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논리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은 얼마든지 반복됩니다. 여자를 둘러싼 결투도, 모욕적 시선에 대한 분노도, 배신에 대한 절망도 얼마든지 반복되는 사건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어디 이것뿐인가요? 원한에 의한 살인, 유산을 노린 존속살인, 강도들의 뜻하지 않은 살인 등등, 여기서 어떤 살인이 가령 유산을 노린 살인이라고 하려면, 그에 고유한 사물들의 최소한의 계열화가 있어야 합니다. 시신은 가족이나 배우자, 혹은 친족과 계열화되어야 하고, 거기에 유산이라는 재물이 계열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계열이 발견된다면, 그게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본에서 일어나는, 과거에 일어난 것이든 미래에 일어날 것이든 모두 ‘유산을 노린 존속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개의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이런 사건의 집합을 ‘이념적 사건’(ideal event)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어떤 사건을 가령 ‘유산을 노린 존속살해’라고 이해하게 해줄 최소한의 핵심적인 요소들의 계열화를 통해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그런 요소들의 계열화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 사건은 ‘이러이러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복되는 사건은 매번 다른 조건 속에서, 다른 요소들을 수반하여 나타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독약을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직접 칼을 쓰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청부살인을 하기도 하고 등등. 그래서 ‘이념적 사건’에 포함되는 모든 사건은 항상 어떤 ‘차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들은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요.
사건은 매우 다양한 계열화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반드시 계열화되어야 할 항들이 3개라면, 사건화의 가능성은 최대한 6개(3!개)가 있는 셈이지요. 그게 n개라면 n!가지 사건이 가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사물들은 그렇게 많은 사건, 그렇게 다양한 의미로 개방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것은 계열화를 지배하는 어떤 힘들 때문입니다. 가령 사진 한 장을 본다고 합니다. 거기에 죽은 시신 옆에 피묻은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경우 우리는 그를 ‘살인자’로 간주합니다. 시신-칼-피-사람이라는 계열화가 ‘살인’이라는 사건으로 계열화하게 하는 거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온 형사가 범행에 사용된 칼을 들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육점 주인이 죽은 시신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경우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식(良識)에 따라 살인자로 즉시 계열화하여 포착합니다. 그게 ‘양식’이고 흔히 말하는 ‘상식’이지요.
이런 점에서 ‘양식’이나 ‘상식’이란 다양한 계열화의 가능성을 제한하여 어느 하나로 계열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양식을 불어로는 봉상스(bon sens)라고 하는데, 상스(sens)라는 말에는 의미와 더불어 방향이란 뜻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계열화의 ‘좋은 방향’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계열화하게 만드는 힘이 작동하고 있는 거지요. 그것은 통상적이지 않은 사건들을 통상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하는 힘이며, 다른 종류의 계열화를 가로막는 힘이지요. 「라쇼몬」의 여러 계열들은 통상적인 계열화, 양식에 따른 계열화와 다른 계열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양식에 따른 계열화를 끊임없이 풍자하고 비판합니다. 가령 소녀와 빵과 뜀박질을 양식에 따라 계열화하는 사람은 그것을 ‘도둑질’로 사건화하지만, 주인공 찰리는 배고픔이나 굶주림으로 사건화합니다. 시위대 앞에 있는 빨간 깃발은 시위대를 이끄는 공산주의자의 적기로 사건화되지만, 그것이 트럭에서 떨어진 깃발을 들고 가는 찰리와 그 뒤에 골목길에서 나와 전진하는 시위대가 그저 우연히 접속한 것임을 아는 우리는 그를 체포하러 달려드는 경찰들됩니다.
