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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깨달음에 대해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깨달음에 대해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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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해

 

 

그렇다면 우리가 소박한 의미맥락에서 해탈과 열반이다는 주제를 중심으로 핍팔라나무 밑에서 정진하고 있는 싯달타의 정신세계를 접근해 들어간다면, 싯달타에게 있어서 마라(魔王)의 퇴치는 곧 해탈과 열반을 달성하는 첩경을 확보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처럼, 그가 일생 받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의 가능성을 압축적으로 받았고, 그 욕망의 불길을 껐다고 한다면 그는 곧 열반을 달성했을 것이고, 열반을 통하여 그는 자유로움을 획득하고 해탈(mokṣa, 解脫)을 얻었을 것이다. 이것이 보통 싯달타의 보리수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으로 싯달타의 득도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 그 자체의 이해방식을 극도로 폄하시키는 편벽한 소치라고 생각한다. 욕망의 제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모든 수행인들이 일차적으로 정진하는 매우 기본적인 디시플린(discipline, 규율)이다. 이러한 디시플린에 싯달타가 뛰어남으로 해서 그가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굳이 그의 가르침인 불교에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Saint Francis of Assisi)만 해도 욕망의 제어라는 측면에서는 우리의 상식적 기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싯달타의 성불의 과정을 설명해들어갈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핵심적 테마는 무엇인가? 나는 이 어려운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려 한다.

 

저 보리수를 보라!

 

그가 얻으려 했던 것은 바로 보리’(菩提, Bodhi)였다. 보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다. 무상정등정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각이다. 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다. 무엇을 어떻게 안다는 것인가?

 

불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조차도, 지금 우리가 논의해왔던, 해탈(解脫, mokṣa), 열반(涅槃, nirvāṇa),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이 세 단어는 매우 두리뭉실하게 비슷한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다른 표현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싯달타가 붓다가 될 수 있었던 바로 그 비결은 깨달음이라는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로써는 그의 붓다됨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싯달타를 붓다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가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핍팔라나무 밑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은 선정(禪定)을 위한 것이 아니요, 마라(魔王)의 퇴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깨닫기 위해서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깨달음의 과정은 바로 마라와의 싸움이라는 프렐루드(prelude, 序幕, 서막) 이후부터 전개된 것이었다.

 

붓다(Buddha)라는 말 자체가 각자(覺者), 깨달은 자’(one who has awakened)를 의미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는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꿈 속에서 또한 꿈을 점치기도 하다가,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안다[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라고 했고, 대종사(大宗師)에는 그대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그 자체가 깨어있는 것인지, 꿈꾸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不識今之言者, 其覺者乎? 其夢者乎?]’라 했다. 보리(菩提, bodhi)’()으로 한역한 것은 바로 이 장자의 문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한문의 의미구조에서의 은 항시 꿈과 대비되는 의 맥락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의 보리는 반드시 꿈과 대비되는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 아닐 뿐 아니라 중국인들, 특히 도가계열의 사상가들이 꿈과 대비되어 쓸 때의 반주지주의적 의미맥락을 지니지 않는다. 더구나 이러한 도가적 요소가 강하게 발전하여 극치에 오른 선종(禪宗)이 강하게 표방하는 반주지주의적인, 아니 지식의 저주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그러한 분별지의 혐오감이 이 깨달음이라는 말속에는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선종의 반주지주의 (anti-intellectualism), 분별지의 거부, 즉 개념적 지식에 대한 혐오야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시불교의 본의로 직입(直入)하는 길을 차단시키는 험준한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고타마 싯달타는 과연 어떤 출신의 사람이었을까? 노ㆍ병ㆍ사도 모르고 고귀하게 자라난 카필라성의 왕자였을까? 브라흐만(Brahman) 계급이었을까? 크샤트리야 계급이었을까? 아니면 수드라 천민의 혁명적 반항아였을까? 이 모든 질문에 우리의 정답은 있을 수 없다. 단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해박한 지성과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고 초기 승단을 이끌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 사실은 지금의 나와 똑같이 숨쉬고 살았던 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카필라성 입구에서 우연히 만난 이 동네청년의 얼굴에서 나는 달타를 보았다. 싯달타는 우리에게서 결코 널리 있지 않은 이런 한 인도 정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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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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