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변혁의 18세기
제국의 꿈
일찌감치 영토 국가의 관념을 깨우친 덕분에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리슐리외가 사실상 전권을 지배한 루이 13세 치하처럼 ‘총리의 시대’가 계속되었더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나라의 주인’인 국왕이 직접 나선다면 사태는 달라질 터였다. 과연 절대왕권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 상황에 걸맞은 절대군주가 탄생했다. 그는 후대에 ‘태양왕’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를 배후 조종한 리슐리외는 1642년에 죽어 6년 뒤에 벌어진 베스트팔렌 논공행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 루이 13세도 그 이듬해 죽었고 그의 아들 루이 14세가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럼 베스트팔렌 조약은 열 살짜리 어린애가 주도한 걸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1643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낀 루이 13세는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아홉 살 때 즉위한 자신과 이제 다섯 살로 프랑스 왕위를 잇게 될 아들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여겼다. 부자간에 닮은 점은 또 있었다. 그에게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어머니(마리)가 있었듯이, 아들에게는 에스파냐 왕가 출신의 어머니가 있었다. 루이 13세의 아내인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오스트리아의 안’이라는 뜻이지만 에스파냐 왕 펠리페 3세의 딸이다)는 바로 유럽 최대의 명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것이다(프랑스 왕실에 에스파냐나 합스부르크와의 통혼이 필요했듯이, 유럽의 명가들에게도 프랑스 왕실과의 통혼이 필요했다). 다만 리슐리외의 역할을 해줄 인물이 필요한데, 여기에도 적임자가 있었다. 리슐리외의 총애를 받아 추기경에 오르고 그에게서 국정 운영의 솜씨를 배운 마자랭(Mazarin, 1602~1661)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실에는 30여 년 전과 똑같이 나이 어린 왕과 섭정을 맡은 태후, 국정 운영을 맡은 총리의 구도가 들어섰다. 이들 역시 지난번 팀처럼 팀워크가 뛰어났고, 프랑스의 국력 강화라는 똑같은 목표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 새 팀에는 전과 다른 요소가 세 가지 있었다. 우선 마자랭은 리슐리외와 달리 외국인(이탈리아인)이었고, 루이 14세는 아버지처럼 한창 일할 나이에 죽지 않았으며, 태후는 합스부르크 혈통이었다.
리슐리외를 존경한 마자랭은 선배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그래서 그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주도하고 유럽의 평화를 안착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은 외국인 총리에게 진심 어린 신뢰를 주지 않았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마무리된 1648년에 귀족들은 상류층에 대한 과세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려는 마자랭의 조치에 반발해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다. 급기야 시민들도 귀족편에 가세해 이 반란은 두 차례의 내전까지 수반하면서 5년이나 끌었다.
▲ 태양왕 “내가 곧 국가다.”라고 말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당당한 모습이다. 그는 77년을 살았고, 그중에서 72년을 프랑스 왕으로 보냈다. 보수적이고 야심에 찬 군주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강국으로 일구었으면서 동시에 몰락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루이는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맥을 같이하는 절대왕정 시대의 전형적인 군주다.
사실 이 쿠데타는 역사적으로 양면의 칼이었다. 성공한다면 프랑스의 절대왕정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좌초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오히려 왕권을 크게 강화해줄 터였다【만약 프롱드의 난에서 귀족들이 승리해 권력을 잡았다면 프랑스는 그 무렵의 영국처럼 시민혁명이 성공한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국보다 앞서 그때 입헌군주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 역사에만 기록된 작은 쿠데타였지만(프롱드란 당시 파리의 아이들이 관헌에게 돌멩이를 던지던 놀이의 이름이었다), 당시 쿠데타와 혁명은 한 끗 차이였다. 어쩌면 18세기의 프랑스 대혁명보다 한 세기 전에 피는 덜 흘리고 성과는 더 큰 시민혁명의 기회였을 수도 있다】. 현실의 결과는 후자였다. 프랑스 귀족들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까지 100여 년 동안 두 번 다시 왕권을 넘보지 못했고, 어렵사리 반란을 진압한 마자랭은 절대왕정으로 가는 길을 확고히 구축했다. 당시에는 선진 체제를 굳히는 발전이었으나 멀리 보면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으로 무너지게 되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출발이었다.
루이 14세의 절대주의는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661년에 마자랭이 죽자 스물셋의 루이는 이제부터 총리대신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리슐리외 이래 50년 남짓 지속된 총리의 시대는 끝났다.
루이의 통치 철학은 단순했다. 국왕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역할’이었고 가훈은 ‘너 자신을 누구보다 우월하게 하라’는 것이었다【이런 맥락에서 “내가 곧 국가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이 등장했고, 오늘날 유럽 최대의 왕궁으로 남아 있는 베르사유 궁전이 건축되었다. 그의 이런 자신감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의 상황을 스스로 평가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볼 수 있다. “이웃 나라와 평화 관계가 수립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오래갈 것 같았다.” 사실 프랑스는 이미 기선을 제압한 상태였으므로 이후에는 더 천천히 팽창 사업을 진행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은 스스로에게 그런 여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친정(親政)을 선언한 데는 그런 오만함과 자존심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사실 오랜 총리의 시대를 거치며 프랑스에는 관료제가 상당히 발달해 있었으므로 루이로서는 특별히 한 사람을 중용하고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모든 관리는 국왕의 명과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수족이 되어야 했다.
