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이고 논리적이나 옳지 않은 경우
사실 위의 경우는 보편/특수, 객관/주관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이는 객관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때문에 나타나는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다. 그러나 초보적 논리성 부족으로나 빚어질 수 있는 그런 황당한 사고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언론이라고 주장하는 신문의 사설에 너무 자주 등장하기에 좀 길게 다뤄봤을 뿐이다. 우리가 마음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문제, 즉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옳지 않은 경우’의 문제다.
‘객관이란 방법론이다’라는 말을 예를 좀 들어서 다시 설명해보자. 객관이란, “‘A=B’이고 ‘B=C’이면 ‘A=C’다”라는 식의 기본적인 논리들에 익숙하고 이를 정확히 적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A=B’인지 아닌지를 인식하는 것은 주관이다. 똑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기계로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든 두 개의 책상은 같은 책상이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책상이 하나는 내 책상이 되고, 다른 하나는 이웃집 책상이 된 뒤에는 어떨까? 그 둘은 같은 책상일까, 다른 책상일까? ‘같다/다르다’라는 두 가지 대답이 동시에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서로 다른 두 개체의 특성이 어느 정도까지 겹칠 때 비로소 ‘같다’고 할 것인가” 이다. 어떻게 결정할까? 그건 논리가 아니다. 직관이다.
이제 사상체질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객관은 근본적으로 소음 기운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즉 객관이란 어느 정도 구획이 정리되어야 적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영역에서는 ‘이런 정도를 같다’라고 부르자는 합의가 있어야 객관의 적용이 가능해진다. 고가도로의 교각을 세웠는데 교각의 두께가 설계도와 0.5cm 차이가 나면 완벽할 정도로 시공한 것이다. 그러나 정밀기계를 올려놓을 받침대를 만드는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결국 영역마다 적용될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영역을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기준을 확립하는 소음 기운 없이는 객관이란 불가능해진다. 기준이 서야 비로소 방법론이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한 영역에서 객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법론을 다른 영역에 무리하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생명은 소중하다’는 말은 항상 옳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기준에 선행될 수는 없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와 사회의 개혁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니 좀더 신중해지기를 바란다’는 정도의 주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을 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죽음의 굿판을 거둬치워라’라고 그 상황을 비난한다면, 개인 윤리의 영역과 사회 윤리의 영역에서의 기준 차이를 무시한 주장이 되고 만다.
2002년 봄에는 연평도 근해에서의 꽃게잡이 문제가 남북간의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당시 북한은 외화 고갈로 석유 수입이 곤란해지면서, 국가 전체가 에너지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서해에서의 꽃게잡이가 국가의 활로와 관련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NLL이라는 선은 연합군 측이 일방적으로 그은, 국제법에 어긋나는 선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먼저 발포한 사실 자체는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또 그 교전으로 인해 우리의 젊은 병사들이 죽었는데 이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생명을 경시하는 나쁜 태도이다. 죽은 병사들의 애국심은 충분히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협상에 앞서, 북한의 선제 발포에 대한 책임을 우선적으로 물어야 한다’거나, ‘순국한 병사들의 죽음 앞에서 NLL의 부당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거나,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논의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면 이는 잘못된 일이다. 도덕적 책임을 따지는 일만큼이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안을 찾는 일 역시 소중하기 때문이다. 원칙과 명분을 따지고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비슷한 사태가 재발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북한을 협상 당사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주장에서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측의 문제는 무엇이며, 북의 주장 가운데서 인정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가 의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한 영역에서는 객관적이라고 인정받는 부분이라도, 다른 영역에 무리하게 적용하면 더 이상 객관이 아니다. 한 개인의 주관은 아니지만, 그것은 한 소집단의 주관일 뿐이다. 객관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더군다나 ‘잘못된 주관’이다. 이런 잘못된 주관을 논리 전개의 합리성만을 내세워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 소음 기운에 치우쳤을 때 범하기 쉬운 잘못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