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라는 판타지
아유타에서 온 허왕후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인도는 결코 우리의 심층의식 속에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보드가야’라는 지명은 붓다의 보리수나무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 지역을 우리는 그냥 ‘가야’(Gaya)라고 부른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드(bodhi)를 떼어내면 가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야라는 지명이 우리나라의 ‘가야’(伽耶)국의 이름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설도 단순한 발음의 일치를 넘어서는 어떤 역사적 교류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금관 가야국의 개조(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부인을 취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남쪽바다로부터 배타고 오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후로 맞이했다는 전설은 단순한 전설이상의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을 전달해주고 있다고 보여진다【『三國遺事』 卷第二, 紀異第二, 「駕洛國記」.】. 지금도 웃따르 쁘라데쉬(Uttar Pradesh)주의 화이자바드(Faizabad)에서 동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아요댜(Ayodhya)라는 성스러운 도시가 있다. 힌두이즘의 7성지중의 하나이며,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Rama)의 출생지로서, 그 서사시의 많은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고도인 것이다. 이 아요댜가 바로 김수로왕의 부인 허씨공주의 본국인 ‘아유타’(阿踰陁)인 것이다. ‘아유사’(阿踰搯), ‘아유차’(阿踰遮)라고도 표기된다. 현장(玄奘)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5에서 다음과 같이 개관하고 있다.
아유타국은 주위가 5천여리고, 나라의 대도성은 주위가 20여리가 된다. 농업이 번창하고 꽃이나 과일이 풍성하다. 기후가 온화하고 풍속이 선량하다. 복 비는 제사를 지내기 좋아하며 기술을 배우는 것에 힘쓴다. 불교가람이 백여개가 되며, 스님들은 3천여명이 주거하며, 대승과 소승을 겸하여 학습하고 있다. 힌두신들을 모시는 사원도 10여군데 있으나, 이교도들은 적은 편이다. 그리고 세친(世親, 바수반두)과 무착(無着, 아상가)과 같은 대사들이 묵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강당들이 있다.
阿踰陁國, 周五千餘里. 國大都城, 周二十餘里. 穀稼豊盛, 花果繁茂, 氣序和暢, 風俗善順. 好營福, 勤學藝. 伽藍百有餘所, 僧徒三千餘人, 大乘小乘, 兼攻習學. 天祠十所, 異道寡少. 大城中有故伽藍, 是伐蘇畔度菩薩數十年中, 於此製作大小乘諸異論. …… 『大唐西域記』 卷五.
전설로만 들렸던 이러한 얘기들이 이제는 보다 리얼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도의 벵갈만에서 배를 타고 가야의 남해안까지 직접 올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고대사회는 오히려 우리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서 활발하게 교류된 문명의 터전들이었다. 조선반도의 고대문화가 천축국들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만은 없다.
KBS ‘도올의 논어이야기’ 강좌를 끝내고 나는 외유의 길에 나서야만 했다. 나는 세계문명의 정점에 서 있는 맨하탄의 한복판에서 특별한 콤미트먼트(Commitment)가 없이 3개월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학문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가는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축복의 시간이었다. 젊은 시절때보다도 훨씬 더 집약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인류문명의 정화를 꽃피우고 있던 뉴욕의 싱싱한 젖줄을 실컷 빨아 들이킬 수 있었다. 그 시절은 뉴욕이라는 문명의 클라이막스였다. 나는 트윈 빌딩 바로 밑에서 살았다. 그리고 트윈 빌딩이 폭파되기 바로 며칠 전에 존 에프 케네디공항을 이륙하였던 것이다. 운명의 신은 결코 나의 몸둥이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五蘊)의 이산(離散)을 허락하는 것 같질 않았다.
▲ 우리나라 경주 황룡사 장육존상 기단의 돌 받침. 진흥왕 14년(553) 2월에 대궐을 용궁 남쪽에 지으려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지었는데, 그것이 황룡사다. 얼마 안 있어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떠와 하곡현 사포에 닿았다. 이 배속에 공문이 있었다. 인도 아쇼카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석가불상 셋을 주조하려다 이루지 못해 그것을 배에 실어 띄우면서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 달라[願到有緣國王, 成丈六尊容].”고 축원했다는 내용이었다. 한 부처와 두 보살의 모형도 함께 들어 있었다. 바로 이 장육존상이 우뚝 서 있던 자리가 지금도 황룡사 절터에 남아있다. 『삼국유사』 권 제3, 탑상제4,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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