 성정(性情)에 대한 설명이 이것으로 끝났는데, 부분적으로 보충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좀 있다. 우선 희락(喜樂)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동무(東武)가 기본적으로 사회구성 원리에 대한 생각이 강한 사람이라서 사무(事務), 교우(交遇), 당여(黨與), 거처(居處)라는 더불어 살기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기에 여기서도 그 흐름을 따라 설명했다. 하지만 개인 심리에 맞춰서 희()는 받이들이는 기운, ()은 몰두하는 기운이라는 면에서 보면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이야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은 지나치면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 희정(喜情)이 지나치면 받아들이지 말 것을 받아들인다. 앞의 글에서 태음인인 김대중(金大中, 1924~2009)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받았다는 것과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그 경우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받은 것이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측면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도 받아들일 만한 측면은 있게 마련이다. DJ가 여력이 될 때는 그 부분만 받고 받지 말아야 할 부분은 안 받았다. 태음인의 희성(喜性)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희성(喜性)이 제대로 작동했기에 전체적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서도 추릴 만한 능력만 골라 쓸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력이 안 되면서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자신의 관리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는 희성(喜性)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소음인의 희정(喜情)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반대의 경우다. 받아들일 사람에게서도 받지 말아야 할 측면이 있는 법이다. 즉 스승이나 부모가 잘못 나갈 때, 희정(喜情)이 지나치면 이를 그냥 따라가게 된다. 태음인은 스승이나 부모에게 대들지 않는다. 하지만 따라가지 않고 버려서 윗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지 못하게 한다. 소음인은 따진다. 그러나 따져도 스승이나 부모를 바꾸지 못하면 결국은 잘못인 줄 알면서도 따라간다. 때로는 억지로 그 잘못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락정(樂情)의 문제를 보자. 락성(樂性)의 집중은 기본이 되는 일에 대한 집중이기에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락정(樂情)이 지나칠 때는 지엽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수가 있다. 취미생활에 빠지는 일이 도가 지나치기가 쉬우며, 도박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에 깊게 빠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태음인이 도박에 빠지면 또 그만큼을 건져낸다는 것이다. 도박을 통해서 사람 읽는 법, 마음 다스리는 법 등등, 이런 유용한 것들을 배운다. 또 태음인의 천성이 폭을 중시하다 보니 하나에 빠져도 여전히 다른 것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아서 그런 부분들이 어느 정도 방파제 노릇을 한다.

 

예를 들자면 바람을 피우면서도 배우자에 대한 애정(愛情)은 여전히 유지하는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래서 적당히 바람피우다가 바람피우는 일에 대해서 알 만큼 알았다 싶으면 다시 돌아가는 사람. 무 극단적인 예인가? 락정(樂情)만 지나치게 발달하고 다른 부분이 너무 약해서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9. 애노희락(哀怒喜樂) 성정(性情)에 대한 정리

 

 

이번 절에 나왔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의 뿌리는 거부하는 마음이다. 애성(哀性)이란 천시(天時)에 어긋나는 사기(詐欺)에 대한 거부의 마음이고, 애정(哀情)은 상대가 나를 속이는 것에 대한 거부의 마음이다.

 

()의 뿌리는 알리려는 마음이다. 사람들이 서로 모욕(侮辱)하는 것을 보고 노성(怒性)이 이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리려는 마음이다. 내가 모욕당했을 때 노정(怒情)이 이는 것은 상대가 나를 다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다.

 

()의 뿌리는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사람들이 서로 돕는 것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모습이기에 희성(喜性)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나를 도울 때 희정(喜情)이 나타나는 것은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표시이다.

 

()의 뿌리는 알려는 마음이다. 사람들이 서로 보호하는 것이 기본이 되는 것에 집중하여 확실히 깨우치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하기에 락성(樂性)의 기본이 된다. 남이 나를 보호할 때 락정(樂情)이 발동되며, 몰두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 거부하는 마음
() 알리려는 마음
() 받아들이는 마음
() 알려는 마음

 

 

 

 

10. 성정(性情)에 관한 보충설명

 

 

앞에서는 체질별로 개별적인 성정(性情)의 이야기를 주로 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성()과 정()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부분이 좀 있다. ()은 천기(天機)를 느끼면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고 정()은 사람이 애써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은 세상 사람들의 일에서 느끼는 것이고 정()은 내가 관련된 일에서 느끼는 점에서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성()보다는 정()이 수준이 낮은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절대로 정()이 성()보다 수준이 낮은 것이거나 천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
자연스레 나오는 것 사람이 애써서 하는 것
세상 사람들의 일에서 느끼는 것 내가 관련된 일에서 느끼는 것

 

 

필자의 세대가 죄수같이 머리 깎고, 군복 같은 교복 입고, 교련 훈련하며 자란 세대라서 필자 역시 전체주의적 사고에 많이 절어 있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런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성()이 정()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같은 천기(天機)나 인사(人事) 중에도 천시(天時)사무(事務) 같은 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지방(地方)이나 거처(居處)는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동무(東武)는 아니라고 말한다. ()과 정()은 둘 다 지극히 옳아서 성정(性情)에 있어서는 중인(衆人)이 요순(堯舜)과 비교해서 터럭 한 올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堯舜與人同耳].

