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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1부 씨앗 - 3장 새로운 판 짜기,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1부 씨앗 - 3장 새로운 판 짜기,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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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알파벳을 만들고 오리엔트 문명을 지중해 일대에 퍼뜨린 공적이 없었더라면 역사에서 페니키아라는 이름은 아주 작게 언급되고 넘어갔을 것이다. 페니키아라는 실체 자체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위상을 지닌 민족이 하나 더 있다. 헤브라이(히브리)라고 불리는 민족이다.

 

지금은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헤브라이인들 역시 페니키아인들처럼 당대에 강성한 나라를 이루고 세력을 떨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페니키아의 알파벳에 못지않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유산을 서구 문명에 전달했다. 바로 그들의 독특한 유일 신앙인 유대교다. 유대교의 신앙과 헤브라이인의 역사를 서술한 경전은 구약성서이고,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한 종교는 그리스도교다. 종교가 아니었더라면 후대의 역사에서 헤브라이라는 이름은 아예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약성서를 통해 후대에 강력한 정신적 영향력을 미친 덕분에 헤브라이인의 역사는 당대에 그들이 가졌던 세력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지게 되었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다소 과장된 것도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라비아를 고향으로 하는 셈족의 한 갈래인 헤브라이인들은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팔레스타인의 가나안으로 이주해왔다. 그로부터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이집트의 영향권에서 나라를 이루어 살면서 특별히 인상적인 역사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히타이트가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라 이집트와 팽팽한 긴장 상태를 조성하면서 대치하던 기원전 13세기 무렵(카데시 전투가 벌어질 무렵)에 역사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이미 그 이전부터 상당수 헤브라이인들은 상국인 이집트에서 노예나 하층계급을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람세스 2세의 치세에 그들은 람세스의 친구인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에서 대규모로 탈출한다. 이 내용은 구약성서출애굽기에 전해진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랬듯이, 당시는 정치적 지도자가 곧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정교일치의 시대였다. 모세는 자신이 신에게서 특별한 선택을 받았음을 내보이기 위해 십계명을 만들고 정치적 지도자를 겸했다. 그들이 오리엔트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후대에 생겨나는 또 다른 일신교인 이슬람교의 경우 지금까지도 정교일치의 성격이 남아 있다). 이후 모세는 민족을 이끌고 40년간 유랑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들어가 120세의 나이로 죽는다(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둔 채 죽었다는 설도 있다).

 

 

모세와 십계명 원래 양치기였던 모세(왼쪽)는 바다(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힘으로 이집트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나이 산(오른쪽)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이 산 꼭대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종교적인 설명은 이렇지만, 실은 그가 바로 십계명의 작자였던 게 아닐까?

 

 

그러나 약소민족으로서 가나안에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헤브라이인을 가장 괴롭힌 것은 이웃의 팔레스타인이었다구약성서의 블레셋과 페리시테, 영어의 필리스틴(Philistine) 등은 모두 팔레스타인을 가리키는데, 다 부정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심지어 Philistine이라는 말은 잔인한 놈, 속물이라는 뜻의 일반 단어로도 쓰인다. 그리스도교의 자기중심주의와 배타성을 보여주는 예다. 이국에서의 오랜 노예 생활과 40년간의 유랑 생활을 겪고서 새 터전을 찾은 헤브라이인들에게는 혹독한 이웃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고 보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견디다 못한 헤브라이인들은 그 지역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라를 건설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기원전 11세기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사울을 초대왕으로 추대했다.

 

사울이 팔레스타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뒤이어 즉위한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 왕국은 비로소 번영과 안정을 누렸다. 영토를 확장하고 예루살렘에 수도를 건설한 것이 다 다윗의 공로였다(그가 거인 골리앗을 팔매질로 죽인 것은 그 공로를 상징하는 동시에,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인 약소민족 유대인의 처지를 상징한다). 3대 왕인 솔로몬의 시대에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해 새 나라의 기틀이 확고해졌다.

 

구약성서에는 이런 내용이 아주 상세하고 거창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당시 팔레스타인 일대가 그렇듯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오리엔트의 중심권에서 먼 변방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 단적인 예가 다윗과 솔로몬의 즉위 과정이다. 이들은 왕위를 세습한 게 아니라 추대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지금은 추대가 더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고대사에서는 왕권이 강한 국가가 선진국이므로 왕위 세습이 추대보다 더 발달한 왕위 계승 제도다. 기원전 10세기라면 오리엔트는 물론 중국(주나라)에서도 왕위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취약한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지역의 패자로 부상하던 이스라엘 왕국에 다시 시련이 닥친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을 탓할 이유가 없다. 이웃의 괴롭힘이나 침략이 아니라 내분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통치 말기인 기원전 933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려 북쪽에는 이스라엘 왕국, 남쪽에는 유다 왕국으로 분립한다헤브라이 민족은 신의 명에 따라 12개 지파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10개 지파가 북부의 이스라엘 왕국에 참여했고, 유다파와 베냐민파는 유다 왕국을 세웠다.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가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10개 지파는 뿔뿔이 흩어져 역사에서 사라졌는데, 이 사라진 10지파에 관한 전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네스토리우스교도나 모르몬교도가 그들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고, 근대까지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를 이룬 에티오피아인들이 그들이라는 설도 있다. 심지어 그들이 아메리카와 일본으로 갔다는 설도 있다.

 

여기까지는 고통과 수난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조상들처럼 남의 나라 땅에서 노예처럼 살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오리엔트 세계가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격변기였다.

 

 

골리앗을 눕힌 다윗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윗)이다. 돌팔매로 블레셋의 대장 골리앗을 쓰러뜨린 직후의 모습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이야기가 무슨 커다란 사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실상 다윗은 지역의 우두머리에 불과했고, 당시 이스라엘 왕국도 아주 미미한 존재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수수께끼의 해적들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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