이처럼 양식에 반하는 계열화를 통해서 양식의 힘과 대결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들뢰즈는 ‘역설’(paradox)이라고 을 보고 웃게 정의합니다. 역설이란 통념을 뜻하는 그리스어 독사(doxa)에, 반하여 (against)를 뜻하는 para를 붙여 만든 말이지요. 양식이라는 통념(doxa)에 반하는(para) 계열화를 유발하여 새로운 사건으로, 새로운 의미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장치라고 말하는 거지요. 예컨대 중국의 운문선사는 “부처가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에 “뒷간 똥막대기다”라고 대답합니다. 보다시피 황당한 대답이지요. 그러나 운문스님은 도를 깨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분입니다. 깨친 사람이 진지하게 대답한 겁니다. 그는 이럼으로써 질문한 사람이 부처에 대해 갖고 있던 모든 종류의 통념을 단박에 날려버리고 있는 거지요. 그 모든 통념들을 날려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대답인 겁니다.
고정된 의미를 재생산하는 양식과 통념에 반하여 이전과 다른 의미를 만드는 새로운 계열화의 선을 그리는 것, 새로운 의미ㆍ새로운 사유 가능성의 지대를 여는 것, 이게 바로 양식과 역설이란 개념을 통해서 들뢰즈가 제안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의 논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기존의 것을 변이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건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사건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즉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논리나 사건화의 방법을 해명하면서, 그것에 머물지 않고 그와 다른 변이와 생성의 선을 그리는 새로운 의미의 논리, 사건화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정된 의미를 재생산하는 것이 정착적인 것 이라면, 이처럼 새로운 사건화의 선을 통해서 주어진 의미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창안하는 것을 ‘유목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노마디즘’(nomadism)이라고 부르는 철학 내지 정치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 프로그램과 사이보그의 생식법
박테리아는 다음 세대의 자식을 만들지 않고 번식한다. 즉 자기 자신이 다른 개체와 섞여 자신의 자식이 된다. 그것은 생식을 하지만 자신이 바로 생식의 결과물인, 부모인 동시에 자식인 존재다. 따라서 박테리아에게 죽음이란 없다. 오직 변이만이 있을 뿐이다. 변하는 것으로서의 영원성 인간이 그토록 심오하게 사유해도 얻지 못한 영원성을 박테리아는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셈이다.
바토만이 아니라 인형사 역시 쿠사나기에게 매료된다. 하지만 뜻밖에 수줍은 바토에 비해 인형사는 구애에 적극적이다. 그는 망가진 몸으로 감히 말한다. 쿠사나기와 합체하고 싶어서 공안9과로 들어간 거라고, 그 두 개의 신체는 접속하여 섞이기 시작한다. 박테리아식 생식? 혹은 프로그램-생명체와 사이보그의 결혼식? 그 두 신체를 연결해준 바토는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의 주례를 서게 된 셈일까? 물론 그는 아직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합체의 결과 탄생한 것(두 번째 사진)이 여전히 쿠사나기일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달라진 건 껍데기(의체)만이 아니다. 그는 쿠사나기인 동시에 인형사인, 아니 쿠사나기도 아니고 인형사도 아닌 새로운 존재다. 바토의 마음을 알고 있는, 그래서 쉽게 연결을 끊지 않는 새로운 ‘쿠사나기’다. 그 ‘쿠사니기’는 바토의 제안을 가볍게 뒤로 하고 그의 집을 벗어나 밖으로 나간다. 공안9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방대한 네트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네트의 바다를 떠돌다 불쑥 솟아나 바토의 곁에 반복하여 나타난다(세 번째와 네 번째 사진), 또 다른 의체를 빌려서. 하지만 그 다른 ‘쿠사나기’들이 껍데기만 다를 뿐 똑같은 쿠사나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전편의 바토처럼 사태를 파악하기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타날 때마다 다른 존재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존재. 이런 점에서 반복은 차이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사건이 종결되고, ‘쿠사나기’는 이제 다시 네트의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리고 또 바토가 ‘부르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아니, 우리가 부르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네트의 바다가 있는 한, 생명의 바다가 있는 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No Where), 언제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NowHere) 그런 존재.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