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
하나의 사상, 하나의 시대정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이젠 너무도 분명한 듯 보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선언을 아직 들어보지 못한 분이 있다면 시대의 조류에 매우 둔감한 분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어디서나 거론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하나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이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나아가 최근의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포스트모던하다’라는 형용사로 특징짓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도 이런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사조들, 예를 들면 맑스주의 같은 것들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옛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시대정신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몰락한 낡은 사상들을 대신해서, 몰락한 맑스주의 혹은 진보의 이념을 대신해서 일종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총체성에 대한 반대,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 합리주의에 대한 반대, 거대이론(Grand narrative)에 대한 반대 등등. 하지만 이는 시대정신의 종말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분명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러면 사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내용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 새로운 정신은 대개 무엇 ― 이전에 지배적이던 것이겠지요 ― 에 대한 반대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생각이나 정의들이 주장하는 사람마다 다른 것도 이와 그리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론을 시작한다고 해서 제가 이 강의를 통해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반론을 펴거나 포스트모던한 비판에 대해서 ‘근대주의’를 옹호하려 한다고 받아들이진 말아 주십시오. 저는, 그 방향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포스트모던’하다고 지칭되는 현상들, 혹은 모던한(근대적인) 이론에 대한 그 비판적 요소들을 무시하고 매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포스트모던에 대한 화려하고 요란한 논의 속에서 오히려 질문되지 않은 채 잊혀진 문제들, 그러나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좀더 근본적인 건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근대의 뒤에 오는 ― ‘포스트’가 무엇의 뒤라는 말이죠 ― 어떤 시대나 그 시대를 반영하는 어떤 이념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근대란 도대체 무엇인가? 근대를 벗어난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탈근대’란 무엇인가?(이것을 우리는 ‘탈근대’라는 말로 잠정적으로 규정합시다. 이후에 저는 ‘탈근대’ex-modern와 ‘포스트모던’을 구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를 벗어난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금 현재의 시대를 ‘탈근대’라고 부르는 서술적 정의(시대규정)인가, 아니면 “근대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범적 정의(당위)인가? 나아가서 근대를 벗어나야 한다면 왜 벗어나야 하는가, 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명확히 질문되지 않은 채, 따라서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것들을 묻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지 포스트모던하다는 주장을 비판하거나 일축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지금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좀더 근본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란 무엇인지, 탈근대란 무엇인지, 근대를 벗어난다 함은 무엇을 뜻하는지, 만약 근대를 벗어나려는 시도가 타당하다면 그 벗어남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즉 탈근대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것이 이 여섯 번의 강의를 일관하고 있는 제 문제의식입니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런 관점에서 근대성 자체를, 그리고 ‘맑스주의와 근대성’이란 주제를 이런 사고의 기초 위에서 다시 검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주제는 다음 기회를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철학의 경계
저는 예전에 쓴 책에서 “철학은 의심하기에서 출발한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이란 이런 방법으로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방식, 지배적인 철학과 투쟁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철학사는 전장(전쟁터)’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치고받는 이 투쟁을 통해 철학자들이 얻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철학 밑에서 사고되지 못했던 것, 또는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찾아내고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의 지배적인 사상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고 사고되지 않게 된 것을 찾아내고 확보하는 투쟁이 바로 철학인 셈입니다.
사실 철학에선 다른 사상가들과 자신이 어떤 점에서 다르며 어떤 점에서 새롭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독자적인 사상가로 남아 있기 힘듭니다. 즉 철학자들은 다른 사상가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철학사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고 보편성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보편성이 있으면서도 남과는 뭔가 다른 사상이어야만 철학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철학은 앞서 있던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서는 것에도, 무엇을 어떤 수준에서 넘어서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최소한 세 가지 수준의 ‘넘어서기’를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당시에 지배적인 어떤 사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앞의 지배적인 철학과 자신이 제시한 철학 간의 차이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선 사상을 넘어선다고 할 때 최소한의 필요조건인 셈입니다. 기존의 지배적인 사상 안에 머무는 게 아니라, 혹은 기존의 지배적인 사상 안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형성해내는 것이라면 최소한 자기의 앞선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칸트의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새로운 사고영역을 개척하려는 사상은 칸트의 사상을 넘어서야 합니다. 즉 칸트의 것과는 다른 철학으로 자신의 철학을 세우지 않는다면 새로운 사고영역을 열었다고 하기는 힘들겠지요.
