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장
잔치에 초대된 자들
제64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한 사람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 그가 만찬을 준비한 후에 손님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종을 내보냈다.
2그 종이 최초의 사람에게 가서, 그에게 말했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3그 사람이 말하였다: ‘몇몇의 상인들이 나에게 빚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오늘 밤 나에게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서 그들에게 상환의 지시를 해야만 합니다. 죄송하지만 만찬을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4그 종은 다음 사람에게 갔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하셨습니다.’ 5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는 방금 집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 볼 일을 보러 가야합니다. 저는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6그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7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의 친구가 결혼합니다. 제가 그 피로연을 마련해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만찬을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8그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합니다.’ 9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는 최근 큰 농장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소작료를 거두러 가야합니다. 저는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10그 종이 돌아와서 그의 주인에게 아뢰었다: ‘당신께서 만찬에 초청하신 분들은 모두 사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1그 주인이 그의 종에게 말하였다: ‘길거리로 나아가서 네가 만나는 누구든지 만찬에 올 수 있다고 하면 데리고 오라.’
12거래인들(비지니스맨)과 상인들은 나의 아버지의 자리들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1Jesus said, “A person was receiving guests. When he had prepared the dinner, he sent his servant to invite the guests.
2The servant went to the first and said to that one, ‘My master invites you.’ 3That person said, ‘Some merchants owe me money; they are coming to me tonight. I must go and give them instructions. I ask to be excused from the dinner.’
4The servant went to another and said to that one, ‘My master has invited you.’ 5That person said to the servant, ‘I have bought a house and I have been called away for a day. I shall have no time.’
6The servant went to another and said to that one, ‘My master invites you.’ 7That person said to the servant, ‘My friend is to be married and I am to arrange the banquet. I shall not be able to come. I ask to be excused from the dinner.’
8The servant went to another and said to that one, ‘My master invites you.’ 9That person said to the servant, ‘I have just bought a farm, and I am on my way to collect the rent. I shall not be able to come. I ask to be excused.’
10The servant returned and said to his master, ‘The people whom you invited to dinner have asked to be excused.’ 11The master said to his servant, ‘Go out on the streets and bring back whomever you find to have dinner.’
12Buyers(businessmen) and merchants will not enter the places of my father.”
이 장의 내용은 큐복음서에 병행하는 것으로(Q69), 그 내용이 명료하여 기존의 복음서의 의미맥락과 대차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속적 부에 대한 관심이 인간 내면의 풍요와 계시의 자리에 초대되는 것보다 급급한 인간의 삶에 대한 경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 장(Th.63)의 테마가 연장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기존 복음서를 해석하는 자들은 이 비유 전체를 종말론적 전제를 가지고 해석한다. 누가는 이 비유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눅 14:15)라는 말을 삽입하여 종말론적 분위기를 깔아놓고 있다. 여기 만찬은 ‘종말론적 잔치(the eschatological banquet)’이며 ‘메시아의 잔치(the Messianic Banquet)’이다. 그러나 도마에는 그러한 메시아적, 종말론적 맥락이 없다. 그것은 세상 끝날의 잔치가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나의 아버지의 자리들(the places of my father)’에로의 들어감이다. 여기 ‘자리들’이라는 복수형의 표현만 보아도 그것이 어떤 초월적인 단 하나의 자리, 즉 초월적인 천국이라는 실체가 아님이 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라는 게임도 반드시 ‘삶의 형태(Lebensform)’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듯이, 천국도 반드시 ‘삶의 자리들’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 장의 비유는 종말론적 잔치에로의 초대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자리에로의 초대인 것이다.
큐복음서의 병행문은 누가 쪽이 마태보다 훨씬 더 큐복음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사료되는데, 도마복음서는 큐복음서보다도 더 프로토타입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눅 14:16~24)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17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하매, 18초대된 그들이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더라. 첫 사람은 종에게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하나는 가로되, ‘겨릿소 다섯 쌍(한 겨리당 두 마리이므로 전체는 열 마리)을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신체부자유자들과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가로되 ‘주인이시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하였다” 하시니라.
여기 도마와 누가를 비교해보면 재미난 문제들이 많다. 우선 눅 14:21 후반부터 14:23까지는 누가의 삽입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도마의 12절의 총평에 해당되는 부분이 누가에서는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24절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도마의 초청과정에서 나타나는 종과 피초청인들의 초청거절의 대화가 누가에서는 아주 축약된 형태로 다듬어졌다. 그리고 누가는 초대된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게 사양하였다는 사실을 앞머리에 밝혀놓음으로써 드라마적 전개의 긴장감을 떨어뜨렸다. 도마는 예수 말씀의 전개를 하나 하나씩 따라가는데 반하여, 누가는 그것을 다 안 후에 요약하고, 그 과정을 다시 재현한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누가자료에서는 초청거절자들이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농민임에(①밭 ②겨릿소 다섯 쌍 ③장가) 반하여, 도마자료에 나오는 거절자들은 도시의 비즈니스맨들과 대상인들이다(①고리대금 ②부동산투기 ③결혼피로연 베푸는 부자 ④농장소유주).