 

그럼 중인과 요순의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가? 자신이 약한 영역을 할 때 비로소 생긴다는 것이다. 어차피 나중에 해야 할 이야기니까, 그 부분을 간단히 말하고 넘어가자. 양인(陽人)은 음적인 영역에서, 음인(陰人)은 양적인 영역에서 약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사상의 기운을 고르게 가지려 노력하니까, 그 부분에도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그 노력이 둘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장점을 계속 연마해서 이를 통해 자신이 약한 영역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박통(博通: 널리 통함), 독행(獨行: 홀로 행함) 이라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원래 그 부분에 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못 느끼는 다른 기운을 자기 식으로 넘겨짚고, 어설프게 흉내 내는 방식이다. 그러면 사심(邪心: 편벽된 마음), 태행(怠行: 게으른 행동)에 빠져서 엉뚱한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심(邪心), 태행(怠行)이란 놈이 워낙 막강해서 중인이 요순과 같은 경지에 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나올 이야기니까, 일단은 정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글에서 읽었던 내용으로 기억되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럽에 사는 어느 베두인(Bedouin)의 후손이 밤에 수도꼭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깬다. 물론 물을 아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물 한두 방울이 샌다고 깜짝 놀랄 일이거나, 그것이 꼭 잠가지지 않는다고 밤을 꼬박 새울 일은 아니다. 주인공은 왜 그 정도 상황에 그렇게 민감한지를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 베두인의 감각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은 유럽에서 태어나 유럽에서만 살았지만, 자신의 핏속 어딘가에 물 한 방울이 생명처럼 소중했던 사막 베두인족의 감각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물 한 방울에 대한 집착을 주변의 유럽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공연히 유난 떤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다. 개인적인 감각, 개인적인 본능이란 그런 것이다. 이해 못하는 타인이 보기에는 어긋난 것이거나 공연한 것이기 쉽다. 그러나 그 물 한 방울은 사막에서의 물 한 방울과 이어진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 물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속에 자연에 대한 공경이 있다. 지극히 옳은 감각인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개인적인 것이라도 그 뿌리 자체는 지극히 옳은 것에 이어져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이다. 다만 그 드러남이 과도하거나, 드러나지 말아야 할 때 드러나기에 문제가 될 뿐이다.

 

사무(事務)락정(樂情)으로 하면 이는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거처(居處)에 있어 락정(樂情)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 당여(黨與)노정(怒情)으로 하려 하면 나와 남을 다치게 할 뿐이다. 그러나 교우(交遇)에 있어 노정(怒情)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잘못 사용할 때이다. () 그 자체는 성()만큼이나 지극히 옳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과 정()은 둘 다 모두 적용해야 할 영역이 어긋나지 않는 한 옳게 적용되는 능력이다. ()은 노력에 의해 발동된다고 하지만, ()을 발동시킬 것인가 아닌가에서 의지가 개입되고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 방향 자체는 자연스레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2부에서 설명할 박통(博通)이나 독행(獨行)은 꾸준한 노력과 자신이 약한 영역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방향이 옳은가에 대해 꾸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이 발동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국 성()과 정()은 모두 본능적인 능력이며 옳은 방향을 지향한다. ()과 정() 사이의 차이는, ()은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으로 주로 작용하고, ()은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으로 주로 작용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다.

 

성과 정 사이의 문제를 이야기했으니 같은 정끼리의 문제도 이야기해보자. 어느 소음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아이만 바르게 키우면 세상은 훨씬 살 만해질 것이다.” 참으로 맞는 이야기이다. 내가 비록 부족한 것이 있어 완벽하게 키울 수는 없어도, 아이를 바로 키우고자 지성으로 노력하면 아이는 나보다는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또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그렇게 노력하면 그 아이들의 아이들의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사무(事務)가 아니라 거처(居處)가 세상을 바로 잡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른 이야기이기도 한다. 각자 그렇게 바르게 키운 아이들끼리 서로 부딪혀 싸우고 죽인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이다. 집단 간에 서로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 때, 한쪽 집단에서 바르게 키우려는 노력은 다른 쪽에서 보면 아이를 타락시키는 일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노력이, 가족 관계에서 동지 관계로, 또 더 큰 모듬살이의 관계로,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더 큰 질서로 이어져 나간다. 여기에서 당여(黨與), 교우(交遇), 사무(事務)의 원리들이 나오는 것이다.

 

, 이제는 반대로 사무(事務) 쪽에서 시작해보자. 옳은 원칙이나, 갈등 집단 사이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다고 해보자. 그러면 바로 세계가 좋아질까? 이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이해시키고, 머리로만 느끼는 수준을 넘어 가슴속까지 정서화하고, 그 뜻을 기준으로 뭉치게 하느냐 하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넘어서면 어떻게 하면 자라는 아이들이 이 바른 원칙에 젖어 살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나타난다. 거기까지 되었을 때 이를 비로소 문화라 부를 수 있다. 사무(事務)라는 측면에서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할 만한 수없이 많은 종교와 문명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아직도 야만적인 전쟁, 테러가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하나의 원리로 두루 꿰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에 맞는 다양한 원리들이 서로 조화를 이뤄서 이뤄지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 맞게 돌아가는 것, 그것이 좋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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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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