물론 칸트의 사상을 넘어섰다고 해서 그 사상이 칸트 것보다 나은 것이라거나 발전된 것이라고 평가하기는 곤란합니다. 여기서 ‘넘어선다’는 말이 어떤 ‘발전’이나 ‘진화’를 뜻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합시다(기존의 것에 가려져 안 보이던 새로운 사고영역을 연다는 것이 반드시 발전일 이유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헤겔의 사상이 칸트를 넘어섰다고 해서(이건 사실이지요) 반드시 칸트 것보다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측면에선 발전이란 평가도 가능하겠지만, 다른 측면에선 정반대의 평가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과학에서와는 달리 철학에서는 아직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철학자가 살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새로운 사상은 하나의 흐름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몇몇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생각을 묶어주는 흐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륙의 ‘이성주의’니 영국의 ‘경험주의’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의 철학’이니 ‘실존주의’니 ‘구조주의’니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집니다. 새로운 사상은 때론 이같은 의미를 갖는 하나의 흐름을 넘어섭니다. 즉 어떤 흐름을 특징짓는 전반적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의 흐름을 넘어선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예컨대 로크가 데카르트를 넘어선다고 할 때, 이는 단지한 철학자의 사상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상을 열었다는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다수의 사상가들을 포괄할 새로운 사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로 유명한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의 용어를 빌면, 일종의 ‘패러다임 변혁’으로 비유할 수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변혁을 통해 새로운 사고방식에 인간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넘어서기’ 역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경계선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발전이나 진화 또는 진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과는 달리 얼마든지 역전 가능하고, 얼마든지 반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의 시대를 지배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주의니 경험주의니 하는 것들은 모두 다 ‘근대철학’으로 묶입니다. 이처럼 개개의 사상뿐만 아니라 흐름들을 하나로 묶는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철학이 무엇을 넘어선다고 할 때 가장 넓은 차원에선 이런 시대적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중세철학을 넘어서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사상을 세웠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런 차원의 ‘넘어서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은 사실 시대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것이 철학자들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변화가 철학자들에게 지각됨으로써 나타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 말대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질 무렵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철학의 역사 안에 그어진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 경계선마다에 새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나아가 자신의 그리고 인간의 사고를 ‘극한’(limit)으로까지 밀어붙여 보는 것입니다. 이래서 위대한 철학자는 알튀세르의 말처럼 “극한에서 사고하고 극한을 넘어서려고 감행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L'Unique tradition matérialiste”, Ligne, n° 18, Janvier 1993).
경계읽기와 ‘문제설정’
그렇다면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 경계선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자 자신이 자기 사상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경우는 결코 없으며, 철학책 어디를 봐도 경계선을 보여주는 표시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경계선 같은 건 애시당초 없는 건지도 모릅니다.
원뿔을 밑에서 보면 원으로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는 것처럼, 모든 것은 보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마찬가집니다. 데카르트를 로크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찾으려 할 때와 칸트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찾으려 할 때, 혹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그으려 할 때, 경계선은 모두 다 달라질 것입니다. 또 철학사를 반복의 역사일 뿐이라고 볼 때와 하나의 진화적 발전과정이라고 볼 때, 혹은 상이한 사상의 대체과정이라고 볼 때, 데카르트 철학의 경계나 그것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철학에서 경계선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경계선을 그어서 철학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경계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의 사상이나 철학적 흐름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 등을 파악할 개념적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문제설정(problématique, 이는 원래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에서 사용했던 것입니다)이란 개념을 사용하려 합니다.
일단 생소한 말일 테니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집 대문 앞에 아무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며칠 동안 계속 주차해 놓은 자동차 때문에 불편을 겪다가 화가 나서 그 얄미운 자동차의 바퀴에 펑크를 내버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침 차 주인이 그걸 보고 달려왔습니다. 제게 당연히 항의하겠죠. “아니, 차 좀 잠시 주차시켰다고 이렇게 펑크를 낼 수가 있소? 이건 명백히 불법행위요. 책임지고 배상해 주시오.”