그런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도마는 초청인에게 합리적인 이유가 결여되어 있는데, 누가는 그러한 불합리성을 개선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도마를 잘 읽어보면 초청인은 우선 만찬을 다 준비해놓고, 즉 음식을 무전제로 다 마련해놓고 난 후에 무작정 종을 내보내어 하나씩 컨택을 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도시의 부자들이 그 초청을 거절하는 이유도 매우 정당하다. 그들이, 예약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들의 긴급한 업무를 제켜놓고 그 초청에 응해야만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실 이러한 경우라면 주인은 그들에게 나중에 음식을 싸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을 저주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유대인의 습관에, 물론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잔치 초대인은 대체로 한 커뮤니티의 명망있는 풍요로운 리더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망가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그 명망가의 체면의 손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거절에는 전략과 규칙이 필요하다. 신명기 20:5~7, 24:5에 보면 전쟁에 안 끌려나갈 수 있는 보호법률이 실려 있는데, 그와 비슷한 성격의 불문율이 이스라엘 사회에 통용되었을 것이다. 여기 부호들의 거절이유는 외면상 그다지 큰 결례를 범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비유의 원래적 의도가 사실적 대응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시 지혜론적 담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진리탐구의 세계에 있어서는 이미 그 지혜가 마련된 자들이 초청하는 것이다. 초청해놓고 음식(지혜)을 장만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도시 부호들의 진리에 대한 무감증(apathy)일 뿐이다. 그들의 거절에 대한 분노가 비유의 초점은 아닌 것이다. 아마도 예수운동에 대해서 가장 무관심했던 사람들은 당대의 거래인들(브로커들), 대상인(大商人)들이었을 것이다. 도마의 예수는 그들의 거절에 그리 큰 분노를 표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길거리로 나아가서 네가 만나는 누구든지 만찬에 올 수 있다 하면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는 진리의 개방성을 선포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향심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아버지의 자리(천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구태여 ‘가난한 자, 신체부자유자, 소경, 절름발이’에 그 참여를 국한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도마의 내면적 논점을 외형화시키고 철저한 종말론적 천국의 담론으로 변형시키기 위하여, 누가는 우선 거절자들의 성격을 처음부터 규정시켰다. 즉 잔치를 배설(排設)하기 전에 미리 다 예약을 해놓은 동네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새로 밭을 구매한다든가, 겨릿소 다섯 쌍을 산다【100에이커 정도를 갈 수 있다. 당시 한 세대가 평균 3~6에이커 정도를 소유했으므로 부농이다】든가 하는 것으로 보아 부농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들의 거절은 약속위반이다. 이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그러니 주인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하다. 그래서 음식은 다 장만되었고 내다버릴 수도 없고 하니, 우선 ‘가난한 자들, 신체부자유자들, 소경들, 절름발이들’을 불러들인다. 그것도 성이 안 차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 집을 채우게 만든다. 그리고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고 저주를 선포한다. 언뜻 보기에, 천국에로의 초대가 약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배려인 듯이 보이지만, 정확한 논리적 맥락을 따라서 그 비유를 평가해보면 무리가 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누가의 변형을 마태는 매우 저열하게, 더 악독하게 변형시켜 놓고 있다.
(마 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게 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보소서! 내가 만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더라.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盡滅)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말았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 하나니, 사거리 길에 나아가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님이 가득하였더라.
그러나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잔치 자리에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저놈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둠 속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참으로 황당한 저질적인 변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잔치에로의 초대가 권위와 폭력과 강압과 처벌로 점철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이미 마태의 시대의 절박한 교회상황을 반영할 수도 있다. 누가의 ‘어떤 사람’이 마태에서는 ‘어떤 임금’으로, 누가의 ‘큰 잔치(만찬)’가 마태에서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로 바뀌었다. 그리고 누가에서는 초청이 한 회의 사건이었으나 마태에서는 두 회의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초청자와 피초청자의 관계가 폭압과 처벌이 되고 있다. 도마와 누가에 있어서는 피초청자의 거절이 평화롭게 넘어갔던 것이다. 더구나 두 번째 초청시에(22:9) 자기가 궁색하여 모든 사람을 강제로 들여다놓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수족을 결박하여 어둠 속에 처박는 비관용의 폭력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마 21:43) 그 자체의 성격을 매우 폭력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임금됨’이 이렇게 폭력적이라면 마태는 예수의 메시아상을 정말 잘못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설교를 잘 해잡숫기에는 편리한 변형일 수도 있겠지만, 도마에서 누가로, 누가에서 마태로 진행되는 이 비유의 변형과정을 통하여 원시기독교가 얼마나 지혜론적 담론에서 궁색한 폭력적 종말론으로 변형되어갔는가, 그 역사적 전변의 드라마를 우리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의 저질성은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복음서의 자료들은 신앙의 대상이 아닌 선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미국 주요 신학자들을 총망라한 지저스 세미나(The Jesus Seminar, 1985년 결성) 운동도 이러한 선택의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 어둠교회 중앙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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