루이를 보좌한 인물들 가운데 굳이 한 사람을 꼽으라면 재무를 맡아서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콜베르(Colbert, 1619~1683) 정도였다. 콜베르는 한발 앞서가고 있던 무역 선진국 영국과 네덜란드를 따라잡기 위해 수출 장려와 보호관세, 국내 산업 육성 등 중상주의 정책 (콜베르티슴)의 전형을 선보였고,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세워 해외 무역에 주력했다(이 무렵부터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는데, 영국보다 뒤늦은 탓에 주로 북부, 즉 지금의 캐나다 동부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캐나다가 영연방 소속이면서도 프랑스어권이 많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토 국가 체제를 갖추었어도 그에 걸맞은 국가 재정이 미비했던 시절에 콜베르의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후발 주자로서 선발 주자를 따라잡는 것은 ‘같은 무기’(해외 무역과 중상주의)만 가지고는 불가능했다. 더욱이 프랑스는 전통적 농업국가인 탓에 해상에서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당해낼 수 없었다. 1672년부터 6년간 전개된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별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콜베르티슴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이 전쟁의 네덜란드 측 당사자가 바로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되는 빌렘이다)【콜베르의 정책은 영국, 네덜란드와 충돌을 빚었을 뿐 아니라 한창 성장하던 프랑스 국내 부르주아지에게서도 반발을 샀다. 일찍부터 상업과 무역의 맛을 안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인, 기업가 들과 달리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산업과 무역에 투자하기보다 토지, 국채 등에 투자하고자 했다. 게다가 그들은 당시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던 관직 매매에도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루이는 바다를 버리고 땅의 영토를 팽창하려는 전략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바야흐로 ‘대륙제국’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말이 좋아 팽창이지, 실은 전쟁이다. “나는 전쟁을 좋아한다.”라고 직접 밝혔을 만큼 루이의 야망은 노골적이었다. 어차피 전쟁을 벌일 결심이 섰다면 전쟁의 구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1685년 그는 할아버지 앙리 4세의 업적인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가톨릭으로 회귀했다(종교적인 목적을 앞세웠다기보다는 절대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종교의 통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신교도들은 100년 만에 다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망명해야 했다. 그중 상당수가 네덜란드로 갔으니, 가뜩이나 미운 네덜란드를 바라보는 루이의 눈길이 더욱 사나워진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1688년 네덜란드 총독 빌렘이 영국의 윌리엄 3세로 즉위했다. 그것으로 목표는 정해졌다. 루이는 프랑스로 망명한 영국의 제임스 2세를 복위시킨다는 구실로 네덜란드를 침략했다(지금 같으면 명백히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이지만, 당시는 근대국가 체제가 생겨난 초기인 탓에 중세적 통합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데다 각국이 통혼으로 얽혀 있어 ‘타국’이라는 관념이 약했다. 한 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이 곧장 국제전으로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반응은 놀라웠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물론, 프로이센과 작센을 비롯한 독일의 영방국가들, 합스부르크의 에스파냐 등 서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프랑스에 반대해 동맹을 결성하고 나섰다. 이들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이라는 대프랑스 동맹으로 뭉쳤으므로 이 전쟁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이라고 부른다. 비록 ‘일 대 다(多)’의 싸움이었지만 프랑스의 힘은 엄청났다. 10년간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내내 우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아킬레스건인 해군력이 약한 탓으로 해상에서는 영국에 패하고 말았다(해군력의 약점은 이후 영국과의 경쟁에서 계속 프랑스의 발목을 잡게 된다)【엄밀히 말해서 프랑스의 해군력은 국보다 약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함선은 국의 함선보다 성능이 좋았다. 심지어 영국의 해군 장교들은 프랑스로부터 빼앗은 프랑스 군함을 지휘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였을 정도다. 그러나 전쟁이 장비만으로 되던가? 전력에서 유리한 프랑스 해군은 자국의 상선들을 보호하는 데만 열중했을 뿐 전투에는 소극적이었다. 반면 영국 해군은 대담한 공격 전술로 적극 공세를 펼쳤다. 이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영국 해군력은 차츰 프랑스를 능가하게 되었다】. 결국 1697년 레이스웨이크 조약으로 종전이 이루어졌지만, 프랑스가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알자스-로렌 남쪽의 스트라스부르뿐이었다. 루이의 꿈은 일단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일 뿐이었으며, 곧이어 다가올 18세기 전란의 시대를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18세기 벽두인 1701년 다시 유럽 대륙은 대규모 국제전을 맞이해야 했다. 이번에는 에스파냐에서 전쟁의 계기가 터졌다.
▲ 베르사유 시대의 개막 루이 14세가 세웠을 당시 베르사유 궁전의 웅장한 전경이다. 현재는 프랑스 최대의 유적이자 관광 상품이자 역사 미술관이 되어 있지만, 루이의 시대에는 17세기 유럽의 역사가 설계된 곳이다. 이후에도 베르사유 궁전은 나폴레옹 시대, 1848년의 혁명, 1871년의 파리 코뮌, 그리고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과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현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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