그러나 그 자동차로 인해 숱하게 불편을 겪은 저로선 그 말에 순순히 응할 리 없을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불법행위’란 명목으로 고소하려하겠지요. 그럼 저는 그 자동차 주인을 ‘불법 주차’로 맞고소해야겠지요? 그럼 이제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낸 게 불법행위인가 아닌가”를 문제삼게 될 것입니다. 자, 얘기는 이만 줄이고 다시 철학으로 돌아갑시다.
여기서 문제가 어떻게 설정되었나를 봅시다.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를 낸 행위가 불법인가 적법인가?”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그 대답 역시 그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에 크게 좌우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제 행위가 법에 맞는가 아닌가만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봅시다. 자동차와 나, 자동차 주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그밖에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컨대 그 사람은 왜 주차장이 아닌 남의 집 앞에 불편하게 주차해 두었나? 그건 주차장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는 도시 교통정책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측면에서 접근한 거죠. 혹은 이럴 수도 있습니다. 왜 나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자동차에 펑크를 냈나? 자동차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차 때문에 하루종일 고생을 했으니 화가 나서 그랬다. 이는 심리적 측면에서 접근한 거죠.
그러나 이런 대답은 “불법인가 적법인가”를 따지는 문제에선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그 같은 문제에선, 불법 주차한 차에 손해를 입힌 게 불법인가 아닌가라는 법적 문제만이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어떤 종류의 대답은 대답이 될 수 없게 되고, 아예 생각하기도 힘들게 됩니다. 대답뿐만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해결은 교통정책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불법이니 아니니 하는 건 이 경우에는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심리적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그 해결 역시 심리적 차원에서만 가능합니다. 반면 법적인 차원에서 제기하면, 불법행위를 한 사람이 배상을 해주어야 해결이 됩니다. 이 경우 법 자체가 정당한지 아닌지는 결코 문제되지 않으며, 이렇게 문제설정을 하면 기존 법의 올바름은 당연시됩니다. 즉 법 자체를 다시 사고할 수 없는 문제설정인 셈이지요.
이처럼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문제를 사고하고 처리하며 대답하는 방식은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에서 “문제가 제대로 제기되기만 하면 이미 반은 풀린 것이다”라는 말도 하는 겁니다.
이건 과학에서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이론이 나온 뒤에 다른 행성의 궤도는 다 그 이론에 따라 계산한 게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은 안 맞았습니다. 이 경우 ‘이론을 반박하는 사례가 나오면 그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실증주의나 반증주의(포퍼)의 입장에선 “이론과 사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에 안 맞는 이론은 버려야 한다”는 문제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왕성 궤도를 잘못 계산한 뉴턴 이론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 거지요.
반면 뉴턴 이론의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건 다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는다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요인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일 거야. 그 요인은 대체 무얼까?”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이젠 다른 요인들을 찾아나서게 될 겁니다. 망원경이 부실해서 그런가? 아니면 70여 년마다 그 근처에 접근하는 헬리혜성 때문인가? 아니면 혹시 다른 별이 천왕성 근처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등등. 그리고 결국엔 천왕성과 명왕성 사이에 해왕성이란 행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란 걸 발견하게 됩니다.
상이한 문제설정은 이처럼 상이한 대답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철학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예컨대 “참된 인식은 무엇인가?”라고 문제를 설정하면, 당연히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참된 인식은 어떤 것이다”라는 식으로 됩니다. 거기에는 참된 인식/거짓된 인식이란 대비가 깔려 있으며, 참된 인식이 중요하고 그것이 철학이 추구해야 할 목표다, 등과 같은 사고방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대보름날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행동이나, “저 마지막 잎새가 지면 나도 죽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오 헨리 소설의 주인공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어떤 중요성도 없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든간에 말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데서 분명하듯이,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은 그 문제를 가지고 사고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한합니다. 그 안에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도 포함되어 있고, 그 중요한 것을 사고하는 데 기초가 되는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설정을 통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설정’이란 도구를 통해 철학의 경계를 찾아내고, 그 경계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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